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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기예르모 데쿠르헤즈 지음, 윤지원 옮김 / 지양어린이 / 2020년 10월
평점 :
도서관 순례를 하다 만난 책이다. 그림책인데 아주 두꺼웠다. 책에는 쪽수가 안 나와서 100쪽 넘겠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책정보를 보니 184쪽... 본 중에 가장 쪽수 많은 그림책인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일반 그림책들보다는 종이가 고급질이 아니고 표지도 양장이 아니었다. 소박하고 읽기 편해서 좋았다.
로렌조라는 소년이 시골로 이사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로렌조는 와이파이가 안될까봐 걱정하는 딱 요즘 아이다. 주변에 펼쳐진 풍경과 예쁘고 오래된 집에 별 감흥이 없다. 자신의 방에 들어와보니 웬 커다란 옛가구가 방을 반이나 차지하고 있다. 뚜껑 덮는 오래된 오르간이 생각나기도 하는 그 가구는 책상이었다. 엄마의 설명에 의하면, 옛날에는 글씨를 손으로 쓰거나 타자로 쳤기 때문에 여러가지 물건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서랍도 많이 필요했다고. 정말 호기심이 발동할 정도로 많은 서랍이 달린 큰 책상이었다. 서랍은 다 비어있었다. 하지만 가장 깊은 곳에서 뭔가가 하나 나왔다. 두꺼운 노트였다. 로렌조는 창가에 앉아 노트를 펼친다. 거기엔 그 주인이 만든 이야기들이... 종이를 잘라서 만든 그림들과 함께 가득 들어있었다.
이책은 그러니까 책 속에 또 한 권의 책이 들어있는 책이다. 로렌조의 현재와 그 책의 과거가 교차되며 나온다. 옛 노트의 이야기들은 의미를 알듯말듯하고, 로렌조는 한편씩 읽을 때마다 자기 식으로 해석한 그림을 자신의 노트에 그려나갔다. (그 그림은 이 책의 말미에 나온다) 옛 노트의 그림들은 다양한 색종이 조각들로 대부분 그려졌는데, 콜라주 느낌이 아주 생생해서, 인쇄한 건줄 알면서도 몇번씩이나 돋은 부분을 만져보게 된다.^^;;;
소년은 오래된 노트의 그림이야기들을 읽어나가며 다양한 동물들(토끼,여우,새 등)이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그게 모두 한 사람의 인생 서사인 것, 말하자면 실화인 것을 깨닫게 된다. 첫번째 이야기 [청동 드래곤]은 장난치고 꾸중듣던 어린시절을, 두번째 [장화와 모자]는 수줍은 첫사랑의 청소년기를 표현하고 있었다. 세번째 [공장]에서는 주인공이 커다란 사고를 당하고 인생의 암흑기에 빠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날 로렌조는 엄마와 같이 양로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마지막 이야기 [꿈의 여행자]를 읽는다. 주인공은 성냥갑을 타고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작은 쥐로 표현되었다. 그의 막막함이 느껴진다. 쥐는 편지를 남겼고, 그것은 누군가에게 발견되었다. 둘은 만나게 된다.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로렌조는 직원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가 이 양로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사람은 하루 종일 종이만 자르고 있어."
소년이 그 방의 문을 두드리고, 드디어 망망대해를 떠도는 성냥갑속의 쥐와 발견자는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로렌조가 그 노트를 내밀자 할아버지는 모든 걸 알고 소년을 반긴다. 둘은 서로의 노트를 갖기로 한다. 소년이 재해석해 그린 그림을 보고 할아버지는 감동한다. 누군가가 나의 기록을 읽고 나의 삶을 이렇게 표현해주었다는 것. 휠체어에서 보낸 반평생이 조금은 자유를 얻은 기분 아니었을까. 노인의 노트 마지막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노인의 메시지를 완벽히 알진 못하겠다. 하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누가 구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발견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다시 깊은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그런데, 어떤 의미로 그는
내 안에서 다시 솟아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노인은 소년에게 그 집의 다락방에 숨겨져있는 그림도구통을 알려준다. 감사선물일 수도, 응원선물일 수도 있겠다. 책의 마지막장에서 소년이 그 옛 책상에 앉아 그 옛 도구들로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있어 흐뭇했다. 행복한 일을 찾은 소년에게 이제 와이파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보인다. 소년은 '꿈의 여행자'가 되어있는 것이니.
처음 알게된 아르헨티나 작가의 그림책은 그 분량만큼이나 풍성했다. 서로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 서로에게 의미가 된다는 것은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나의 서사를 깊이 읽어주고 공감과 응원을 보내줄 사람이 있을까. 나는 누구에게 그럴 수 있을까. 이 책의 제목은 이렇게 말한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원제는 When you look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