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 20년간 우울증과 동행해온 사람의 치유 여정이 담긴 책
고요 지음 / 인디고(글담)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꽤 오래 전부터 이 책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 작가의 글을 처음 읽은 건 페이스북에서. 이미 떠난 친구를 보내는 애절한 글에서였다.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아름다운 친구를 이제 놓아주던 날. 아주 구체적으로 쓰진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연을 짐작하고 나는 먹먹해졌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 마음을 수습하고 떠나보내는 마음은 또 어떠할까. 이 젊은 친구의 삶의 굴곡을 나는 넘겨짚을 수나 있을까.

이후로 올라오는 그녀의 글에서 조금씩 퍼즐을 맞춰갔다. 우울증으로 오래 힘들었구나. 사직까지 했었구나. 배낭여행길에서의 버스사고였구나 친구를 잃었던 것은. 살아남았지만 오래 고통을 겪었겠구나.

그리고 참 대단하다 생각했다. 망가진 심신을 추스르고 순례길을 떠난 일. 직면을 위해 사고 현장을 다시 찾아갔던 일.(그곳은 머나먼 라오스였다)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험을 봐서 그 어려운 임용에 합격한 일. 교직의 사소한 일상들이 올라올 때 반갑고 기뻤다. 한번은.... 기억난다, 사고 때 크게 다쳤던 오른손 때문에 리코더 구멍을 완벽히 막을 수 없었던 날 썼던 글. 하지만 그날의 글에도 절망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고요 작가는 그렇게 단단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 책을 써나갔다.

책을 읽으니 그동안 엉성히 맞췄던 퍼즐에 그림들이 채워졌다. 깊었던 우울증만큼 잘해야 한다는 강박도 강했던 작가는 그래서 더욱 고통에 이를 악물었을 것 같다. 하루하루 한시간 한시간 부서져라 이를 악물고 손톱이 파고들도록 주먹을 쥐어야 했던 작가의 고통이 전해져왔다. 아침에 깨니 검사를 위해 가져왔던 공책들은 널부러져있고 밤새 형광등은 환하게 켜져 있으며 잠은 잔 것 같지도 않고 허둥지둥 나서는 발걸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이 대목은 내 첫담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도 그때 남들이 느낀다는 첫사랑(첫담임 아이들에 대한 애착)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하루하루가 힘들었었다. 어쩌면 그때 가벼운 우울증을 앓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질병이다. 작가에겐 된통 찾아왔을 뿐이다.

작가는 집필 초반에 '오늘도 자살을 생각한 너에게'라는 가제를 세웠던 것 같다. 결국 책 제목이 되지는 못했지만, 프롤로그의 소제목이 되었다.
안녕.
오늘도 울었니.

나지막히 시작한 프롤로그는

아파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널 미워하지 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넌 너의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버텨낸 거야.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더 이 순간들을 견뎌내자.
우리, 꼭 살아남자.
꼭 살아내자.
아팠던 이 시간들이 의미를 찾는 날이
분명히 올 거야.

이렇게 먼저 아픔을 겪은 이의 힘있는 호소로 이어진다. 프롤로그를 보고 그래, 한 번 읽어보자 마음먹는 독자들이 많길.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을 믿고 힘내어 도전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작가는 나보다 훨씬 젊지만, 많이 살았다고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기에 난 이 책에서 간접적으로 많은 경험을 했다. 사고의 현장, 버스 밑에 깔린 끔찍한 몇 시간동안 자신을 짓누르는 버스의 무게 밑에서 지나갔던 수많은 생각과 느낌들. 육신의 고통에 비해 마음에 겪었던 고통이 절대 작은 것이 아니었다는 자각, 그토록 죽고 싶어했으면서도 그순간 차오르는 생존에의 본능. 그런 것들이 생생하게 전해지면서 삶이란 참 단순한 것이 아니구나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그리고 길떠남의 미학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내가 그리 아팠다면, 나는 길을 떠날 용기를 냈을까? 다행히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아팠더라도 절대 길을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았을 것이다. 나는 '길떠남'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작가가 나보다 젊지만 더 많은 경험을 가진 건 그때문이 아닐까 싶다. 용기내어 떠난 길에서 그녀는 만났고 깨달았다. 아픔을 안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고 자신이 받은 (신에게서, 사람들에게서) 사랑들을. 그리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렇게 책이 되어 나왔다. 난 그래서 개인적으로 7장 [살아간다는 건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이 부분이 이 책의 절정이라 느껴졌다. '길떠남'이 담겨 있는 장이다. 물론 길떠남이란 문자 그대로의 '길'만은 아닐 것이니 꼭 여행길에 올라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작가도 독자도, 대부분의 삶은 일상으로 채워야 한다. 독자는 물론이요 이 모든 터널을 통과해온 작가조차도 일상이 늘 평화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때때로의 풍파도 지나가길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이 책이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와 독자의 연결을 통해.

저자의 앞길에 진심의 기도를 담아 이토록 응원하는 박수를 보내기는 20년 전 <지선아, 사랑해>이후 처음인 것 같다. 감당할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딛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전문인의 길을 가기까지 지선 씨의 행보에 감격하고 응원했던 기억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고요 씨는 육체적 고통 외에 삶을 찍어누르는 마음의 병과도 싸우며 지금까지 왔다. 그의 고통의 경험이 한사람에게라도 희망을 주길 바라며 이 책을 썼다. 한 사람이 아니라 고요 씨가 상상한 이상으로 많을거라 나는 믿는다. 누구든 자신의 마음을 봐달라고, 이 아픔을 어떻게 좀 해야겠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사주고 싶다. 작가가 내민 손을 잡고 그 작은 손아귀의 힘을 느끼도록 안내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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