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최애 다산어린이문학
김다노 지음, 남수현 그림 / 다산어린이 / 202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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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고 계신다는 페친들의 포스팅을 몇번 본거 같은데 내가 제대로 읽지 않았는지 장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읽어보니 단편이었고, 정확히 말하면 6학년 한 학급 아이들이 주연과 조연으로 바뀌어 등장하는 연작동화였다. 봄부터 겨울(졸업)까지로 이어지는 차례만 보아도 감각적이고 섬세한 감성이 돋보였다. 내용 또한 그러했다.

잘못 알고 있었던 것 외에 또 하나의 사전 정보는 이 책이 사랑이야기, 그러니까 초딩 연애담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일전에 초딩 연애동화 목록을 만든 적이 있다.ㅎㅎ 거기에 또한권 추가로군!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잘 쓰여진 초딩 연애동화를 귀하게 여기지만 그 연애 자체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가 아이들을 지도하고 통솔해야 하는 입장이 아닌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좋아좋아~ 하고 웃으면서 귀엽네 하고 부채질도 해줄 수 있는데, 학급의 분위기와 태도에 온 감각을 집중해야 하는 담임으로서는 무방비로 헤헤거리다간 순식간에 무너진 교실 분위기를 다시 세우느라 무진 애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가오는 사랑을 어쩌겠는가? 조선시대도 아닌데 가슴으로만 묻고 벙어리 냉가슴 앓으라고? 그런 뜻은 아니다. 다만 감정놀음에 속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건강한 일상과 병행하란 뜻이다. '작가의 말'에 바로 그 뜻을 지닌 세련된 문장이 나온다.
"나는 부드럽고 신중한 로맨스를 알고 있다."
작가님은 어떤 박물관에서 옷의 단추에 작게 새겨진 이 문장을 보았다고 한다. 나는 작게 감탄했다. 와... 이런 걸 발견하는 눈과 마음이 작가구나. 그리고 그게 마음 속에서 여물고 다듬어져 작품이라는 것으로 태어나는구나.

그러니 나는 작가와는 얼마나 다른가. 나는 교실에서 "누가 누구 좋아한대!" "누구 누구가 사귄대!!" 하면서 꺅꺅 괴성 지르는 걸 흐뭇하게 지켜보지 못하는 아주 딱딱한 교사다. 그리고 교실 안에서 그런 말 공공연하게 하는 걸 단속한다.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예요. 싫어하는게 문제지 좋아하는 게 문제겠어요? 하지만 공개적으로 누굴 언급하는 건 삼가하세요. 그건 언급된 사람이나 언급되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불편해요. 말하자면 공동체를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말인 거예요!"
이런 식으로 그럴듯하게 말하면서, 속마음은 아마도 '사랑도 좋고 다 좋은데, 제발 떠벌이지 말고 조용하게 좀 해줄래? 지금 사랑이 영원할 리가 없는데 니들 할 일은 하면서 해야 할거 아니야.' 이런 생각일 거다. 이런 나에 비해 작가님은, 그리고 그 옛날 단추에 그 문장을 새겼던 이의 언어는 얼마나 수준있고 세련되었나. '부드럽고 신중한 로맨스'라니.

자, 이제 작가님이 이 책에서 그린 로맨스들이 얼마나 부드럽고 신중한지 감상할 차례다. 첫번째는 봄 이야기 [무지와 미지]. 서미지는 또래 여학생들보다 머리 하나쯤 훌쩍 큰 아이다. 그정도면 남자아이들보다도 크다. 더구나 강무지는 반에서 가장 작은 남자아이. 그런데 미지가 무지에게 고백을 했다. 거기에 대한 무지의 답은 "난 나보다 키 큰 여자는 싫어."라는 세상 찌질한 말이었지 뭐야. 쿨한 미지는 알았다고 바로 돌아섰지만, 그때부터 일렁이는 건 무지의 마음. 편견과 자격지심에 떠밀려 부정했던 것을 다시 되돌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는 수난과 함께 다가오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요즘 우연히 보았던 이영지 가수의 ‘small girl’ 뮤직비디오가 떠올랐다. 이름만 들어본 가수였는데 갑자기 호감과 관심이 생겨서 검색까지 해보았다. 이 가수의 키는 175라고 한다. 옛날보다는 여성들도 큰 키를 선호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남성보다 작아야 하고, 품에 쏙 들어가게 귀여워야 하고... 등등의 판타지라 이름하는 편견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 같다. 아니 그 판타지는 나 때보다 더 치밀하고 잔인해진 느낌이다. 왜 그럴까.... 그런데 이 노래에서의 연인은 당당하게 말한다.
“Girl I don’t got no fantasy”
무지와 미지. 이 뮤직비디오의 주인공들보다 더 멋지게 성장할 거라 믿는다.

여름 이야기 [눈인사를 건넬 시간]에서는 들이대는 덕형이와 부담스러워하는 수민이가 주인공이다. 사랑을 소위 ‘강하고 남자답게’ 표현하는 걸 멋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겠지. 그런데 그 결말을 보면 그것이 폭력과 종이 한 장 차이더라고. 말하자면 사랑이라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이고 완전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법을 누구나 배워야 할 것 같다. 남자든 여자든. 여린 수민이가 차츰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덕형이가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태도를 고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음 사랑은 폭력이 아니게 될 수 있을 테니까.

가을 이야기 [그리고 한 바퀴 더]는 육상부 만년 2인자 채준구와 다소 엉뚱하지만 어른스러운 갈기온의 이야기다. 준구 아버지는 이제 육상부를 그만두라고 명하셨다. “언제까지나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순 없어.” 준구는 그만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고, 운동회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기온이가 2인3각 종목에 손을 번쩍 들며 준구랑 같이 나가고 싶다고 한다. 끙끙대는 준구와는 반대로 기온이는 어려움 없이 자신있는 말을 한다.
“우리 태어난 지 10년 조금 넘었을 뿐인데 지금 좋아하는 걸 해야지, 언제 하려고.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한데, 뭘 벌써 포기하냐?”
나이든 나는 아버지 말씀도, 기온이 말도 상황에 따라 다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걸 포기하고 그만큼 매진할 것을 찾을 수 없어 무기력해진다면 포기는 너무 이르지. 다른 이야기에 슬쩍 나오는 준구의 근황을 보면 잘 성장하고 있더라고. 이 책은 이렇게 아이들의 연애담이자 성장기.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초겨울 이야기 [확신의 확률]은 웃음 성분이 가장 많이 들어간 작품이랄까. 초딩 연애에서 연하남과의 연애는 거의 못본 것 같은데. 그런데 이건 모르고 시작한 감정이라서.^^ 명지가 당근나눔으로 만난 키 큰 남학생 택이. 설레이게 하는 그 애가 알고보니 5학년이라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하지만 사랑은 직진한다.
“다시는 의미없는 확률 따위는 계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기적에 가까운 확률인지, 이 확실한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126쪽)

겨울(졸업)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최악의 최애]. 앞편들에서 군데군데 주변인으로 나왔던 진아와 대한이가 마지막 주인공이다. 진아의 최애는 춘기라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아이돌의 멤버다. 진아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인 것을 여기서야 알고 조금 놀라는 내가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그 옆을 묵묵히 지키는 대한이. 둘이 춘기네 사인회에 같이 가게 되어 일어나는 일들도 하나같이 작가의 섬세한 의도와 함께 재미와 감성이 다 좋았다. 졸업식에서 일어나는 대박 에피소드도 재미나고 흐뭇했다. 그렇게 이 책의 아이들은 졸업을 했고, 중딩이 된 이후의 한장면을 살짝 보여주며 책이 끝난다. 졸업 때 쓴 손글씨 롤링페이퍼를 마지막장에 넣어준 구성도 돋보인다. 짧은 문구들에 아이들 각각의 개성이 담겨있고, 성장도 드러난다. 특히 두 번째 이야기에서 수민이를 힘들게 했던 덕형이가 남긴 문장. “혹시 나 때문에 기분 나빴던 일 있었으면 사과할게. 내가 참 어렸다.” 나를 안심시키는 귀여운 문장. 많이 컸구나. 너도 친구들도.^^

이렇게 섬세하면서도 치밀한 구성에 버릴 것 없는 문장들, 무엇보다 재미있는 스토리, 그리고 사랑 이야기이되 단지 거기까지만은 아닌 주제들. 이런 작품을 구상하고 써내는 데까지 얼마나 걸릴까? 단숨에 썼다면 너무한 거고.^^ 이런 작품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마지막 이야기의 눈처럼, 꽃잎처럼 예쁘게 내려앉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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