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원이 이루어지는 길모퉁이 ㅣ 시공주니어 문고 1단계 67
오카다 준 지음, 다나카 로쿠다이 그림, 김미영 옮김 / 시공주니어 / 2018년 4월
평점 :
오카다 준의 현실과 맞닿은 소소하고 천연덕스러운 판타지를 나는 좋아한다. 신작이 나왔길래 읽어보았더니 역시 그 느낌이었다. 그중 천연덕스러움이 극대화되었다고나 할까. 할아버지의 입을 빌려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7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할아버지가 왕년에 겪었다는 이야기들인데 모두 엄청난 뻥이다. 예를들면 빗속을 헤엄쳐 구름 위로 올라가 번개아가씨를 만나 좋아해서 결혼했는데 그게 바로 할머니였다던가, 신문을 집어오는데만도 한나절이 걸리는 큰 집에 살았다던가. 눈을 지켜주자 눈이 은혜를 갚았다던가.
누가봐도 뻥인 이런 이야기들은 "말도 안돼 할아버지, 뻥치지 마."로 일축되기 십상이지만 이 손자는 그러지 않기에 이야기는 이어진다. 순진해서 반신반의 하는 건지, 믿어드려야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어서인지, 할아버지에 대한 예의인지 그건 모르겠다. 아마 셋 다인것도 같다.
이 책은 나의 추억도 두 가지나 소환했다.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우리 삼남매에게 엄청난 무용담들로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셨다. 뿐만아니라 현재도 신통력을 갖고 계시다고 주장하셨는데 특히 야구경기를 할 때 우리편이 이길 수 있도록 신통력을 부리신다고 했다. 멋진 역전승이 이루어진 날이면 우린 아버지가 부렸다는 신통력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기쁨을 나누곤 했다. 우리도 그랬다. 그걸 믿었던 건 아니지만, 믿고 싶었고 믿으면 즐거웠다. 그래서 아버지의 무용담에 장단을 맞췄고 우린 재미난 한때를 보냈다.
또하나는 우리 아버님과 그의 손자, 그러니까 우리 아들의 이야기다. 두 사람 사이는 이 책의 조손처럼 각별하다. 아들이 다섯 살때 우리 부부는 모종의 일로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그때 몇달간 아버님댁에 아이를 맡겼었다. 엄마 껌딱지로 한몸처럼 지내던 아들을 떼어놓고 허전함과 걱정에 몸살을 앓았는데 정작 아들은 멀쩡했다. 그러다 몇달만에 우린 아버님과 같이 살게 됐다. 한참이 지난 어느날 아들을 데리고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아들이 '사랑의캔디'라는 오색의 사탕의 담긴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 나 저 통만 보면 할아버지 댁에서 살던 추억이 생각나. 할아버지가 저 사탕을 매일 하나씩 주셨어. 할아버지랑 살 때 참 행복했는데."
그 소외의 기억을 어떻게 행복으로 추억할 수가 있을까? 그 아들은 얼마전 군대를 갔고 지난주에 훈련소 수료식을 했다. 전날까지 아버님 방의 달력엔 매일 X표가 하나씩 늘어났다. 그렇게 만날 날을 꼽고 사시던 할아버지를 안고 아들은 눈물을 흘렸다. 조손은 그렇게 깊은 연대로 묶여있다. 이 책의 조손처럼.
할아버지의 마지막 이야기는 표제작인 '소원이 이루어지는 길모퉁이'다. 할아버지는 옛날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는 길모퉁이를 우연히 발견했고 몇번 소원을 빌었지만 그 길은 지진으로 무너져서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새로운 길을 갈 때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길모퉁이를 찾곤 한다. 소원이 뭐냐는 손자의 질문에 "그건 말 못하지." 라고 대답하면서.
이 책을 아이들과 읽으면 다양한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너희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니? 할아버지랑 있었던 추억을 말해볼래? 할아버지의 소원은 뭘까? 너희들이라면 어떤 소원을 빌겠니? (다행히도 할아버지는 "뭐든지 다 이루어지면 한심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소원빌기를 자제했던 모습도 보여준다.)
뻥과 판타지의 차별성을 보여준 오카다 준의 책이 난 이번에도 맘에 들었다. 나도 뻥 실력이 좀 있다면 아이들에게 재미있고 솔깃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불행히도 뻥에는 소질이 없어서. 아버지를 안 닮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