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 이윤엽 이야기 판화 그림책
이윤엽 지음 / 서유재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렇게만 산다면 세상은 다함께 행복할 것 같다.

우리의 터전인 땅에서 땅을 일구며 땅이 주는 것을 감사히 받으며 살아간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부터도 그렇지 못하다. 어릴 때부터 손에 흙 한번 묻혀보지 못했고

나이 들어버린 지금까지도 똑같다. 화분 하나 키우기도 겁난다.

기본적이며 소중한 것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소수고, 그마저도 늙어버렸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이 벌건 채 허상을 쫓아간다. 나도 그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마음이 허하고 슬프다.

 

이 책을 읽으며 너무 소중하고 귀해서 눈물겨웠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 수많은 것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겹겹이 쌓인 그 많은 것들 중 하나씩 하나씩 버려야 한다면 결국에는 무엇이 남을까.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다지며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스스로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도 못한 채.

 

화가 이윤엽 님의 작품들은 여러 동화들의 삽화로 접해서 낯익지만 익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전시회를 가보거나 특별히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어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작가님의 작품활동이 참 귀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시선은 세상 주변에서 힘들게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조용히 우리 땅과 물과 하늘을 지키고 있는 동식물들에게 향한다. 그들의 삶은 속도지향적이지 않다. 그래서인가. 이 책의 제목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이다. 비슷한 제목의 시가 들어있는데, 우리집 감나무의 감이 동네에서 젤 떫고 맛없다는 까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다. 지금은 그렇지만 서리가 내린 후에 먹어보면 우리 감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뭔 놈의 감이 그렇게 익는데 오래 걸리느냐고?

 

까치야,

감나무라고 다 똑같이 감이 익는 줄 아니?

우리 집 감나무처럼 익는데 오래오래 걸리는

감나무도 있는 거란다.

 

나도 우리집 감나무가

왜 그러는지 이해는 안 가지만(시간이 좀 걸리는. 130~131)

 

한동네 감나무들도 다 익는 때가 다른데, 빨리 가는 사람들을 보며 조급했던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 안하면 큰일 날 것처럼 동동거리고 몰아세우는 일들은 얼마나 흔한가. 속도에 연연하는 우리에게 이 책은 한결같은 이들의 삶을 보여준다.

 

콩밭과 꼬부랑 할머니, 콩 심는 할머니시에 보면 아흔 아홉이나 되셔서 눈도 어둡고 귀도 안들리는 할머니가 하루종일 호미질을 하고 계신다. 구석에 웅크리고 계신 할머니와, 화면을 꽉 채운 콩싹들이 눈이 부시다. 그렇게 평생 땅을 일구고 살아오신 할머니.

 

호박에 깔린 사람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웃겼다. 판화도 웃기고. 이래저래 조금씩 도와줬던 이웃들이 고맙다고 가져온 호박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장면이다. 이 책에는 작은 생명들까지 서로 돕고 기대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서로서로라는 시의 마지막은 이렇다.

아 정말 추워.

사람도 춥고 새도 춥고 개도 춥고

나무도 춥고 산도 춥고 구름도 추워.

근데 서로서로 챙겨주니까

좀 안 추워.(63)

 

판화 그림책이라고 되어있지만 시화집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시와 판화로 이루어진. 판화가인 작가님은 어쩜 이렇게 시도 잘 쓰실까. 담담하고 친근하게 주변의 존재들에게 건네는 쉬운 말인데, 거기에서 풀어낼 생각들이 한보따리씩이다. 천천히 읽을 책. 남녀노소 많이 배운 사람 덜 배운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고 공감하거나 생각을 길어올릴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연로하신 부모님께도, 자라나는 자녀에게도 선물할 수 있다. 너무 바빠서 어려운 책의 진도가 안나가고 있는 독서모임이 있다면 일단 이 책으로 진행하시면 어떠실지 제안하고 싶다.

 

본문을 인용하는 것은 글이 너무 길어져서 안하고 싶지만 마지막으로 한 편만. 첫 번째 작품인데 여기에 희망이 담긴 것 같아서다. 제목은 신기한 아이.

병희는 신기한 아이야.

장래 꿈이 글쎄 농사짓는 사람이 되는 거래.

의사도 별로고 과학자도 별로고 대통령도 별로래.

무조건 할아버지처럼 농사를 짓고 싶대.

왜 농사를 짓고 싶으냐니까 모르겠대.

그냥 농사짓는 게 재미있대.

병희야, 농사지으면 자동차도 못 사.’ 하면

그러면 경운기 타면 되지.’ 그러고

병희야, 농사지으면 돈 못 벌어서 맛있는 것도 별로 못 먹어.’ 하면

밭에 가면 딸기도 있고 토마토도 있고 고구마도 있는데!’ 그러고

병희야, 농사지으면 만날만날 일하느라 놀러도 못 갈걸하면

괜찮아. 산에 가고 들에 가면 더 재미있어.’ 그러고

병희야,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를걸하면

알아, 나도 다리에 알배고 손에 물집 잡힌 적 있어.

그런데 금방 괜찮아져.’ 하고. (후략)(8~9)

진짜로 이런 아이가 있을까? 작가님은 겪은 것을 시로 쓰셨으니 진짜겠지? 이런 아이들이 세상의 희망이 아닐까. 물론 의사도 과학자도 대통령도 다 필요하지만, 그래도 세상의 기본이 되는 일, 토대를 차곡차곡 다지는 일들을 모두가 안하겠다고 손놓아버리면 안되는 거니까. 아주 사소한 결심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나이 든 나도, 몸을 더 쓰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몸을 쓰는 일의 당위성과 소중함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도.

 

작가의 말에 보니 이 책은 작가의 의지로 기획된 게 아니고 작가가 여기저기 써놓은 작품들을 출판사에서 정성껏 엮으신 책인 것 같은데 쓰는 작업 버금가게 이 엮는 작업도 참 귀하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작업은 작가님에게도 새로운 동력을 준 것 같으니 새로운 창작의 씨앗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판화에 대해서 한마디만 하자면, 판화로 이렇게 다양한 느낌의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목판화라는 분야가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 아주 오래 걸려 한 작품을 완성했던 기억이 있고, 고학년을 맡으면 목판화까진 못하고 고무판화를 3~4주 걸려 제대로 한 작품 완성하도록 지도했던 기억이 있는데, 최근에는 지우개판화 정도 약식으로 하고 넘어갔었다. 다시 제대로 판화를 해보고 싶다. (내가 제대로라고 해봤자 진짜 제대로는 아님^^;;;) 그때도 이 책을 보여주고 꼼꼼히 살펴볼 수 있겠다. 글도 그림도 다 귀한 책. 이 책을 소장하게 되어 행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