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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평점 :
소설의 리뷰를 쓴 기억이 거의 없다. 소설을 잘 읽지 않아서다. 토지, 태백산맥, 혼불 등의 대하소설들을 읽은 건 젊을 때였고, 이제는 그렇게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는 독서를 잘 못하겠다. 게다가 필요를 따지는 성향이 강해서인지 나이들면서 내 독서는 어린이책과 교육도서로 범위가 좁혀졌다.
그래도 너무나 유명한 이 작가의 <7년의 밤>은 읽었다. 그 책은 읽으면서도 힘들고 읽고 나서도 힘들었지만, 중간에 놓을 수는 없었다. 대단한 작가라 생각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빠가 "이 작가 책 또 나오면 갖다다오" 부탁하셔서 다른 책들도 빌려다 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최근 이 책이 나온 걸 봤는데, 소설을 다시 읽겠다고 작심한 건 아니지만 끌렸다. 이름 때문인가. 이름 끝자라 내가 많이 사용하던 이름.
진이는 사람이름이고 지니는 동물 이름이었다. 영장류 중에서 보노보라는 동물. 진이는 사육사다. 이런 대목을 보아도 나는 작가들한테 감탄하곤 한다. 내가 경험의 폭이 좁아서인지, '아니 자기 경험 밖에 있는 세계를 어떻게 이렇게 속속들이 알수가 있지? 얼마나 취재를 했길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머리속에서 그려낼 수 있는, 남녀가 서로 팔자를 꼬고 꼬는 피곤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들지 않던 존경심이 이럴 때는 든다.
잘은 모르지만 이 작가의 작품 중에 판타지가 들어간 작품은 처음이라고 들었다. 그것도 흔하디흔한 '체인지'류의 설정이라니. 이건 영화나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고 내가 읽어본 동화만 해도 몇 권 꼽을 수가 있을 정도인데... 그러나 읽다보면 이거 흔하잖아 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진이의 사고 장면, 지니의 몸 속에서 진이의 의식이 깨어나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을 읽을 때 감탄이 나온다. 겪어봤어도 이렇게 묘사하긴 어렵겠다.... 라는. 누구나 언어를 쓰지만 그 언어를 다루는 수준은 엄청난 차이가 있구나. 당연하겠지만. 그래서 세상엔 작가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정확히 말하면 '체인지'가 아니었다. 사경을 헤매는 진이의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지니의 육신에 의탁했을 뿐이다. 지니의 육신은 진이의 뜻을 따랐다가 지니의 본모습으로 돌아갔다가 양쪽을 오간다. 지니의 정신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본다. 이 과정에서의 생각과 감정의 흐름도 마치 들여다보듯 묘사가 되어있다. 내가 이런 설정에 현실적으로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릴만큼.
불법 포획되어 팔리고 학대받는 동물들(이 책에선 보노보 지니), 그리고 침팬지 엄마라고 불릴만큼 그들과 교감했지만 신변의 위협 앞에 돌아섰던 진이, 긴 시간이 흘러 운명처럼 만난 두 존재. 비슷한 소재의 작품은 많이 있겠지만 이처럼 가슴 조이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또 강인하지만 홀홀단신인 진이, 그리고 얼떨결에 그 영혼의 일을 돕게 된 부적응 백수 노숙자 민주. 철저히 외로웠던 두 남녀사람의 우정도 아름답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영원히 간직할.
누구나 혼자 떠난다는 면에서 그리 애탈 것은 없지만 여러겹의 외로움과 싸우며 버티던 저 젊은 인생이 저렇게 떠난다는 게 가슴아팠다. 하지만 다행이다. 그녀의 의식은 깨어 지니를 깊이 만나고, 또다른 외로운 한 사람 민주와 짧고 멋진 동행을 했으니.
선이 굵고 거친 이 작가의 작품 중에선 예외적으로 곱고 여린(?...표현할 말이 잘 생각 안 남) 작품이라는 평인 듯하다. 가슴이 아려오긴 했으나 읽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아.... 소설도 읽고 싶구나. 하지만 모드 전환이 쉽지 않은 나는 일하면서 소설도 읽고 이런게 잘 안된다. 월급받는 일만 해도 지쳐버리는 저질체력이라서 말이다...ㅠ 이제 휴가 막바지다. 일할 땐 진이처럼 일하고 싶다. 전문적이고 강인하게. 때로는 누군가의 '다정한 그녀'가 되면서.(이 책에서 그 누군가는 영장류센터의 침팬지들) 그러고 싶다는 거지. 희망사항....;;;; 휴가의 유일한 소설 잘 읽었다. 이제 다음 휴가를 기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