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용호동에서 만나 창비아동문고 319
공지희 지음, 김선진 그림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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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오랜만에 단편집을 너무 재밌게 읽었다. 아이들 책을 고르는 교사의 눈으로 살핀 게 아니고 그냥 독자로 읽었다. 그러고보니.... 아이들이 좋아할 책인지는 모르겠다. 아이들도 보는 눈과 취향이 다양하니 각자 흥미와 느낌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참 재밌었다.

제각기 떨어진 이야기들을 모아만 놓은 단편집이 아니고 ‘용호동’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함께 하는 작품들로만 구성된 책이다. 용호동은 재개발되고 있는 동네다. 작가님이 보신 실제 어떤 동네가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본다. 재개발 하면 들고 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롭게 단장한 곳에는 낯선 사람들이 주로 들어와있기 마련이고 오래 살던 사람들은 그곳을 두고 더 주변으로, 더 싸고 허름한 곳으로 밀려난다. 일명 젠트리피케이션이다. 그런데 이 책은 밀려나는 이들과 들어오는 이들의 갈등을 부각시키려 하지 않았다.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는 찐 용호동 주민들의 이야기를 주로 담았다.

용호동은 기찻길이 지나가는 동네다. 나도 어렸을 때 경춘선이 지나가는 동네에 살았었다. 그 기찻길을 걸어 학교에 가기도 하고 동네 아이들과 놀기도 했다. 칙칙폭폭 기차가 와서 옆길로 내려서면 내 옆으로 기차가 날 휩쓸어 버릴 듯 지나가기도 했었다. 요즘 엄마들이 보면 기겁할 일이지만.... 지금은 그 동네의 기차역은 없어졌고 산책로와 문화공간 등이 생긴 것 같다. 그때 이사하지 말고 버텼으면 지금쯤 좋은 집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곤 한다.^^ 용호동도 비슷하다. 도시가 복잡해지면서 철도는 땅속으로 들어가고, 녹슨 철길은 새로운 명소가 되어 ‘용트럴파크’라 불리게 된다.

용트럴파크 맞은편에는 정우네 집이 있고, 집 앞에는 오래된 벤치가 있다. 얼마전부터 여기를 애용하는 노숙자 아저씨가 있다. 정우가 왜 집에 안들어가냐고 묻자 “지금은 표류 중이거든.”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 벤치를 뗏목이라 표현한다. 어느날 보니 그 ‘뗏목’이 쇠칸막이를 박은 다른 벤치로 교체돼 있었다. 뗏목조차 잃은 아저씨는 이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아저씨가 부르는 노래 “사람들은 벤치, 나무, 길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이 가사의 의미를 음미해보고 싶다. 이 단편의 제목은 「벤치 아저씨, 표류하다」였다.

「안녕, 단팥죽」은 아주 달콤하고 향기로운 이야기였다. 정우 친구 석이가 살던 집은 이제 ‘까페 안녕’으로 바뀌었다. 이번 이야기는 그 까페 사장 차무진 씨 이야기다. 그리고 그 동네에 오래 산 소복 할머니의 이야기. 신세력과 구세력의 갈등이 아니라 서로에게 호의를 베풀고 함께 동업하게 된 이야기가 새롭고 따뜻해서 좋았다. 그리고 단팥죽을 파는 까페. 아이디어도 좋은 것 같다. 팥죽을 먹으러 식당을 찾아가게 되진 않는데, 까페에서 판다면 나도 먹어볼 것 같아서.^^

「수리수리 가게」는 수리수리 마수리~ 마술과 관련있는 가게가 아니다. 버려진 물건들을 ‘수리’하는 가게다. 거기서 홍비는 낡아빠진 옛 인형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마법을 체험한다. 아, 그러고 보니까 수리수리는 다중의 의미를 담은 작명! 그리고 그 되살아난 인형들을 가지고 마을 축제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고마움에 가까운 호감을 느꼈다. 정말 인생 멋지게 사는 사람들이다.

「달구는 시속 3킬로미터로 달린다」에서 달구는 사람이 아니다. 유아차를 개조한 할아버지의 운송수단이다. 거기에 둥절이라는 개가 따라붙어 셋이 동네 일주를 하는 이야기다. 그 일주에 할아버지의 하루가 담겼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할아버지는 귀한 일을 하는 존재다. 시속 3킬로미터의 속력 때문에 때로 큰 차들에게 욕을 먹지만, 할아버지는 화내지 않는다.

「b의 낙서」의 화자는 구이구이 식당 집 딸이다. 구이구이 식당은 앞의 다른 작품에 나온다. 이렇게 이 책은 공간과 인물들이 살짝씩 겹치면서 연결성을 보여준다. (마지막 작품 「용호 슈퍼」도 그렇다.) 이 작품은 그라피티를 소재로 했다. 관심있던 분야가 아니어서 이 이야기에서 새롭게 보게 됐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자유로운 예술인들이 많이 나온다. (물론 돈은 안되겠지... 그게 문제....ㅠ)

마지막 작품 화자는 「용호 슈퍼」 아들이다. 인근 슈퍼들이 다 문을 닫거나 편의점으로 전향했지만 끝까지 버티고 있는 엄마는 가게 운영이 어렵지만 그래도 마음 퍽퍽하지 않게 살아간다. 귀신손톱 형이 유통기한 다된 것들만 용케 골라 반값 할인을 해달라고 할 때 심정 상할 만도 한데 흔쾌히 해준다. 회전이 잘 되지 않으니 유통기한 임박 제품은 자꾸 나올 수밖에 없고 매일 그런 걸로 끼니를 해결해야 되어도 그러려니 한다. 얌체같고 쪼잔하던 귀신손톱 형은 늘 그런 건 아니었다. 어떤 날은 돈이 생겼다며 정상 제품을 사먹는다. 알고보니 귀신손톱은 기타를 치기 위한 거였고 형은 작곡과 연주를 하는 사람이었다. 아이고야~~~ 예술은 배고프다더니...... 형은 슈퍼 앞 공터에서 버스킹(?)을 하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연주를 감상하며 어떤 이들은 기타 케이스에 지폐 한 장을 놓고 간다. 형은 이제 뻔뻔하게 저녁도 얻어먹는다. 근데 내가 슈퍼집 엄마라도 이 청년이 오면 밥이랑 찌개 퍼줄 것 같다. 맛있게 먹어주는 것도 복이거든.... 근데 이 청년이 뭐해먹고 살지는 걱정이다. 그냥 밥만 안굶고 살기를 바란다면 큰 걱정은 아니겠지. 이 작품의 도입에서 “지금도 밥은 먹고 살잖아요?” 라는 대화가 나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밥은 먹고 사는데, 우리는 불안에 대한 보험을 드느라 다들 힘든걸까?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인걸까?

이렇게 6편의 단편을 다 읽었다. 꽤 오래 전 <영모가 사라졌다>만큼의 흥행작은 나오고 있지 않지만 공지희 작가님의 필력은 건재하다고 생각되었다. 특히 프랑스 가수의 노래라는 ‘벤치, 나무, 길’이라는 노래를 OST로 깔아놓은 듯한 구성이 인상적이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라 궁금하고 내 인생에서 벤치, 나무, 길을 성찰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책을 학급에서 함께 읽거나 하진 않을 것 같지만 뭔가 통할 것 같은 친구를 만난다면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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