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아의 장풍
최영희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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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덜트소설, 그중에서도 SF에 매진하시는 최영희 작가님의 신작이다. 난 '인간만골라골라풀'이라는 중학년동화를 읽고 이 작가님을 알게됐지만... 이 작품을 읽으니 청소년기 아이들의 입맛에 맞을듯한 툭 던지듯 쿨한 대화와 문장들이 재미있다.

동화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작가의 입장을 생각해보는 편인데 주로 이르는 결론은 참 어려웠겠다, 대단하시다 등의 감탄이다. 간혹은 상당히 쉽게 그냥 관습적으로 엮은 플롯일 거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도 있지만 그런 작품은 드물다.^^;;; 특히 SF를 쓴다는 것은, 읽는거야 쉽지만 현대과학의 토대에서 미래를 상상하고 (그 상상이 황당무계할 수 있음. 이 책처럼) 그것에 나름의 논리를 세워 독자로 하여금 실소 대신 다음장을 넘기게 하는 힘, 그것을 갖춘다는 것은 보통 내공이 아닐 거라 짐작한다. 이 말에 반대하시는 분은 본인이 직접 써보시고 그게 얼마나 웃긴지 직접 읽어보시면 알 것 같다. 나는 알고 있으니 굳이 그러지 않겠다.ㅎㅎ

이 책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나로서는 썩 공감가지 않았지만 '오 이런 상상도~' 정도의 느낌은 주었다. 내가 공감했던 건 작가의 상상보다도 그 안에 넣어놓은 현실인식이었다. 현아의 외로움에 대한. 나아가 인간의 외로움에 대한.

우주 어딘가에 절대자(설계자) 집단이 있고 지구는 그들이 조종하는 시뮬레이션 공간이라고 작가는 설정했다. 그런데 그 절대자 집단도 절대자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게 이 책의 웃음코드이자 매력인 것인가... 청소년 설계자들의 과제이행 중 하나의 실수로 설계자의 능력과 과거 인간(최배달이라는 무도인)의 백업 데이터가 한 인간에게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그게 바로 17세 여고생 강현아다. 현아가 가지게 된 설계자의 능력이란 '락싸멘툼'(팽창)이다. 말하자면 장풍을 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절대자 집단으로선 절대자들만 가질 수 있는 에너지 활용능력을 가진 피조물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는 일. 하지만 그들도 나름의 윤리가 있는 바, 시뮬레이션 세상에 개입하여 '존재값을 없애는' 일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하여 청소년 절대자 한 명을 지구로 파견한다. 그는 현아네 반에 '손미카'라는 전학생으로 등장한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밀착 감시, 그리고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 시 지체없이 현아를 제거하는(존재값을 없애는) 일이다. 그들에게 현아는 이름 대신 오류X로 불린다.

청소년 절대자 손미카를 볼작시면, 인간을 초월하는 몇가지의 능력을 가졌을 뿐 딱히 다를 바가 없어보인다. 절대자 세계에서도 청소년들은 예측불가하고 얼빵한 것인가. 이야기의 깨알재미는 거기서 비롯된다. 어쩌면 감동도 그러하다. 현아를 밀착 감시할수록 미카는 그녀를 이해한다.

"미카는 자신을 이 세계로 내려보낸 어른들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이 세계의 변수에 대해 충고해 주지 않았다. 눈앞의 참사를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인간의 입장에 대해서 알려준 이도 없었다. 설계자들은 관찰 모니터상의 데이터들만 노려보고 있을 뿐, 이 세계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이곳은 데이터로만 가늠할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52쪽)

감시자이자 실행자의 임무를 띠고 세상에 온, 지구인의 눈에는 전학생인 미카가 현아 주변을 맴돌며 겪는 에피소드들이 이 책의 중반부이며 청소년소설 특유의 쿨내 진동하는 재미를 주는 부분이다. 난 사실 청소년들을 대변할수도, 그들을 웃길 재주도 없다. 그런 면에서 작가님에게 또한번 감탄했다. 웃긴 문장이 많았는데 내 입장에서 웃겼던 문장을 하나 골라 적자면, 현아에게서 최배달이 발현되어 태권도장에서 수련생을 한 수 가르치는 장면이다.
"상대가 궁금해하지 않는 걸 굳이 가르쳐 주기, 자기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상대를 몰아가기, 그래 놓고 결국 자기 입으로 정답 말하기. 수련생들은 무도인의 가공할 꼰대력에 입이 딱 벌어졌다." (99쪽)

후반부에 이르러 책은 웃기기를 멈추고 독자들에게 연민과 안타까움, 긴장감 등을 몰아준다. 현아가 어떤 아이였던가. 초반에 현아는 아이돌 그룹의 해체설에 세상이 무너진 광팬으로 등장했다. 가만보면 그 철저한 팬심은 텅 비어버린 그의 세상을 채우는 충전재 같은 것이었다. 캠퍼스 커플로 무지 사랑해서 결혼했던 부모님은 세월과 함께 사랑이 변하여 이혼을 했고, 아빠는 재혼해서 외국으로, 엄마는 남친에게로 떠나고 현아가 DMZ라고 표현한 다세대 주택에는 현아 혼자 살고 있다. 부모가 미성년자 딸을 홀로 두고 제 살 길을 찾아 떠날 수 있는지 나라면 그럴 수 없을거 같지만 크게 잘못된 거라고 정죄하고 싶지는 않다. 인생의 빈 공간을 팬심으로 채우며 그 대상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자신을 관리하는 현아가 놀라울 뿐이다. 그런 청소년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엎치락뒤치락 우여곡절 끝에 가까워져버린 미카에게 현아는 이런 속마음을 얘기한다.

"정확히 언제쯤인지는 기억 안 나는데 엄마 아빠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 그래도 엄마 아빠는 날 낳고 키웠잖아. 그래서..... 그립다거나 원망스럽다거나 하는 맘은 별로 없어. 그냥 두 사람한테 지금까지 신세지고 사는 느낌이야." (128쪽)

어쩌면 좋은가. 마카는 임무를 이행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계속되는 독촉 끝에 절대자 세계는 미카의 복귀 명령을 내린다. 임무는 다른 절대자에게 위임되고, 그건 현아의 존재값이 지워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며칠 동안에 일어나는 숨가쁜 일들, 스펙터클한 활극(^^), 그리고 반전들이 이 책의 후반부를 차지한다. (활극 편은 다소 황당하다는 느낌도 솔직히 없진 않았다.)

다 읽고 내 가슴에 가라앉은 하나의 이미지는 '달'이다. 작가도 이것을 노린 것 같지만.
달.... 어린 현아가 등장하는 장면. 딸에게 밥을 먹이지만 눈은 논문에 가있는 엄마 대신 거기에 있었던 달. 밥을 먹다가도 몇번씩이나 존재를 확인했던 달.
개인적으로는 이것만 다루었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인류의 문명이나 인간의 가치까지 다루려면 작품의 스케일을 더 키웠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7살 현아의 어깨에 외로움 말고 더한 것을 지운다면 너무 심한거 아닐까.

한편, 이 책에서 현아의 락싸멘툼을 쓰게 만든 못되고 한심한 어른들의 모습에 난 불편하고 많이 슬펐다. 학생의 인권을 무시하는 교사, 상식과 논리를 물말아먹은 광기어린 종교집단의 모습 등.... 문학이야 현실을 반영하는 매개체인 바, 그런 이들이 존재하니 작품에 등장했겠지만....ㅠㅠ 아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아니 이게 너무 큰 꿈이라면 때로 기대고 대화를 요청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 양심적인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홀로 외로운 개인들이 모여 외롭지 않은 사회를 만들었으면 한다. 어차피 외로움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그걸 기본값으로 잡고 말이다. 말이 좀 안되는 것 같지만 이게 내가 원하는 건강한 지구의 모습이다. 나라면 그러지 않겠지만 현아네 부모 같은 이들이 있어도 아이들이 병들지 않을 수 있는. 어렵겠지....

이 책에 멜로를 좀 더 강화하면 드라마의 원작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이세계, 저세계, 체인지(빙의) 등은 인기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들이니까. 최근 2년간(3년인가...) 드라마를 끊어서 내 감을 믿을수는 없지만 그래도 강추해본다. 음... 아마도 현아와 미카의 캐스팅이 관건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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