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개 마루비 어린이 문학 18
정승진 지음, 해랑 그림 / 마루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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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언뜻 너무 평범하고 밋밋해 보이지만 첫인상과는 다르게 아주 특별한 느낌들로 채워진 단편집이다. 사실 나는 ‘늙은 개’를 연극으로 먼저 접했다. 지난겨울(2023) 아스테지 출품작이어서 대학로의 큰 극장에서 보았다. 그림자극으로 만들어진 연극은 적당히 유머스러우면서 각종 기법들도 돋보였다. 마지막으로는 슬픔이 잔잔하게 남았다.

정승진 작가는 원래 어린이극을 주로 쓰는 희곡 작가다. 그가 쓴 작품은 이미 여러 편 좋은 평가를 받았다. 거인 이야기, 깨비가 잃어버린 도깨비방망이, 고래바위에서 기다려 등이다. 다른 작품도 많은 듯한데 내가 본 것은 늙은 개 빼면 이렇게 3편이다. 하나같이 재밌었고 기발했고 감정의 여운도 잔잔히 남는 연극들이었다. 그러다 어느 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서 이분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오, 동화 쪽으로의 진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당선작이 이 책에 첫 번째로 실린 ‘손톱’이다. 그 작품 또한 연극에서 느꼈던 기발성(?)이 있었다. 심사평도 아주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양쪽 장르를 다 다작할 수는 없어서인지, 한참만에야 첫 동화집이 나왔다. 늙은 개와 손톱을 알고 있는 나는 너무 반가워 덥썩 읽어보았다. 총 일곱 편이 담겨있다. 약간씩 작품의 무게들은 다르지만 다 좋았다. 무게...라는 말을 하고보니.... 그렇다. 대체로 다 무겁다. 주제나 소재들이 말이다. 하지만 무거우면서 무겁지 않다. 어린이극을 쓰는 희곡 작가의 특기인가 한계인가. 나는 전자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면 재밌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연극이 그랬듯이 이 책에도 전반적으로 슬픔이 깔려있다. 어떤 것은 얇게 어떤 것은 두껍게. 어떤 것은 희망과 함께 어떤 것은 그런 것도 없이. 유머를 장기로 갖고 있으면서도 슬픔의 시내가 그 밑으로 흐르는 정서가 매우 인상적이다. 첫 책이 이제 겨우 나왔을 뿐인데 성급한 말이지만, 이 작가가 ‘마구 웃기기만 한 책’을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 책의 첫 단편이자 신춘문예 수상작인 「손톱」은 쥐변신 설화의 손톱 화소를 그대로 차용했다. 그게 아주 천연덕스럽고 거침이 없다. 대중목욕탕의 두 소년이 나누는 쥐인간 이야기. 은근 스릴있기도 하면서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킬 이야기다. ‘이야기’의 본질에 아주 잘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작품 「마중」은 스포를 조심해야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말조심... 슬픔과 희망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있는 것인가, 슬픔을 거름으로 희망이 꽃을 피우는 것인가. 하여간 슬픔의 자리에 화사한 벚꽃비와 아침햇살이 눈부신 작품이었다.

「심사」라는 작품의 무게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상상력과 표현력도 넘치는 작품이다. 주인공 노바 씨는 작은 항구의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다. 난민 심사도 그가 하는 일 중 하나다. 한가한 그곳에 어느날 신입사원이 도착해 노바 씨는 의아해한다. 두 사람 사이의 신경전, 그리고 대비되는 캐릭터에 웃음이 난다. 그러다 아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난민이 도착했다! 그는 외계인. 1300만 광년이나 떨어진 별에서 웜홀을 통해서 도착했다는. 하지만 노바 씨는 쉽게 그를 받아들일 수 없어 계속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데.... 주제의식은 무거우나 작품은 가장 상큼하다. 아주 재밌게 읽은 작품이었다.

드디어 표제작「늙은 개」가 나온다. 늙은 주인과 정을 나누는 동물들의 사연은 참 애틋하다. 그런데 그 주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게다가 진돌이도 늙은 개다. 개도 치매에 걸린다는 사실을 이 작품을 통해 새삼 떠올리게 됐다. 고달픈 몸을 이끌고 날마다 할머니를 찾아 헤매는 진돌이, 얄밉게 쏘면서도 늘 그 옆에 동행하는 까망이. 개와 고양이의 우정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까망이가 ‘불빛이 번쩍거리는 차를 타고 가서 다시 올 수 없는’ 할머니를 입에 올리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그것도 우정이다. 날마다 할머니를 찾는 고생이 진돌이에는 차라리 나은 것이다. 그걸 지켜보는 독자는 너무 슬프다.

「라이카의 편지」는 가장 슬프다. 라이카가 화자다. 인간이 자기한테 한 짓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라이카를 화자로 할 생각을 하다니. 라이카가 나온 책들이 몇 권 있는데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작품이 단연 가장 슬펐다. 미안해 라이카....ㅠ

「호랑이와 아이」에도 손톱과 마찬가지로 옛이야기의 화소가 나온다. 바로 ‘재판’이다. 호랑이를 구해준 착한 인간, 그리고 그를 잡아먹으려는 호랑이가 여러 동물들에게 재판을 청하는 이야기.(토끼의 재판?) 이 책에서 아이는 아파트, 강물에게 재판을 청했지만 그것들은 호랑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마지막 재판을 해준 존재는? 이 모든 일은 단지 꿈이었을까?

마지막 「어린이 공화국에서 온 편지」의 화자는 할아버지다. 독거노인이다. 또다른 주인공은 할아버지가 병원에 계신 동안 할아버지 집의 마당에 침입해 ‘본부’를 짓고 있는 남자아이다. 할아버지는 이 아이를 내치지 않았다. 외로움이 깊은 사람에겐 인기척이라도 그리운 법이기 때문일까? 게다가 할아버지는 이 아이의 치명적 사정을 알아차리게 되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하여 소재도 주제도 느낌도 다양한 7편의 단편을 모두 읽었다. 150쪽 정도의 4,5학년 수준 분량일 뿐이지만 상당히 알차게 많이 담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중 내가 본 「늙은 개 」외에 「손톱」과 「호랑이와 아이」 등도 연극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공연을 꼭 보고 싶다. 희곡과 동화를 넘나들며 어린이들과 만날 수 있는 일. 이 신인작가(?동화 쪽으로는...)의 강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의 말에 보면 도깨비가 복수할지 모른다고 엄살을 피우며 다음 책도 꼭 읽어달라고 부탁을 하셨던데, 두 번째 책도 이처럼 다양한 느낌으로 재미있을지 기대를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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