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 4대의 이야기. 이런 서사를 젊은 작가가 써냈다는게 놀랍다. 6.25 이전 북쪽 땅에서부터(삼천, 개성) 시작된 이야기. 전쟁이 나고 대구로 피난을 내려오고, 다시 회령에 자리를 잡고, 끝 세대인 지연은 서울에 살다 이혼하고 회령으로 직장을 옮겨 윗 3세대 여인들의 삶과 마주한다.

최은영 작가의 명성은 <쇼코의 미소> 때부터 들었는데 읽지 못했고 이게 첫번째 읽은 작품이다. 소설을 읽고 잘 기억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잘 안읽게 된다. 시간이 많아야 겨우 잡을까말까 한데, 뭐가 바쁘다고 그러는지 시간이 많다고 느껴지는 날이 없으니 원. 이 책을 읽고보니 멈춘지 2년이 넘은 독서모임이 떠올랐다. 선배언니들인데, 모임 시작땐 모두 교사였지만 그중 절반이 지금 퇴직했다. 어느새 교육서적을 읽기가 좀 애매한 정체성을 갖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면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 언제 다시 모일지는 모르지만.

지연을 기준으로 증조할머니에 해당되는 1세대 삼천이와 새비의 끈끈한 인연이 서사의 기둥이다. 워맨스라고 불러도 되나. 당장 죽을지살지 모르는 참혹한 시대에 그런 우정이 가능했을까. 아니 그런 시대였기에 더 가능했던 걸까.

삼천이의 딸 영옥이, 새비 아주머니의 딸 희자가 2세대다. 이 두 여인은 어린시절을 함께 했으나 이후 아주 다른 삶의 길을 걷게 된다. 지연이 회령에 내려가 만난 할머니가 영옥이다. 42년생 영옥의 삶 또한 험난했다. 북쪽이 고향인 남자와 아버지 뜻대로 결혼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중혼이었고, 딸을 그쪽 호적에 올려놓고 혼자 키워야 했다. 그 딸 미선이가 바로 지연의 엄마.

엄마도 상처가 많고 행복하지 않다. 지연과의 관계도 갈등이 많다. 똑똑한 딸에게 기대는 많이 했지만 온전히 편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딸이 남편의 바람으로 이혼을 했을 때까지도. 엄마가 30년간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고통, 큰딸의 죽음은 지연에게도 큰 그늘이다. 어린 자매는 유독 다정했었고, 엄마의 고통에 지연은 언니를 잃은 슬픔을 드러낼 수도 없었으니.

회령에 지원해서 직장과 거처를 옮긴 지연은 그곳에서 할머니(영옥)를 만나 너무 가깝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1,2세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 어떤 인생은, 아니 모든 인생은 왜 이리 힘겹고 아픈가. 몰랐던, 그리고 잊었던 세대간의 연결과 이해는 서로에게 조금씩 딛고 일어날 힘을 준다.

그 많은 고통의 장면에서 내 눈물을 뺀 장면은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피난 내려올 때 두고온 개 봄이와 헤어지는 장면이었다. 봄이는 체념하고 가족들의 냄새를 한번씩 맡고는 돌아섰다. 그 장면이 얼마나 가슴아픈지. 근데 그건 더 큰 고통에 대한 체감이 내게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있는 슬픔은 그정도인 것이다.

지연 또한 회령에서 유기견 '귀리'를 집에 들였다가 병으로 금방 헤어지는 슬픔을 맛본다. 지연의 복잡한 마음을 나는 다 이해하진 못하고, 이 아픔은 상상이 간다. 사람은 다 자기 범위 안에서 남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세대를 살았지만 이해하고 공감하며 유대를 느끼는 이 여인들의 동지애에서, 감히 낄 수 없는 존재들이 있었으니 바로 남자들이다. 어찌 그리 하나같이 없느니만 못한 존재들인지.(새비 아저씨만 좀 나았음) 그녀들에게 행복이 있었다면 그들끼리 일구어온 것들이다. 나의 경우 좋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아버지의 존재감은 컸고 엄마는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시지만, 이 이야기처럼 여성들만의 동지애로 지탱하는 인생들이 참 많은 건 사실이긴 하더라. 그 애정 중에 특히 인상적인 건 대구의 새비 고모님과 영옥의 관계였다. 피난살이 군식구였던 영옥에게 바느질을 가르쳐주고 무뚝뚝한 사랑을 보여줬던 고모님. 영옥네가 회령으로 떠나고 각자 사연많은 삶을 살아가는 중에도 영옥을 잊지 않던 그 어른의 사랑. 이런 사랑도 있구나 했다.

마지막으로, 책 넘기던 중 눈길이 머물렀던 두 구절을 적어본다. 하나는 남 돌볼 겨를 없는 극한의 피난길에 따라붙는 아이를 모질게 떼어내고서 느꼈던 영옥의 감정.
"별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167쪽)

두번째는 지연이 열차에서 자기에게 기대 잠든 여자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는 마음. 별 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300~301쪽)

지연이 외국에 정착한 희자할머니와 어렵게 연락이 닿아 편지를 받으며 이야기가 끝나는데, 난 끊어진 인연 굳이 다시 잇는 건 별로지만 이들의 연결이 인생의 아름다운 면을 다시 보게 하고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좋겠다. 지겨운 것도 사람이고 사랑할 것도 사람인 인생의 모순. 인생이 단순하면 그 많은 드라마나 소설이 왜 나오겠냐. 그중에 이 소설은 위로의 힘이 있어 끝나는 느낌이 좋았던 소설로 기억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