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 하얀 카페 심쿵 레시피 푸른숲 어린이 문학 9
박현정 지음, 신민재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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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동화책을 읽었다. 이 표현이 내겐 딱 적당했다. 매력적. 검색해보니 아주 많이 팔린 책은 아니다. 근데 내겐 책장에 소중히 꽂힐 책이 될거같다. 고학년을 맡으면 함께 읽어 보려고.

같은반 친구 네 명이 각각 화자로 나오는 연작 단편집이다. 네 아이는 서로 오해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가까워지기도 하는 흔한 인간사 어딘가를 통과하는 중이지만, 누구나 자신의 문제가 우주보다 큰 법이고 그걸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중요하므로 이 아이들의 고민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아이들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눈이 바로 '매력적'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힘든 아이들의 이야기는 많다. 근데 난 정답을 정해주는 책도 싫지만 답없는 책도 깝깝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어쩌면 현실을 직시하기 피곤한 나의 회피일수도 있지만, 아이들과는 다큐 같은 동화보다는 이렇게 '동화 같은' 동화를 같이 읽고 싶다. 적당한 판타지가 있는. 그게 꿈이고 허상이고 심하게 말하면 마취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가라앉기보다는 떠올라보고 싶으니까. 차영아 작가의 '쿵푸 아니고 똥푸' 책에서 "산다는 건 백만 사천 이백 팔십 아홉 가지의 좋은 일을 만나는 것"이라는 대목을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데, 그런 거다. 말하자면 희망. 그것 없이 아이들을 대한다는 건 고문 같았어서 말이다. 나도 날마다 이 모퉁이 까페의 음료 한 잔씩으로 충전해야 한다고.

첫번째 이야기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주인공은 해진이다. 의도하지 않게 상황은 꼬이고 그 속에서 오해받고 움츠러드는 아이의 이야기다. 해진이는 친구들에게 '허언증 걸린 아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헬리시움이라는 최신식 아파트에 입주를 앞두고 아빠의 사업이 잘못되어 재개발구역의 연립 지하방에서 살게 된다. 해진이에겐 같은반 아역배우 나라와 어릴 때 같이 오디션을 봤던 기억도 있다. 이런 것들이 아이들에겐 '뻥'으로만 비춰졌고 생각없이 날아다니는 말들은 잔인했다. 모든 상황이 최악이 된 비참한 날, 해진이는 빗속을 뚫고 주머니 속 광고지에 있던 '모퉁이 하얀 까페'를 찾아갔다.
"이럴 땐 너만을 위한 특별 레시피가 필요해."
까페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의 제목이 심쿵 레시피.(사실 심쿵이란 제목은 그닥 내맘엔 안든다;;;) 찾아온 아이들마다 추억을 찾고 힘을 내게 해주는 메뉴들이 이 책의 각별한 재미 중 하나다. 작가는 "함께 나누면 행복하고 마음의 아픔도 치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음식과 동화는 닮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까페 장면엔 꼭 맛있는 음식과 음료가 나오는데 그게 군침돌기도 하면서 독자에게도 따뜻함과 안도감을 준다. 까페는 보였다가 사라지는, 말하자면 판타지인데도.

까페 자체는 판타지지만, 그곳에서 무슨 마법이 일어나진 않는다. 까페를 나온 해진이는 울며 딸의 가방을 들고 나온 엄마를 만났고, 둘은 서로를 위로했고, 겹겹이 쌓였던 아이들의 오해는 아주 작은 실마리 하나로 풀려간다. 지하방의 냄새나는 수건 같던 해진이의 존재를 다시 빛나게 해준 건 해진이의 노래였다.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토록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하는 건데, 타고나지 못한데다 딱히 노력하는 것도 없으니 바랄 일이 아니기도 하다. 하여간, 해진이는 다시 빛을 찾았다. 집안형편의 반전은 없지만, 달라진 존재. 해진이는 그후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조연으로 나온다.

두번째 이야기 [됐고 대마왕의 대굴욕]의 동권이는 해진이를 놀리는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발레를 하는 남학생 선유를 괴롭히다 다치게까지 하는, 표면적으로 객관적으로 못된 놈이다. 솔직히 난 이런 아이가 싫다. 심술, 무매너. 민폐. 이런 아이의 내면도 보여주는 게 문학의 매력. 심술이 꽃을 피우다 결국 선유를 다치게 한 상황에서 벼랑끝에 몰린 동권이는 까페를 찾게 된다. 까페누나는 동권이를 위한 레시피로 매직슬러시와 피자를 가져다 주었다. 동권이가 제일 좋아하는 피자. 그 맛은 동권이를 유치원시절 추억으로 이끌었다. 거기에 선유가 있었다.

까페를 나온 동권이는 가장 먼저 가야할 곳이 어딘지를 알았다. 선유에게 사과하고 속얘기를 하고 선유만 알고있는 자신의 약점으로 놀림을 당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했다. 둘은 함께 웃는다. 다행이다. 하지만 열쇠는 선유의 용서에 있었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 이녀석아. 넌 더 배워야 된다. 그러길 빈다.

세번째 이야기 [마음 속 새 한 마리]에선 선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등장인물 중 선유에게 가장 마음이 끌렸다. 선유는 발레를 배우는 남학생이다. 그건 동권이에겐 놀림감이고 아빠에겐 못마땅함이었다. "남자가 무슨..." 더구나 선유는 특별히 천재적 자질을 타고난 것도 아니었다. 발전은 느렸고 아빠의 매의 눈에 질린 선유는 무대에서 실수하고 무대 공포증까지 생겼다. 이런 상황에 너무나 감정이입이 되었다. 특별난 재능 없고 소심하기까지 한 나... 하지만 선유는 멋있었다. 물개박수를 보내는 나의 편애를 보라.ㅎㅎ 솔직히 나는 마음으로는 편애한다. 어떻게 선유랑 동권이를 똑같이 좋아할 수 있냐고. 표 안내려고 조심하고 과정에 불공정이 있지 않도록 조심할뿐. 남의 마음을 사는 건 본인의 처신이고 책임이다. 고학년쯤 되었으면 말이다. 징징거리지 말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것. 멋있을 기회는 있으며 누군가의 눈은 그걸 꼭 보아준다. 나도 그런 눈을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이고.

이 이야기에서 직업적으로 주목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다. 선유의 부상과 '학폭위'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솔직히 이정도 사안은 학폭위가 열린다 해도 담임으로서 전혀 말릴 수가 없는 상황이다.(사실 경중에 관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 팔을 다친 그날, 아빠는 다짜고짜 만년필과 수첩을 꺼내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김선유. 지금부터 친구들하고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자세히 얘기해."
아빠는 회의록을 작성하듯 내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 내려갔다. 중간중간 동권이가 어떤 성격의 아이이고, 언제부터 알고 지냈는지 물었다. 내 얘기가 끝나자 아빠는 수첩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일 당장 병원에 가서 입원해." (99쪽)

엄마의 만류와 두 아이의 자체적 해결(사과와 용서, 다시 단짝됨)로 결국 학폭위까지 가지는 않았다. 이 대목을 보며 학폭법을 다시 생각한다. 위에 적은 아빠의 해법대로 했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회복의 기회는 있었을까? 그러나 동권이가 후회와 반성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면?(모퉁이 까페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이와같이 적절한 지점은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과정에 교육적 고민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걸 가로막는 여러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길지만, 개선과 고민이 필요하다. 작가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이 현장교사로서는 고마웠다.

마지막 네번째 이야기 [확 삐뚤어지고 싶은 날]은 아역배우 나라의 이야기다.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있다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나라의 처지가 그리 좋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매니저 역할을 하는 엄마의 속박에 나라는 터질듯한 압박을 받는다. 친구들도 나라를 동경은 할지언정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확 삐뚤어지고 싶은 날, 나라도 그 광고지를 발견한다. 모퉁이 까페로 가는.... 나라 이야기는 짧았다. 거기서 끝이었다. 좋게 봐서 그런지 그것도 절묘하게 느껴졌다.^^ 하나는 열린 결말로 남겨두는 게 좋지. 상상하기도 이야기 나누기도 좋으니까.

전체 이야기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다. 그게 내가 가장 문제적 인물로 생각하는 선유 아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아이러니.^^ 좋은 말은 하기 쉽지만 그걸 자신과 자기 자식한테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선유아빠가 일일교사로 왔을 때 했다는 말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 나비가 고치를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걸 지켜보던 한 아이가 있었어요. 아이는 손가락으로 아주 조금 고치를 벌려 주었죠.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나비는 날갯짓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맴 돌다가 죽어버렸어요. 날개에 힘이 없어서 날지 못했던 거예요. 나비는 딱딱한 고치를 뚫고 나오면서 날개에 힘이 생기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도와준 나비는 날개 힘이 부족해서 혼자 날아갈 수가 없었어요. (125~126쪽)


부모와 교사가 갖출 덕목을 '애타는 인내심'으로 표현한 어떤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고치를 빠져나오려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건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격려와 응원 뿐임을 다시 기억한다. 아이들, 그중에서도 이 책을 함께 읽을 독자들을 응원하며 그들의 목소리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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