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곳에서도 안녕하기를 - 삶의 곳곳을 비추는 세 사람의 시선 문학인 산문선 2
김지혜.이의진.한정선 지음 / 소명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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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한 주변잡기라면 오히려 더 달갑게 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사회를 이야기하고 우리를 이야기하고 당위를 얘기하는 책이라면 썩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다. 내가 슬램덩크의 강백호 말투로 어디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내 피가 끓고 있다구!!” 할 수 있는 주제면 좋겠는데 난 이제 모가지 잡혀 출근하는 곳 아니면 집 밖을 나설 의욕도 없는 사람이라서. 이 책은 안 봐도 안다. 내가 엄청 공감하리란 걸.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공감만 하면 뭐하나? 나는 여전히 집구석에 쭈그리고 있을 텐데?

 

그래도 용기를 내어 구매 버튼을 눌러보았다. 저자들의 이력을 보고 궁금하기도 했다. 한 분은 나랑 같은 교사(이게 가장 큰 이유), 한 분은 독일 거주하는 음악가(음악이 아니라 사회학을 전공한 분이던데? 이런 이력 가진 분들 신기), 마지막 한 분은 인권활동가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중에 열혈 활동가는 없다. 이런 분들 얘기는 책으로 접하는 수밖에....

 

독일 거주 음악가인 김지혜 님의 글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이분의 글에 가장 많이 나오는 내용은 소수자,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제도와 책임이다. 산재로 죽는 사람들의 비율이 대한민국은 이토록 높은데, 왜 법과 제도를 정비하지 않으며 정치인들은 나몰라라 하는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사회 격차를 줄이면 모두가 안전망 안에 들어올 수 있을텐데 왜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분노하며 지적한다. 말만큼 쉬운게 아니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내게 부끄러움을 주는 글들이었다. 당연히 쉽지 않다. 하지만 역사는 어려움을 뚫고 발전해오지 않았던가. 문제의식을 느꼈다면 현실적으로 바뀔 때까지 노력하는 것이 사회구성원들의 역할이다.

 

요즘 느끼고 있던 것과 맞아떨어져서 특히 공감되었던 글은 정치인을 지지하는 방식이라는 글이었다. “누군가 내게 한국 사회의 여러 문화 중에서 지양되어야 할 것 하나를 꼽아 보라고 한다면 정치인을 지지하는 모임을 없애야 한다고 서슴지 않고 말하고 싶다.”(67) 이 말은 바로 묻지 마 지지에 대한 일침이다. 정치인은 덕질의 대상이 아니다. 조건없는 열광도 비판이 실종된 동정도 모두 무익하다. 중립적인 태도로 그의 행보에 따라 지지나 비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진영에 따른 묻지 마 지지가 특히 강하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음) 어떤 당이라면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뽑아줄거야~ 라는 인터뷰 보도가 한동안 회자되었듯이.... 이쪽은 절대 되고 저쪽은 절대 안되고.... 이런 태도가 정치발전의 발목을 잡고있는 것 아니겠나. 그리하여 우리나라 정치의 수준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 아닐까. 아니, 우리나라에 훌륭한 사람들 많은데, 왜 정치판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거야? 괜찮은 사람이 전체의 평균비율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왜 괴상하고 찌질한 인간들 모아놓은 집합소 같냐고! 진영논리를 부수고 우리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를 갖추어 나간다면 점차 정상적이고 괜찮은 사람들도 인력풀 안에 들어오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고 싶다.

 

이어서 나오는 거꾸로 가는 한국 사회의 시계에서도 정치를 보는 우리 사회의 저열한 시각을 꼬집는다. 정치인을 검증할 때 필요한 기준은 위법행위 여부와 세계관이다. 그러나 저열한 언론들은 상식적인 것들은 제쳐두고 자극적인 것에 골몰한다. 바로 사생활이다. 그리하여 보통의 사람들이 환멸을 느껴 머리를 흔들도록 만들어버린다.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는 한국과 독일의 차이가 살짝 엿보이는 글도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주로 인간이 빠져있다. 무엇을 위한 발전인가? 우리는 수없이 질문해야 한다. 여기에 답이 없다면 굳이 왜 달려야 할까? 걸음을 멈출 필요도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두 번째 저자는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이의진 님이다. 이분의 단독저서를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에서는 고3 교사로서 느끼는 문제의식이 더 많이 들어가 있다. 나와 학교급은 다르지만 교사로서 공감과 위안이 많이 되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그래도 역량있는 작가로 활동하시는 분이 이리 써주시니 그래도 조금은 읽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교육기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학생으로서 학부모로서. 그러니 모두들 자신이 무척 안다고 생각하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 사회에 무슨 문제가 터졌을 때 그게 학교에서 안 가르쳐서 그렇다며 학교 탓을 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그래서 너도나도 교육과정에 참견한다. 그게 사실은 이미 교과목 안에 다 들어있다는 사실을 찬찬히 살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다양한 의무교육 시수들이 들어오고 만원 줄테니 와퍼세트 두 개 사고 2천원 남겨오라는 요구를 실현하느라 교육과정은 누더기가 된다.

누구나 교육전문가를 자처하는 시대다. 하지만 교육은 전문적인 영역이다. 쉽게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정작 진짜 배워야 할 것을 배우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제발 초중고 교육과정에 대해 어설프게 아는 국회나 시민단체 등이 왈가왈부하거나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제된 의무교육 시간을 국어 교과 진도표 안에 억지로 욱여넣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108~109)

 

공교육이 추구하는 가치와 욕망이 반영된 각 개인들의 가치가 같을 수는 없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공교육의 목표가 대입일 수는 없다. 대입도 그냥 대입인가? 명문대 입학이지. 공교육 대상자가 몇 명이며 그중에 소위 명문대 입학 자리는 몇 자리인가? 그걸 추구하는 게 공교육의 역할일 수가 어떻게 있겠냐고? 그런데 그걸 못해낸다고 비난을 퍼부어대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어항 영상을 무한 돌려대면서 공교육이 창의성을 말살한다고 욕을 해대니 뭐 어쩌라는 거임? 이의진 님은 고3 담임을 10년 이상 계속한 대입 지도의 베테랑 교사다. 그가 진학지도를 성심으로 하면서도 붙잡고 가는 공교육의 가치에 대해서 미래사회는 어떤 아이들을 원하는가?(부제:뭣이 중한디?)라는 글을 꼭 읽어보시기 권한다.

 

코로나로 인한 현장의 혼란과 원격수업의 소회에 대한 글을 읽으며 그때의 고생이 떠올라 울컥했다. 원격수업도구나 플랫폼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내가 그걸 운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2주쯤 되었나?) 심지어 계획조차 미리,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고 필요한 것들이 제때 제공되지도 않았다. 안개속에서 더듬더듬하며 동학년 선생님들과 구하고, 배우고, 협업하고, 확인하고, 피드백하는 모든 과정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뭐 그걸 바랐던 적도 없다. 당연히 해야될 일이라 생각하니까. 다만 애먼소리 하면서 힘빼는 사람들은 없었으면 좋겠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현장은 훨씬 역동적이며 능동적이다. 이 많은 인원들이 교육부에서 달랑 몇 페이지의 글로 내려보낸 일들을 몸으로 부딪혀 가며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을 오로지 맨땅에 헤딩하는 정신으로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116)

그해 나에게 배정된 교실은 일반교실과 좀 다르게 교사 자리가 뒤에 있고 조금 분리된 느낌의 가벽이 한쪽에 세워져 있던 특이한 공간이었는데, 그 공간을 떠올리기만해도 거기서 만들던 수많은 수업과 시도들이 생각나 흠칫 몸서리가 쳐지곤 한다. 그해 협업하던 후배들과는 아직도 뗄 수 없는 사이로 지낸다. 그런 나에게 이 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참, 고마웠다. 물론 나보고 고마워하라고 쓰신 글이 아님은 잘 알고 있다.ㅎㅎ

 

그의 마지막 글 징검다리 게임이 말해주는 것을 읽어보면 앞의 저자 김지혜 님의 글들과도 통하고,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보인다. 우리가 함께 안녕하려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

 

마지막 저자 한정선 님은 공감능력이 매우 뛰어나신 분 같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낀다. 나는 이 민감성을 많이 차단했다. 아픈 건 싫기 때문에.ㅠ 그건 내가 이 사회에서 그래도 살만한 위치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하겠다. 여성이긴 하지만 큰 차별은 없는 직종에서 일하고 있고,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인 아동기를 보냈고, 장애인도, 성소수자도, 빈곤층도 아닌 내가 타인의 아픔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을까말까 망설였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별 문제 없는데 괜히 들쑤셔서 심란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

 

하지만 이분의 글은 그렇게 살아도 정말 별 문제 없을까요?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내게 던진다. 가장 인상적인 글은 불평등한 평정심이라는 글이었다. 평정심이란 외부의 자극에 동요되지 않는 마음을 뜻하며 누구나 이런 상태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공평할까? 외부의 자극이 누구에게나 비슷할까? 누군가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하거나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라면, 그 사회는 평등하지 않다. 그럴 때 그들의 편에 가까이 서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꼭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집구석 쭈그리가 이 훌륭한 주제의 책을 다 읽었다. 읽었다고 당장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저자들의 어떤 곳에서도 안녕하기를이라는 마음에 같은 마음 하나 포개는 것 외에는. 거기에서 반 발짝만 더 나간다면 내가 그동안 무심코 하던 말이나 행동이 혐오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아채기, 그래서 입방정으로 남에게 상처주기 같은 것을 좀 덜 하게 될지도 모른다. 부디 진정성으로 쓴 저자들의 글이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 앉기를 바라며, 리뷰로라도 마음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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