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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치 인형 - 제11회 정채봉 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샘터어린이문고 70
소연 지음, 강나율 그림 / 샘터사 / 2022년 10월
평점 :
정채봉 문학상 수상작으로 출간되었을 때부터 읽고 싶다 생각하다가 이제야 손에 잡게 되었다. 제목이나, 표지의 분위기나, 나바호 족이라는 원주민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상당히 독특할 것이라는 짐작을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얇은 책이었다. 그리고 두 편이 담겨있었다. 두 편은 별개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체는 두 친구의 이야기고, 두 편은 각 주인공을 화자로 하여 쓰여진 이야기다.
단 한 번의 만남에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가끔 만난다. 겪어본 적은 없지만 그런 사랑도 있구나 한다.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니까.... 우정도 그럴 수 있다. 이 책에서 보여준 우정이 그렇다. 물론 미래는 열려있으니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기약 없는 이별이 주는 아쉬움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첫 편 「루이치 인형」은 아빠 회사 일 때문에 미국에 온 한국 소녀 소리의 이야기다. 서툰 언어 때문에 학교에서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럴수록 입은 더더욱 닫혀 언제나 홀로 지냈다. 어느 날 엄마와 자동차 여행 중에 기름이 떨어진 상태에서 나바호족 마을에 도착했다. 엄마가 저렇게 대책없을 수가 있나 라는 생각이 솔직히 들긴 했다. 세상에, 딸을 데리고 하는 여행에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런 길을 떠날 수가 있나? 한국처럼 땅이 좁고 어디서나 핸드폰으로 연락을 할 수 있는 그런 곳도 아닌데.... 하지만 내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안되니까. 어쨌든 이야기 시작부터 긴장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녀는, 루이치 모녀를 만났다!
주유소는 내일이 되어야 갈 수 있기에 소리 모녀는 루이치네 집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바로 이 하룻밤이다. 하룻밤 사이에 쌓은 우정. 일년이 지나도록 한 명도 사귀지 못하던 소리가 루이치와 하룻밤에 쌓은 우정은 아름답고 신비롭고 탄탄했다. 엄마들이 잠든 사이, 두 소녀는 호간(나바호 족의 집)을 빠져나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고 마을의 여기저기를 함께 다녔고, 회색늑대 ‘이스다’도 만나보았다. 그리고 루이치는 소리에게 인형을 선물했다. 루이치가 만든 인형. 치마에 ‘시끼스’라고 적어서 준 인형. 그건 ‘친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약없는 이별을 했다.
두 번째 편 「바람이 부르는 노래」는 소리가 하룻밤 만난 친구 루이치가 화자인 이야기다. 혼자였던 루이치는 소리의 우연한 방문이 너무 좋았던 것 같다. 마지막 남은 친구 ‘디야니’까지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마을은 척박해져서 모두들 떠나는데 루이치네는 떠날 수 없었다. 돈 벌러 떠난 아빠와 소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루이치의 이야기는 주로 디야니와의 이별 이야기다. 마을도 계절도 모두 스산하고 찬바람이 몰아치는데, 둘의 이별은 슬프면서도 허망하진 않았다. 뭔가 바탕을 떠받치고 있는 마음의 힘이 느껴진다. 조그만 상심에도 바닥이 없는 구멍에 빠지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우리에게도 저 힘이 필요하다.
작가의 말에 보니 이 책은 작가님의 미국 여행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바호 족에 대한 공부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특히 그들의 전통 민요가 삽입된 부분에서 내겐 큰 울림이 왔다. 이 책의 절반은, 아니 전체가 그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는 듯했다.
나는 땅끝까지 가 보았어
물이 있는 끝까지 가 보았어
하늘 끝에도 가 보았지
산 끝까지 가 보니
그곳에서 깨달았어
나와 연결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음을
이런 노랫말부터 시작해서,
나무가 제 홀로 섰듯이
우리에게 용기를 가르치네
가을에 떨어지는 잎처럼
우리에게 이별을 가르치네
마른 들판이 비에 젖듯이
우리에게 감사를 가르치네
이런 시들이 늦가을의 비처럼 나직하고 차분한 감동을 주었다. 광활한 벌판 속 원주민 마을이라는 배경과, 두 소녀(아니 세 소녀)라는 인물과, 친구라는 소재와, 인용문들까지 모든 것이 조화롭게 신비한 느낌을 냈다. 이런 직조가 정채봉 문학상으로 당선된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친구 이야기는 많지만 이 작품은 정말 오래오래 기억하며 서로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멀리서라도 마음을 보내줄, 그래서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는 진짜 친구를 그려내었다. 인스턴트 관계가 난무하는 세상을 사는 아이들이 이 관계를 인상적으로 보고 이해했으면 좋겠다. 몇 년을 만나도 인스턴트일 수 있고 하룻밤을 만나도 오래일 수 있는, 그런 관계의 깊이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대자연의 힘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용된 노랫말들처럼 말이다. 가진 것이 없어도 자연 안에서 소중한 것을 나누는 친구들의 모습. 별을 함께 보고, 흩날리는 고운 색의 모래를 보여주고, 바람 속에서 친구의 목소리를 느끼고, 오래오래 정성으로 만든 작은 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그런 것을 오래전에 잊어버린 나의 모습도 보았다. 우린 회복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조금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