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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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따분함이야말로 부랑자 최고의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허기나 불편보다도, 심지어 언제나 남 보기 망신스럽다는 느낌보다도 더한 것이지 싶다. 무지한 사람이라고 해서 온종일 아무 할 일 없이 가두어둔다는 건 어리석고도 잔인한 짓이다. 개를 통 속에 가둬놓고 묶어두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배운 사람들뿐이다. 거의 대부분이 무학인 부랑자들은 빈곤에 대해서도, 아무 영문도 모르고 의지할 데도 없이 당할 뿐이다. 그런 그들이니 10시간 동안 불편한 의자에 꼼짝없이 앉혀놓으면 뭘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할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생각나는 게 있다 한들 불행을 푸념하거나 일자리를 갈망하는 것밖에 없다. 그들에겐 무위의 끔찍스러움을 견딜 자산이 없는 것이다. -15쪽

열대의 풍경에선 이상하게 사람만 빼놓고 모든 게 눈에 잘 들어온다. 말라붙은 땅도, 석류도, 야자수도, 먼 산도 눈에 잘 뜨인다. 그러나 밭에서 괭이질 하고 있는 농부만은 꼭 놓치게 된다. 그것은 그의 피부색이 흙색과 같으며, 그래서 보는 재미가 훨씬 덜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나라들이 관광휴양지가 되어가는 건 바로 그래서다. 아무리 싸도 불황이 횡행하는 곳에 놀러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피부가 갈색인 곳에서는 빈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인에게 모로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렌지나무 숲이나 식민기구의 일자리다. 영국인에겐? 낙타, 성곽, 야자수, 프랑스 외인부대, 놋쇄 쟁반, 도적떼다. 그러니 여기서 몇 년을 살아도 인구의 9할은 다 침식된 토양에서 얼마 안 되는 먹을거리를 짜내느라 늘 허리가 부러지도록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게 현실이란 걸 전혀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72쪽

1914~1918년은 무의미한 대학살로 무시될 뿐이었고, 그때 목숨을 잃은 사람들조차도 어떤 식으로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나는 "아빠는 전쟁 때 뭘 했어요?"라고 묻는 모병 포스트를 생각하면(아이의 질문에 아빠는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른다) 그리고 그 바로 그 포스터에 꾀여 입대했다가 나중에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아니었다며 자식들한테 무시당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온다. -80쪽

영국에선 정의니 자유니 객관적 진실이니 하는 개념들을 자기도 믿고 있다. 그것들은 허상일지 모르나 대단히 강력한 힘을 지닌 허상이다. 그런 것들에 대한 믿음이 행동에 영향을 끼치며, 그 때문에 국민 생활이 달라지는 것이다. -98쪽

영국 좌파 지식인들의 정서는 몇 개의 주간지와 월간지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이들 신문을 보면 당장 두드러지는 것은 대체로 부정적이고 불만 가득한 태도와, 언제나 건설적인 제안이라곤 없다는 사실이다. 권력을 잡아본 적도 없고 그걸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의 무책임한 트집 잡기 말고는 볼거리가 별로 없는 것이다. -116쪽

세계를 실제로 형성해가는 에너지는, 민족적 자존심, 지도자에 댇한 숭배, 종교적 신앙심, 전쟁에 대한 사랑과 같은 감정에서 솟아나는 법이다. 그런데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런 감정들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기고 무시해버린다. 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도 그것들을 너무 철저히 파괴한 나머지 행동할 힘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126쪽

안전하고 문명화된 생활의 결과 중 하나는 원초적이고 중요한 감정들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지나친 민감함이다. 그래서 아량이 비열함처럼 불쾌하게 느껴지고, 감사가 배운망덕처럼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게 가능한 것이다. -143쪽

지식인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사람들이지만, 상황이 절박해지면 상당수가 좌절하여 패배주의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다는 걸 알 만큼 멀리 내다볼 줄 알며, 매수당하기도 쉽다. (그래서인지 나치는 지식인들을 매수하는 데 상당한 가치를 둔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을 농락하는 수법을 간파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여 파시즘의 헛된 약속을 쉽사리 받아들이지만, 언제나 머지않아 투쟁을 재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은 파시즘의 약속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자기 몸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을 영영 자기편으로 만들자면 파시스트들은 전반적인 생활수준을 높여야만 할 텐데, 그럴 수도 없거니와 아마 그럴 마음도 없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은 식물의 생장과도 같다. 식물은 맹목적이고 어리석을지라도 빛을 향해 계속해서 위로 뻗어나가는 것만큼은 알며, 끝없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밀고 나간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그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며, 이제 그들은 그런 삶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152쪽

그런 목표에 대한 의식은 조수처럼 빠져나가기도 하고 밀려들기도 한다. -152쪽

행운을 빈다네, 이탈리아 병사여!
하지만 행운은 용감한 자의 것이 아니니,
세상이 그대에게 무얼 갚겠는가?
그대가 준 것보단 언제나 적으리. -161쪽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의 위대한 시대는 머스킷총과 소총의 시대였다. 부싯돌총이 발명된 뒤부터 뇌관이 발명되기 전까지, 머스킷총은 꽤 효과적인 무기였고 동시에 아주 단순해서 거의 어디서나 만들어낼 수가 있었다. 머스킷총의 장점 덕분에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성공이 가능했고, 민중의 봉기가 지금 시대보다 훨씬 심각한 사건이 되었다.
...
그러나 그뒤로는 모든 군사기술의 발전이 국가에게 유리하고 개인에겐 불리하게, 또 산업화된 나라엔 유리하고 후진국엔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럴수록 세력의 중심 국가도 그 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9년에 이미 대대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는 다섯밖에 되지 않았고, 지금은 셋뿐이다. (아마 결국엔 둘만 남게 될 것이다) -211쪽

글의 주제는 그가 사는 시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적어도 우리 시대처럼 격동적이고 혁명적인 시대에는 그렇다) 그는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나름의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되며, 그것은 그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다. 물론 그는 마땅히 자신의 기질을 다스려야 하고, 미성숙한 단계에 고착되거나 비뚤어진 심기에 매몰되는 경우를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일찍이 받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린다면,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 자체가 없어져버릴 것이다. -292쪽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ㅏ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대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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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염천 -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리스.터키 여행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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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아토스 반도는 그리스정교의 성지로서 수 세기 동안 단 한명의 여자도 살고 있지 않으며 출입도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하루키는 '여자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장소가 전 세계에 한 군데쯤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장소가 어딘가에 있다고 해도 나는 별로 화나지 않는다'고 쿨싴하게 말하지만, 내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갈 수 없고 밟을 수 없는 땅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역시 억울하고 분한 일이다. 하루키가 그렇게 원통한 이 세상의 여자들을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지만(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키는 누군가를 위해서 무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 책으로 나 같은 여자들의 원통절통함을 어느정도 덜어주게 되었다. 


좋은 여행기란 주관이 충만한 문장만으로 독자들을 홀리되 독자가 스스로 그 장소를 찾아가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싶단 마음이 들도록 아주 약간의 공백을 남겨두는 글이라 믿는다. 그럴듯한 사진으로 부족한 문장력을 가리고 잠시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하는 여행기는 비겁하다. 하지만 아토스는,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계이므로 예외로 칠 수 밖에 없다. 내가 아토스를 내 육감으로 느낄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현실에서는 여행기로나마 그 곳을 100% 느끼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천염천의 이 모든 사진들은 용서가 된다. 마쓰무라씨가 촬영하였다는 사진들은 요즘의 포토샵 사탕발림 사진들과 달리 담백하고, 글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문장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여행기의 일부로서 존재하기에 글을 읽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우천염천에 대한 평(별점)은 먼 북소리나 슬픈외국어에 비해 낮은 편인데,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 여행기에 여행지에 대한 짜증과 신경질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수도원에서 주는 곰팡이 핀 빵을 먹으며 수도원 미슐랭 가이드가 있다면 별 0개를 받을 수준이라 평하고 '이런 곳에 하루 더 처박혀 다시 곰팡이 빵 따위를 먹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죽어버릴 것이다'라고 일갈한다. 고생한 이야기만 내내 이어지니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낭만적인 여행기를 기대한 독자들이라면 실망스러울만 하다. 하루키가 원래 여행지에 대한 판타지를 선사하는 작가가 아니기는 하지만, 로마와 미국동부에서 살며 쓴 글들을 보면 그만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느껴진다. 하지만 우천염천에는 그런 낙관이 없다. 크게 소란 떠는 작가가 아니니 그렇다고 나 죽겠소 엄살을 부리지도 않지만, 확실히 그의 태도가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그런게 진짜 여행 아니겠는가? 하루키도 인간인데 발에 물집이 잡히고 발톱이 흔들릴 때까지 걸으며, 게릴라가 나타나는 흔적뿐인 국도를 달리면서도 언제까지나 초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관념의 여행이 아닌 실제의 여행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감정이 짜증과 신경질이라는 진실을 떠올려 보면 이 여행기는 다만 솔직할 뿐이다. 너무나 담담해서 가끔은 인간같지 않은 하루키도 이렇게 화가 치밀어 오를때가 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기도 하였다. 아토스반도에 대한 여행기가 마무리되면 책의 후반부는 터키 여행기에 할애하고 있다. 지금의 터키와는 전혀 다른 20세기의 총검이 지배하던 터키의 이야기. 그래서 여행기이자 동시에 기록으로서의 성격도 강하게 느껴진다. 납득할 수 없이 낙후된 기반시설과 지저분한 호텔에 대한 하루키의 불평은 이어진다. 

아토스반도 여행기가 물리적으로 갈 수 없는 장소에 대한 글이라면 터키 여행기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1980년대란 시간에 관한 글이기에, 이 책은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가려고 해도 갈 수 없는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하루키의 안내로만 당도할 수 있는 여행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그의 투덜거리는 안내가 즐거울 것이다. 아직 팬이 아니라면 먼 북소리를 먼저 권하고 싶다. 하루키는 하루키이지만, 우천염천의 거센 비 내리고 뜨거운 해 뜨는 고단한 여행은 우선 사랑에 빠진 다음에 같이 해도 늦지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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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8-18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여기서 다시보내요. 담아두고 아직인 책인데ᆢ 1980년대 터키여행기군요. 좋은여행기에 대한 님의 생각에 공감해요. 그리고 그 문단의 내용이 이 책을 더 끌리게 만드네요.^^

LAYLA 2012-08-18 22:36   좋아요 0 | URL
네 천천히 보셔요. 하루키는 역시 널럴할때 봐야 좋은거 같아요 :)

노이에자이트 2012-08-18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송에서 아토스를 봤는데 주변 경치가 참 좋은 수도원이 있더군요.여자는 물론 동물암컷도 출입금지입니다.

LAYLA 2012-08-18 22:42   좋아요 0 | URL
오 그렇네요. 이런 곳이라면 다큐멘터리 방송물이 분명 있겠군요. 여자도 갈 수 있다면 분명 갔을 거에요. 가고 싶어요. 아토스는 정부로부터 자치를 보장받는 곳이라지만, 그리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 돈을받고 입장권을 팔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어요. 하지만 그렇게 갈 수 있게 된다면 안 가느니만 못하겠죠.

노이에자이트 2012-08-19 21:17   좋아요 0 | URL
그리스 안내책자에는 반드시 나오는 유명한 곳이죠.암탉이나 암염소 등 암컷동물도 들여오지 못해요.물론 바닷가니까 물 속의 암컷생선은 어떻게 할 수 없겠죠.배 한 척이 가끔 와서 생필품을 공급하는데 물론 선원들도 모두 남자! 여자는 절대 출입엄금입니다!
경치가 좋으니 인터넷으로 한 번 검색해 보세요.바닷가 암벽이 절경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8-1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라이라님 이 책을 읽으면 터키를 잘 알 수 있을까요? <순수 박물관>을 봤는데 터키가 너무 이질적이에요. 아무리 듣고 읽어도 실체가 잡히지 않는 것처럼요. 저는 하루키 여행기는 못 읽어봐서(그 유명한 그리스도..) 어떤 스타일일지 궁금해요^^

하루키의 짜증은 그리스보다 터키가 별로라서 그런 건 아닌거죠?ㅋㅋ

예전에 전설의 고향에 남자는 못 오는 어떤 도시가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거기 가서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그러는데.. 거긴 뭐 가상이니까요 :)

LAYLA 2012-08-19 22:32   좋아요 0 | URL
잘 알기 위해서라면 다른 책이 나을거에요. 터키라곤 해도 지금의 터키와 80년대는 또 무척 다른 느낌이라서요, 지나간 시대를 '느끼고'싶으시다면 보시어요 :)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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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어떤 동물도 죽을 줄 아는 길로 걸어가지 않는데, 왜 사람만은 그게 자기를 파멸시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눈을 찌르는 것일까?-49쪽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글을 써내려가는 장면을 상상할 때 어떤 애잔함 같은 것을 떨칠 수가 없다. 누군가 그런 소설을 가리켜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고 말했다. 식탁에 앉아서 쓰는 소설이라는 뜻인데, 전문적인 소설가가 아니라 일반인의 처지에서 쓴 소설이 크게 인정받았을 때 붙이는 이름인 듯 하다.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여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60쪽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그건 우리가 살면서, 또 사랑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세를 닮은 재벌 3세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남산 꼭대기에 세워 준다고 해도 나는 그 일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다.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그 일들을 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문학을 한다. 그정도면 인간은 충분히 살아가고 사랑하고 글을 쓸 수 있다. -67쪽

하늘이 나 같은 재질을 냈다면 반드시 쓸 곳이 있으리라
천냥 돈은 다 써버려도 다시 생기는 것을
양을 삶고 소를 잡아서 우선 즐기자
한꺼번에 삼 백 잔은 마셔야 된다
-84쪽

시간이란 무엇일까? 그건 한순간의 일이 오랫동안 기억되는 과정이다.-86쪽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내가 서른 살이 넘어서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내 계획은 정확하게 입대할 때까지만 세워져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20대 후반 까지는 간신히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지만 서른 살 너머까지는 무리였다. 그러므로 서른 살 이후라는 것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내가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 살 그 즈음에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122쪽

'10여년 전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단 하루가 지난 일이라도 지나간 일은 이제 우리의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그 눈빛을 다시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발을 동동거리며 즐거움에 가득 차 거리를 걸어가던 그때의 그 젊은이와는 아주 다른, 어떤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우리가 변한 게 아니라 우리가 변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123쪽

그 집의 식구들은 모두 스물넷에서 서른두 살 사이의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 그 누구와도 가족처럼 지낼 수 있으나 다음날이면 남남처럼 헤어질 수 있는 나이. 그래서인지 우리는 금방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친해질 수 있었다. 그 집 마루에서 벌어지는 술자리에는 일종의 형재애나 자매애 같은 느낌이 있었다.-136쪽

그러나, 정말 나는 너무 슬펐다. 새벽마다 가슴은 찢어지고.
달빛은 잔인하고 햇빛은 가혹하여,
쓰디쓴 사랑이 무감각한 도취로 가슴을 부풀게 하였다.
아 용골이여 부서져라, 아 이 몸이여 바다에 떨어져라. -164쪽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사실은 지금도 나는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190쪽

그렇게 한 3년 정도 그와 함께 지냈다. 그의 집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함께 여러 곳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광경을 봤고 수없이 많은 소리를 들었다. 대개는 처음 보고 듣는 것들이 많았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듣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우리 삶에 존재하는 뜻은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이 세상을 더 밝고 멀리 보라는 까닭이다.-194쪽

어쩌자고 삶은 그처럼 빨리 변해가는가? 어쩌자고 열아홉 살에 우리는 헤어지게 된 것일까? 어쩌자고 모든 것은 조금만 지나면 다 나아지는가? 어쩌자고 고통은 때로 감미로워지는가?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끝이 없으나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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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염천 -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리스.터키 여행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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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토속주라는 것은 그 지역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좋아지는 법이다. 키안티 지역을 여행했을 때는 와인만 마셨다. 미국 남부에서는 매일 버본 소다를 마셨다. 독일에서는 시종일관 맥주에 절어 있었다. 그리고 여기 아토스에서는.....그렇다, '우조'인 것이다. -65쪽

여행을 하다 보면 모든 일이 예정대로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국땅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장소-그것이 바로 타향이다. 그러기에 모든 일은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하면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은 것이 바로 여행이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 이상한 것, 기막힌 일들과 조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128쪽

터키를 여행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차이하네에 들어가게 된다. 잠깐 휴식을 취하기에 편하기도 하지만 터키에 있다 보면 자연히 차이가 마시고 싶어진다. 몸이 차이를 원하게 된다. 어쩌면 기후 탓일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조금 오래 있다 보면 그런 식으로 기호가 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때 에스프레소가 마시고 싶었던 것보다, 그리스를 여행하다가 그리스 커피가 마시고 싶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우리는 차이에 끌렸다. "그럼, 잠깐 저기에서 차이라도 한잔 마실까"하는 터키식 습관에 금방 물들어버린 것이다.-184쪽

그곳 공기는 그 어느 곳과도 다른 뭔가 특수한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부에 와 닿는 감촉도 냄새도 색깔도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이제까지 맡아왔던 그 어떤 공기와도 달랐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공기였다. 나는 그때 여행의 본질이란 공기를 마시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기억은 분명 사라진다. 그림엽서는 색이 바랜다. 하지만 공기는 남는다. 적어도 어떤 종류의 공기는 남는다.

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공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기 속에서 일어난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적인(그것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었다)몇 가지 일들을. 나는 그 후 많은 나라를 다녔고 그곳에서 여러 가지 다른 공기를 맡아왔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터키의 공기는 그 어떤 다른 나라의 공기의 질과 달랐다. 어째서 터키의 공기가 그렇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나로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분히 일종의 예감 같은 것이다. 예감은 그것이 구체화 될 때만 설명할 수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씩 그런 예감이 나타날 때가 있다. 그렇게 많이는 아니다. 그저 몇 번쯤.-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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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2-08-1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공기 이론 공감. 하루키 정말 단 한번도 매료되었던 적 없지만 이건 읽어보고 싶네요. 여행을 앞두고 읽겠어요. 여행 없는 삶의 이 책은 독일듯 ㅋㅋㅋㅋ

LAYLA 2012-08-16 16:29   좋아요 0 | URL
여행 못해서 이거 대신 읽었어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이 책엔 여행지에 대한 신경질이 묻어있거든요. ㅋㅋ
 
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철들고 성숙해지는 순간부터 남은 인생은 밑지면서 사는 거라는데 얘(책의 주인공)12살부터 세상이치를 다 알았다고 하니, 읽는 내내 이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될지 보여 안타까웠다. 어떤 어른이냐면. 아까운 젊음은 냉소로 흘려보내고, 나이 들어 불륜남 앞에 벌거벗은 시든 몸으로 뒤늦게 이런 생각을 하는 어른.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치른 것이 내 인생일지라도, 걸어온 삶을 되돌릴 수 없음을 잘 안다는 이 체념이 슬것이고,

열 둘의 문장에서부터 이 체념이 스며들어 있으니 더 슬프다.

 

인생을 아는 사람은 인생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초연하다고 하지만, 초연함과 용기 없음의 경계는 모호하지 않은가? 다가오는 생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살아 내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물살 따라 흔들리는 수초처럼, 바람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나도 생각했다. 내 삶은 내 의지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것이므로.

 

...하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어차피 내 의지대로 되지 않을 것이면 그냥 의지를 가져 보는게 어떠한가? 어차피 지 멋대로 흘러가는 인생이라면, 나도 내 멋대로 의지를 가져보면 어때?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당연히 해 봐야 하는거 아닌가? 오기와 만용일지라도 여기서 포기하긴 싫다는 마음.

 

모르겠다. 자기연민을 극복하는 과정인지, 삶에 다시 한 번 더 속아 넘어가는 것인지. 삶이 날 속이겠다 작정하였다면 한번만 더, 그냥 속아 넘어가고 싶다. 너무 명민해서 속아 넘어가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의 이야기는 가슴이 아프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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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8-15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새의 선물> 읽을래요.
계속 미루다가 안 읽고 있어요ㅠㅠ

LAYLA 2012-08-15 19:11   좋아요 0 | URL
한번 시작하면 금방 읽을거에요 ^^

tintin2506 2017-08-09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책을 다 읽고 리뷰를 검색하던 중이였는데, 5년 전 작성된 이 글에서 제가 갈증을 느꼈던 부분을 정확히 언급해 주시네요! : ) 너무 일찍 성숙해버렸지만 사랑스러운 ‘애어른‘ 진희가, 여전히 냉소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른이 된 모습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더라고요. 정말로 12살에서 성장이 멈춘 느낌이랄까. 물론 이러한 설정이 미학적으로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지만요 ㅎㅎ

LAYLA 2017-08-17 20:06   좋아요 0 | URL
틴틴님 댓글로 저도 오랜만에 이 글을 찾아봤구요
제가 이 글을 쓸 때 이십대 중반이였는데
저 역시 뭔가 애늙은이 같았었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