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도로봉
사이토 린 지음, 보탄 야스요시 그림,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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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향을 저격하는 아주 매력적인 동화를 만났다. 그 사람만의 문체와 느낌을 가진(사실은 처음 보는 작가다). 이 책을 내가 어릴 때 읽었다면 이 느낌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은. 그러면서 영화로 만들어도 아주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사영화도 좋겠지만 동화니까 애니메이션이 더 좋을듯.... 난 장면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영화 장면을 생각하며 읽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떠올랐다. 영화로 표현하기 좋게 캐릭터들도 개성이 분명하다. 아주 평범한 외모지만 뭔가 비범한 도둑 도로봉, 베테랑 형사지만 뭔가 인간적인 치보리 씨, 어리고 어리숙하지만 뭔가 번뜩이는 기록관 아사미 씨, 적군일 것 같았는데 의외로 아군인 오하스 형사 등.

도로봉은 도둑이다. 제목에부터 나오니 모를 수가 없다. 어떤 도둑일까? 대도? 그는 어떤 현장에서 우연히 다른 사건을 조사하러 나왔던 '형사'인 화자와 마주치게 되고 제발로(?) 두손을 내밀어 수갑을 차고 경찰서에 잡혀왔다. 그리고 조사를 받는다. 조사받는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이라 보면 된다. 도로봉의 자기고백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원에서 발견된 아기 때의 이야기부터.

잡혀있던 열흘간 도로봉은 취조시간마다 자신의 범행이력 -어찌보면 인생 이야기-을 담담히 털어놓았고, 형사들은 믿기 힘든 그 이야기에 점차 빠져들었다. 도로봉은 평생 수많은 절도를 해왔지만 한번도 잡히지 않았다. 정말로 신출귀몰한 괴도인가? 그런 이름을 붙여주기엔 애매한 면이 있다. 그는 알려지지 않았고 어떤 형사도 그를 잡으려 해 본 적이 없었다. 아예 한 번도 신고된 적이 없었으니까. 대체 어떻게?

그가 가진 남다른 능력은 '물건의 소리를 듣는 것' 이었다. 자기가 있는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물건들은 도로봉에게 소리를 내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도로봉은 그 소리를 따라 물건을 가지고 나온다. 물건들은 주인에게 완벽히 잊히거나, 어찌할바 모를 물건들이어서 그의 절도는 아예 인식되지도 않거나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니 그는 자칭 도둑이되 한번도 도둑이라 불린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절도 에피소드는 애잔하기도 하고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하다. 그렇게 도로봉 씨는 절도로 세상 구석의 제자리를 찾아주며 살고 있었다. 그의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이 책대로라면 우리집에선 아우성치는 소리가 왕왕 울릴 것이다. 눌리다 못해 화석이 된 옛날 서류들은 "날 고물상에 갖다주면 푼돈이라도 받을거야. 그것도 싫다면 재활용에라도 내놔." 라고 할 것이고 깊은 곳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창고 물건들 또한 비슷한 소리를 낼 것이다. 보지도 않는 앨범이나 앨범에도 못들어간 사진들은 "날 태워버리고 추억은 가슴에만 간직해." 라고 할 것이다. 도로봉 씨가 1톤 트럭을 몰고 오면 좋겠다. 아우성치는 물건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나는 딱 손뻗으면 닿을 데 있는 물건들만 가지고 가볍고 단순한 삶을 살 텐데.

그러나 이 책은 단지 '물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은 호흡이 좀 긴 편이다. 도로봉 씨는 '어떤 범행' 이후에 큰 변화를 감지한다.
"물건과 살아있는 것은 원래부터 다른 세계에 있는 거야. 어느 한쪽에 발을 들여놓으면 다른 한쪽에는 있을 수 없는 게 이치. 물건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살아 있는 것의 목소리에는 귀를 막아야 돼. 그 반대도 그렇고. 어느 한쪽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느 한쪽의 목소리는 잃게 되거든."

도로봉 씨가 다른 세계로 발을 옮겼다면 그건 어떤 존재를 절도한 사건 때문이었다. 물건이 아닌. 생명과 감정이 있는. 그건 조그만 강아지 '요조라'였다. 그러나 강아지는 주인 손에 돌아갔고 강아지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석방 전날에 유치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 어느때보다도 강렬하게 도둑의 욕망을 가진 그에게 더이상 예전의 능력은 없다. 그것을 알고 있는 형사들의 '도로봉 구하기' 작전이 펼쳐진다.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하고 코웃음 나오는 발상일 수도 있다. 물건이 말을 해? 쓸모를 잃어서 슬퍼해? 유치해보일 수 있는 이런 발상을 세련되게 감싸고 환상적인 숨결을 불어넣는 힘은 작가의 매력적인 문체인지, 흥미로운 플롯인지 또다른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취향저격하는 책을 만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단, 동화로서 아이들에게 잘 다가갈지는 좀 실험을 거쳐 봐야 알 것 같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책은 호흡이 길고 구성도 단순치 않다. 아이들 대중을 사로잡긴 어려워 보이고 일부 취향의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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