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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치킨 먹고, 사춘기! ㅣ 책이 좋아 3단계
박효미 지음, 임나운 그림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24년 2월
평점 :
제목이 맘에 든다. 딱 뭔지 알겠는 느낌이다. 세상 무너진 듯이 감정의 홍수가 흘러도, 먹을 건 먹고!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기분이 어떤가? 어이없는 느낌도 들지만 나는 한편 안심이 되더라.
사춘기 아이들이 등장하는 단편 다섯 편을 모아놓았고, 연애라는 소재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나는 오랜 경력과 다양한 경험에 의하여 연애를 요란스럽게 하는 아이들을 싫어하게 되었지만, 이 소재의 동화들은 눈여겨본다. 뒷표지에 김서정 평론가님의 이런 평이 매우 반가웠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진정한 연애 동화'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해 왔다. 아이들이 '연애'라는 새로운 충돌을 통해 인간관계의 오묘함과 지난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것을 힘겹게 통과하며 어떤 성장의 단계에 도달하는 이야기를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훌륭한 작가님들이 이미 꽤 써놓으셨지만, 이 책도 그 목록에 들어가면서 겹치지 않는 특별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평하고 싶다.
첫번째 작품 [체중계의 사랑]에서 담하는 한창 연애가 무르익고 있던 동준이에게 난데없이 차였다.
"그만 만나."
라는 톡 한마디로.
담하는 친구 정민이와 함께 그 이유를 탐구하기 시작했는데, 살 때문이라는 심증이 굳어졌다. 그들은 함께 수영장에 다녔고 최근 담하는 체중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아챈 담하는 분노의 다이어트에 돌입하는데, 정민이한테 이런 소리를 들었다.
"류동재 보라고 살을 빼? 그자식 보라고?"
이후 어떤 계기로 담하가 부끄러움의 현타를 쎄게 맞으며 이 작품은 끝난다. 그 부끄러움은 담하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시험지로 만들어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는 자각이었다.
자기관리는 하는 게 좋다. 비만은 건강에 나쁘기도 하고, 자기만족에도 해가 된다. 하지만 남의 눈에 비친 내가 기준이 되어선 안된다. 연애의 함정 중 하나이다. 담하는 그걸 일찍 깨달았으니 예방주사를 참 빨리도 맞은 거네. 실패한 연애는 이렇게 인생에 약이 되기도 한다.^^
두번째 작품 [사랑의 물 분자]에서는 특이한 공통 관심사로 커플이 된 조하나와 경지완이 나온다. 둘다 '두루마리 연금술 까페' 회원이란 걸 알게 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둘은 많이 다르다. 조하나는 사귄다는 일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하나의 눈에는 때로 지완이 야속하고 성에 차지 않는다.
연금술에 관심을 갖는 하나는 과학수업에서 배운 '화합물' 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너는 수소고, 나는 산소야. 우리는 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우리가 사귀어서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어 내려면 어떤 규칙이 필요해."
이러면서 하나는 둘만의 규칙을 만든다. 서로의 톡에 바로 답한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허락을 받는다 등의, 말하자면 서로 속박하는 규칙이라 하겠다. 이렇게 하나의 연애의 꿈은 거창했으나, 바로 깨져 버렸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내 주인은 나잖아. 네가 아니라고!"
아이고 창피해라. 하지만 이렇게 이불킥 하면서 점점 나은 사람이 되는 거지 뭐. 이 작품을 읽으며 이런 문장을 생각해냈다.
"연애는 화합물이 아니고 혼합물이다."
지난 학기 과학시간에 중요하게 가르친 개념 중에 혼합물이 있었는데 그 뜻은 이러하다. 두가지 이상의 물질이 성격이 바뀌지 않은 채로 섞여있는 것. 오호 이게 연애에도 적용이 되는구나. 세상엔 아직도 깨닫고 발견할 게 천지삐까리란 말이지.^^
세번째 작품은 [전류 차단의 원칙] 오, 이건 또 뭘까. 이 책엔 과학적 개념이 많이 나오네? 이 작품엔 오랫동안 함께 어울린 두 가정이 나온다. 류희재, 류희원 자매의 가정. 또하나는 윤진원 가정이다. 사랑의 불꽃이 튀는 방향은 참 예상하기 어려워서, 어린시절 깨벗고 함께 놀던 아이들이 사춘기로 접어들자 진원이가 '희재누나'를 흠모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둘이 사귀기 시작했다. 근데 더 웃긴건 희원이 마음도 야릇해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셋은 적당한 전류가 흐르는 공간에 갇혀 적당한 찌릿함을 즐기며 팔딱거리는 중이었다.
이 상황을 파악한 양가 어른들이 나섰다. 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바로 옛날 구도로 돌아갔다. 그 상황을 작가는 '부도체를 만나서 전류가 차단됐다'고 표현했다. 웃음이 나왔다. 이 어른들의 부도체 역할을 어떻게 봐야할까? 심술궂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도체의 실험은 필요하다. 그래야 그게 유사감정의 유희인지 진정한 사랑인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어린이들 대부분이 이 전류놀이를 즐기고 있거든. 그 전류놀이를 동네방네 떠벌리고 자기들 감정으로 남까지 피곤하게 하는 것처럼 민폐가 없어요. 작가님 진짜 짱이다. 내가 이런 작품을 쓰고 싶었는데. 이 작품에 매화가 나오는 마지막 장면처럼, 소중하고 따뜻한 감정은 오래 살아서 숨쉴 것이니 조급할 필요가 없다구요.
네번째 작품 [나는 여기 있다]는 전학 온 재희의 첫사랑 회상이다. 재희는 자신을 모르는 어떤 상대방을 혼자 지켜보며 좋아했다.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실체를 모르고 내가 만들어가는 이미지로 좋아한다는 면에서 속성이 비슷했다. 그 사랑은 대상을 맞닥뜨린 후에 곧 깨졌다.
"어떤 의미든, 그게 대단하든 별것 아니든, 그 모든 일은 내 생각에서 시작된다."
"가상의 세계는 날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곳에만 있을 생각이다. 나는 여기 있다."
마지막 [나는 괜찮나요?]는 할머니, 아빠와 함께 사는 지유의 이야기다. 평생 엄청난 노동으로 자식들을 길러냈지만 이제 손가락이 아파 그럴 수 없는 할머니가 지유의 주 양육자다. 엄마는 없었다. 지유는 그 빈곳을 친구 은지와의 관계로 가득 채워보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아픈 깨달음만 얻는다. 이 책 중 유일하게 남녀 연애 이야기가 아니지만 관계의 이야기라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할머니의 온찜질을 위해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는 장면으로 이 책은 끝난다.
쓰면서 생각해보니 주인공들이 원하는 관계는 하나도 이루어진게 없었다. 다 실패였다. 하지만 어둡지 않았다. 어쩌면 이 실패는 우리 인생의 일상다반사이고 통과의례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 과정 속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읽는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일단 치킨은 먹고! 그다음 괜찮아지는 아이들 모습에 안심도 된다. 이 책에는 표제작이 없다. 제목을 따로 지은 것인데, 그 제목이 전체를 잘 아우른다고 생각한다. 고학년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