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 - ‘말’에 관한 여덟 가지 이야기 큰곰자리 76
모리 에토 지음, 시라코 외 그림, 김소연 옮김 / 책읽는곰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화가 거기서 거기처럼 느껴지는 기간이 있는데(권태기?) 거기다 찔긴 감기로 코로나때처럼 무력하게 며칠 앓다보니 동화책은 저 멀리로.... 다행히도 우연히 잡은 이 책이 좋아서 다시 조금 다가앉게 되었다. ‘말에 대한 여덟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바른 말, 고운 말, 말의 힘에 대한 책이겠구나 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단순한 주제동화 모음집은 아니다. 주제가 각잡혀 있는 느낌보다는 훨씬 더 깊고 유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여덟 가지 이야기마다 각기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삽화를 그렸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일본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참여했다는데 나는 잘 모르는 이름들이지만 어쨌든 그림체도 느낌도 제각기 다르고 다양해서 좋았다.

‘말’에 대한 이야기지만 어떤 이야기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느껴진다. 그 둘은 접점이 많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작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리쓰와 슈야가 번갈아 화자로 서술하며 그들에게 있었던 일과 그 해결을 보여준다.

둘은 말하는 스타일이 완전 다르다. 리쓰는 좀 망설이고 뜸을 들이는 스타일이다. 그런 리쓰에게 즉답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반면 슈야는 마구 던지는 화법이다. 겨냥도 없이 막 던진다고 할까. 말이 많은 거지 한마디로. 점심시간에 '어느 쪽이 더 좋아?' 라는 밸런스게임 비슷한 그런 놀이를 하고 노는데 이럴땐 리쓰가 문제다. "글쎄...." 라든가 "둘다 좋아" 라고 하면 김새는 거니까. 나라면 그냥 아무거나 댈 텐데 리쓰는 망설인다. 진짜를 대답하고 싶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생각한 것이 바로바로 말로 나오지 않는 한계도 있다.

이 모습에 속터진 슈야는 면박 주는 소리를 한마디 해버린다. 가볍게 던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어쩌나. 리쓰의 입이 굳게 닫혀버렸다. 신경쓰인 슈야는 야구연습도 포기하고 하교길을 동행하는데, 어색한 침묵은 무겁기만 하다. 행운이었을까. 난데없는 소나기가 쏟아졌고 아이들의 응어리는 씻겨 내려갔다. 하지만 리쓰는 한마디를 꼭 해야 했다.
"나, 맑은 날씨를 좋아하지만 가끔은 비도 좋아. 정말로 둘 다 좋아해."
둘이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갈등은 해소되었다. 이후 둘의 말하는 스타일이 극적으로 바뀔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염두에 두게 될 것이다.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 이 책이 참 좋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교훈을 정해놓고 거기만 좁게 파면 뻔한 이야기가 돼서 재미가 없다. 이 책은 '말'을 소재로 잡았지만 범위는 그보다 훨씬 넓은 느낌이다.

추가로, 슈야의 어머니가 한 말 중에 대화를 공 던지기에 비유한 부분이 있는데, 매우 유용한 비유라 꼭 기억해두고 싶다.
"대화라는 건 상대방 말을 받아서 정확하게 다시 던지는 거야. 너는 혼자서 공을 툭툭 던지기만 하는데, 그래서는 벽에 대고 치는 탁구나 마찬가지라고."
대화는 캐치볼. 정말 좋은 비유다. 던지는 것도, 받는 것도 다 중요하겠다. 슈야의 마지막 문장의 여운이 길다.
"공을 던지지 못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리쓰의 말을 제대로 받아 낸 것인지도 모른다." (19쪽)

두번째 작품 [쟤가 불편해]는 매우 현실적이고 마음이 편해지는 주제를 담았다. 이 작품을 킵해놨다가 어떤 아이들이나 어떤 부모들에게 읽히고 싶을 정도다. 이 작품의 키워드를 '견원지간'이라고 하고 싶다.ㅎㅎ 즉, 너무 싫은 상대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라는 문제다. 결론은 포기하라는 거다. (얼마나 편해?ㅋ) 도저히 좋게 엮을 수 없는 관계도 있는 거다. 그럴 때는 인정하고 거리를 두는게 상책.

생각해보면 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지도를 한 적이 꽤 있었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는 없어. 너희들은 좋은 말로 서로를 대할 수 없다면 당분간 서로 상대하지 마. 얘랑 꼭 사이좋은 친구가 되지 않아도 돼. 단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에는 끼어들지 마. 쟤랑 놀지 말라든지 하는 참견은 금물이야. 그것만 명심하고 너희 둘은 떨어져."
이렇게 '절교'를 시켜주는 몰지각한 선생을 봤나? 그런데 이럴 필요가 있을 때가 있더라는 거다. 분명히.

"어떻게도 되지 않는 타고난 궁합이야. 어느 쪽이 잘했다거나 잘못했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야. 고민해봐야 시간 낭비야. 뇌세포 낭비라고."
"마음이 안맞는다는 건 그런거야. 안 맞는 건 안 맞아. 그렇게 이해하고 끝낼 수밖에 없어. 안 맞는 상대가 누구한테나 있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29쪽)
이 대목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이상적으로는 누구나 사랑하는게 맞지만 우리는 부족한 인간이니까.

세번째 작품 [도미타에게 보내는 메일]은 제목 그대로 미사토가 도미타에게 보낸 메일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미사토는 학급간 경기에서 엄청나게 실수를 했고, 열심히 연습한 학급 친구들에게 슬픔을 안겼다. 주장으로 아이들을 이끌었던 도미타가 다가와 조용히 치명적인 말을 속삭이고 갔다. 미사토는 충격을 받았지만 다음날부터 도미타는 예전과 다름없이 웃으며 미사토한테 잘해준다. 아마 그 일이 미안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미사토는 그 의도를 짐작하고 고맙게 받아들이면 되는걸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그래도 말을 하는 쪽에 무게를 둔다. 그 '말'은 꼭 입으로만 해야 되는 건 아니다. 글도 말의 역할을 충분히, 때로는 더 효과적로 해낸다. 그래서 미사토는 메일을 선택한 것이다.

"말이라는 건 무섭지만, 그래도 말이 없으면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끝나 버릴 때도 있는 것 같아.
우리를 얽매고 있는 말을 푸는 것도, 역시 말을 이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기분이 들어.
그러니까 역시 용기를 내서 이 메일을 보낼게. 보내기로 지금 결심했어." (54쪽)
어린아이의 문장 치고는 참 중요한 진리가 담긴 문장이다. 말이란 남발해서도 안좋지만 필요한 시점에서는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 메일에서 끝난다. 도미타의 답장은 나오지 않았다. 도미타가 이 메일에 담긴 미사토의 진심을 읽고 답장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학급 아이들과 그 답장을 함께 써보고 싶다.

리뷰가 길어지니 몇 편은 뛰어넘고 마지막 작품 얘기를 하겠다. [내일의 말]이라는 작품이다. '유'는 시골학교로 전학왔다. 좋게 온건 아니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빠랑 아빠 고향으로 이사한 거라서. 고향으로 오자마자 아빠는 사투리를 쓰기 시작하고,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투리도 구수하다. (역자는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을^^) 시골 사람들 특유의 오지랖인지 유에게 다들 친절하고 잘해주려 애쓴다. 하지만 유는 더욱 기운이 빠지기만 할 뿐이다.

그런 유에게 힘이 나는 말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왔다. 아주 일상적이고 흔하디 흔한 말이었다. 그렇구나. 예쁜말 고운말은 따로 상품처럼 있거나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 또 놀자고!"
웃으며 건넨 이 말 한마디였다. 이 말에 유는 내일의 힘을 받았다고 한다. 표지에 쓰여진 "어떤 말은 내일로 이어진다"는 문장이 여기서 나온 거구나.

이 책은 말에 대한 이야기면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삶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쉽지 않지만 무작정 어렵기만 하지도 않고, 정답은 없지만 경계는 있으며 무엇이 어느 쪽에서 다가올지는 모른다는 점에서 말도 관계도 인생도 비슷한 것 같다.

문장이 쉽고 간결하면서도 때로 유머도 있고 감각적 표현도 돋보이는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옥의 티를 굳이 하나 고르라면, 표지 그림을 [쟤가 불편해]에서 뽑으셨는데 표지로 쓰기엔 느낌이 썩 조으지 아니했다. 전체적인 메시지와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만 그런지도 모르지만 '다른 좋은 그림도 많은데' 라는 아쉬움? 그것만 빼면 다 좋았다. 읽고 함께 나눌 이야기가 무척 많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