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잇태리
박찬일 지음 / 난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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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무서운 건 경찰도 헌병도 아니다. 나는 그걸 우연히 목격했다. 어느 변두리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있었는데, 카페 주인이 갑자기 사색이 되어 얼어붙었다. 나도 얼른 뒤를 돌아보았는데 갈색 제복의 어떤 사내들이 기관총을 들고 들어닥치는 중이었다. 그 카페 주인이 살인 사건에라도 연루된 게 틀림없어 보였던 건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기관총으로 무장한 제복들은 세무서 직원이었고, 카페 주인의 탈세와 관련된 모종의 습격이었다.

나는 한국도 세무서원을 기관총으로 무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이 한 번이라도 텔레비전에서 세무서원이 상습 고액 체납자를 찾아가는 양심 뭔가 하는 프로그램을 봤으면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세무서원들이 양복 정장을 입고 으리으리한 체납자 집을 물어물어 찾아간다. 그러고는 겨우 "선생님게서는 탈세를 하시고 상습 체납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납수하시겠습니까. 물론 할부도 가능합니다."하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 광경을 보고 어떻게 분개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1쪽

그냥 기관총을 들이대고 "야 인마! 당장 세금 낼래, 아니면 배에다 총알구멍을 내줄까."하면 속 시원히 해결될 거라고 믿는 시민들이 대다수이지 않겠는가. -2쪽

이탈리아 남자들은 마치 모두 카사노바가 되지 않으면 남자 구실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그런데 그게 내 눈에는 좀 강박처럼 보인다. 카사노바의 후예답게 굴어, 이런 자기최면을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받는 사람들 같다. 콘돔만 해도 그렇다. 이탈리아의 콘돔 공장은 꽤 이문이 짭짤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거기엔 순전히 사람들이 무조건 사이즈가 큰 콘돔을 찾기 때문이라는 설, 또 하나는 쓰지도 않으면서 자꾸 동네 상점에서 콘돔을 사들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전자는 크기 콤플렉스이고, 후자는 횟수 콤플렉스일 것이다.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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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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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미드를 보다가 내가 주인공들이 일하는 모습을 강렬하게 동경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나는 내가 러브라인이나 해피엔딩이나 주인공들이 일하는 고층빌딩의 반짝이는 야경을 동경한다 생각했는데 미드 시청 10년 차에 그간 가장 열망하고 동경했던 건 사실 그들의 일하는 모습이었단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의 일하는 모습이란? 상사에게 쪼이고 밥벌이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범인과 달리 잘나가는 커리어우먼 전문직의 모습들. 좋아하는 일을 신나서 열정적으로 하고 엄청 많은 돈을 벌고 그리고 그 돈을 마음껏 쓰는 모습. 명장면 명대사를 꼽자면 '로맨틱 할리데이'에서 헐리우드의 일급 영화예고편 제작자인 카메론 디아즈가 자신의 작업물을 보여주며 자신만만하게 "That's why they pay me big bucks." 라고 말하는 컷. 내가 얼마나 중증으로 일하고 성취하는 캐릭터에 경도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런 내 모습에 대해 나는 문제의식은 커녕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거라 믿었다. 회사에서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을 하고 때때로 노트북을 들고 복도를 뛰어다니며 난 제대로 살고 있다는 근거없는 믿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병철은 이런 내가 병들었다 한다. 강제와 규제로 노동생산성을 최대로 올리던 이전 사회가 생산성 향상의 한계에 도달하자, yes we can 을 구호로 외치며 개인이 자신의 자아실현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착취하고 생산성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긍정성 과잉 사회가 도래하였고, 이 시대의 대표적 병리환자가 바로 나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결국 지친 개인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자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의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는데, 21세기 현대인들의 질병은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이며 그 이면에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그의 분석은 탁월하다. 요즘 쏟아지는 힐링이 어쩌고 하는 현대인 마음 위안용 책들은 한병철의 분석 앞에 껍데기뿐인 가짜로 전락할 뿐이다. 내가 나를 착취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일시적인 마음비우기는 절대로 해답이 되지 못할것이다.


문득. 무서워졌다. 늘 의심하고 진짜만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생각했는데 내가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니 내가 내 삶을 분별있게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달까. 그의 분석을 부인하기에는 우울증이며 소진증후근이며 경계성성격장애 등 그가 열거하는 병명들로부터 어느 하나 자유롭지 못하다. 나이가 들수록 분위기가 가라앉고 인상이 변하는 게 단순히 사회생활에 닳고 나이가 들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한병철의 말이 10배쯤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늘 독립적이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성인으로서 당연히 아무 말 없이 꾹 참아내어야 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것이 나에 대한 나의 착취임은 감히 상상도 못한 채..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수동성과는 정말 거리가 먼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유적과정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간다면 적어도 동물 특유의 느긋함이라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정확히 말해서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그는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지키는 것이 노동에 매몰되지 않고 나를 지키는 것이라 믿었는데 이 뒤통수. 이제 나를 어찌 다시 지켜내어야 할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다. 가슴이 아푸다.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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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01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두말없이 담아갑니다.^^
아주 좋은 책 같아요.
오늘은 시월 첫 날이네요. 올해도 석달 남았구요.
눈부시게 좋은 날이에요^^

... 2012-10-0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꽤나 공감하며 읽었던 책이예요. LAYLA님의 리뷰를 읽으며 또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네꼬 2012-11-1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댓글 달아요. 그리고 땡스툽니다요.

비로그인 2012-11-17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레이 아나토미'의 주인공들의 숨가쁜 삶을 동경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돌아보니,
20대 때 몸 담았던 정신없이 돌아가던 직장 생활,
그 시절은 가장 불행했던 시절이었거든요.
최근엔, 느리게 그리고 소박하게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예전의 중독생활을 미드를 통해 그리워 한 셈이었답니다.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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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노동을 통해 인류의 익명적 삶의 과정 속에 용해되어버릴 만큼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노동사회는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활동사회로 변모했다.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수동성과는 정말 거리가 먼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유적과정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간다면 적어도 동물 특유의 느긋함이라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정확히 말해서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그는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40쪽

오늘날 성과주체가 앓는 우울증 등의 질환은 이렇게 내면화된 타자와의 갈등관계 또는 양가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우울증에는 아예 타자의 차원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소진burn out은 자주 우울증으로 귀결되거니와 이때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오히려 과도한 긴장과 과부하로 파괴적 특성까지 나타내는 과잉 자기 관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긴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94쪽

우울증이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감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111쪽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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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위로
앤터니 스토 지음, 이순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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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형상을 찾던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다. 그 시기에 중요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융은 자기 분석 과정을 통해 청년의 임무는 가족에게서 벗어나 세상에서 자리를 잡고 자신의 차례가 되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인 반면, 중년의 임무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만의 특성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임을 확신했다. -32쪽

분석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태도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어긋나게 마련이며,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새롭게 적응을 해야 하기 대문이다. 한번 적응을 하면 끝까지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런 일은 결코 없다. ... 한 번의 심리 치료로 모든 어려움을 완전하게 없앤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어려움이 필요하다.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다. 다만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과도한 어려움이다. -41쪽

창조의 열정을 지닌 창의적인 사람은 영감을 얻는 단계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잊고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 온전히 그곳에 있으며, 현재의 당면 문제, 지금의 상황, 지금 여기에 완전히 열중하고 매혹되고 몰두한다.
... 현재에 몰두하는 능력은 모든 종류의 창조활동의 필수요소다. -47쪽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
좋은 본성과 너무도 오랫동안 떨어져 시들어가고,
일에 지치고, 쾌락에 진력이 났을 때,
고독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가. -49쪽

상상력은 인간의 그 어떤 능력보다 고유한 능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물도 꿈을 꾸고 유인원도 뭔가를 만들지만 아무리 영리한 원숭이라 해도 그 상상력이 인간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인간이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능력 때문에 우리 인간이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상상력 덕에 인간은 어떤 환경에든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만족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95쪽

혼자 있는 능력이 내향성의 표현이라기보다 안정감의 표시이듯, 과도기적 대상(담요.인형.곰)에 애착을 표현하는 능력은 박탈감이 아니라 건강함의 신호다. 사람에 대한 애착을 형성하는 능력이 훼손되었을 수도 있는 보호시설 아이들이 귀여운 장난감에 대해서도 좀처럼 애착을 보이지 않는다는 관찰 결과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107쪽

창의적인 사람들은 마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이 그들에게서 사라져버린 것만 같은 절망의 시간을 종종 경험한다. 어떤 대상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것과 노는 일이 이제는 불가능해질 때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된다. 기번의 표현대로 "작가의 허영심"이라는 것 때문에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지나치리만큼 진지하게 대한 나머지, 그것을 가지고 '노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있다.

자신의 내면 세계만을 강조하며 외부의 현실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미쳤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위니콧이 지적하듯, 외부의 현실에 지나치게 순종하면서 자신의 내면 세계를 억압하는 사람도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외부 세계를 자신이 주체적으로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닌 오직 적응해야 하는 곳으로만 여긴다면, 그의 개인성은 사라지며 삶은 무의미하고 무익해진다. -110쪽

화가든 조각가든 음악가든 소설가든, 예술가의 역할이 통념을 표현함으로써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이었던 사회에서 예술가의 재주는 평가를 받았지만 개성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예술가에게 독창성을 보여주기를, 그리고 예술가가 창조하는 작품에 그만의 확실한 자취가 있기를 바란다. 진짜 티치아노의 작품을 보면서 감탄하다가도, 어떤 미술사학자가 그것은 복제품에 불과하다고 하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본체만체한다. 예술은 곧 개인의 표현이 되었고, 예술가에게 작품은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었다.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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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애의 모든 것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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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모습이 없다. 대신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로써 바람의 모습을 본다. 시간은 모습이 없다. 대신 시간에 흘러가는 것들로써 시간의모습을 본다. -13쪽

닭이 일을 까듯 새끼를 낳던 원시인들은 안 그랬는데 현대인은 자식이 생기면 무조건 겁쟁이가 된다. 자식을 보살피는 것에 한해서만 용감해지고 다른 모든 면에서는 무한대로 겁쟁이가 되는 것이다.-18쪽

잭슨 폴록을 유명하게 한 일련의 추상화들은 찬사와 조롱을 동시에 받았다. 조작된 경우가 아니라면 진정한 천재는 항상 천재와 사기꾼 사이를 오가며 온갖 의심과 오해 속에서 꽃핀다. 누군가 진짜라면 지구의 반 이상은 그의 적인 것이다. 삶의 당파성 없이 칭찬이 자자한 자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 다 가짜다. -23쪽

증오와 혐오의 차이는 뭘까? 열등감이 있는 자는 증오하고 우월한 자는 혐오한다. -47쪽

집착하니까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니까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첫눈에 반한다? 얼마나 이기적이면 첫눈에 반하겠는가. -122쪽

문을 부수는 게 천성이자 운명인 사람들이 있다. 우연히 손에 닿으면 무언가가 부서지는 사람들. 그 문은 한 체제일 수도 있고 한 시대일 수도 있으며 하나의 거대한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그는 혁명가일 수도 있고 예술가일 수도 있으며 모든 이들을 대신해 시험 받는 자일 수도 있다. 무론 그 문은 문을 넘어서는 어떤 관념적인 실체가 아니라 진짜 철문이거나 나무 문일 수도 있고 그는 그저 성질이 고약한 친구이거나 심심하지 않은 적일 수도 있다. 하여간 그 문이 무엇이건 간에, 문 앞에 서 있는 그가 누구이건 간에, 그에게 문은 우연일까 운명일까. 우연이 다가와 운명처럼 부서지는 것일까. 운명이 다가와 우연히 부서지는 것일까. 오소영이 얼마나 문을 세게 밀어붙이고 나가 버렸는지 주석 경첩이 헐거워져 문짝이 덜렁인다. 그리고 번개의 잔영과 천둥의 여운이 뒤에 남은 정적을 휘감고 있다. 닫힌 문은 부서지면 길이 된다.-152쪽

삶은 어이가 없고 짧으나 술은 달다.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사막이요 술은 꽃이라고. 신은 질문하지 않는다. 인간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다. -154쪽

스탕달은 이렇게 말했다. 연애는 열병과 같은 것이어서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결국 나이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게 있어 연애는 항상 최대의 사업이었다. 아니 유일한 사업이었다, 라고.-202쪽

"너희는 왜 절망을 안 하냐?"
"네?"
"왜 자살을 안 하냐?"
"뭐야, 이 사람?"
"네 책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안다고 다 아는 게 아니다, 뭐 그런 거."
"왜 이러는 거요?"
"작가는 대신 절망해 주는 사람이야. 근데 너희들을 가만 보면 참 존나 건강해. 풍자를 못하면 자살이라도 좀 해 봐라. 외국 작가들 노벨 문학상을 타고서도 자살 많이들 했어. 왜? 절망했으니까. 절망할 줄 알았으니까. 딴따라들도 하는 자살을 작가란 놈들이 글도 못 쓰면서 왜 안 할까? 석연치가 않아. 살아 있는 거야 좋은 거지. 훌륭한 거지. 하지만 내 눈엔 너희들이 절망을 극복해서 살아 있는 놈들로 보이질 않아. 밖으로는 뻔한 사기를 뻔뻔하게 치고 밀실 안에서는 오방 주접들을 떨면서 난교 파티를 벌이고 있는 게 분명해. 으이그."-261쪽

이성을 잃었다고? 웃기지 말라 그래. 교활한 자들은 교활한 해석밖에는 내리지 못한다.-267쪽

시월의 소녀
-전봉건

내가 사랑하는 소녀가 숨은 사과
한 입 깨물면
나의 소녀는 꽃다발 되어 뛰어나올 거다

새까만 사과 씨는 보석처럼
굴러서 대지에 숨을 거둔다.

시월의
소녀는
사과 속에
숨어 있다. -269쪽

인생은 가볍다. 진지하면 죄가 될 만큼 가볍다.-278쪽

인생은 운명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우연을 닮은 운명이 인간을 농락한다.-292쪽

사랑이 변하지 않을 수는 없다. 중요한 건 그 사랑의 어려움 속에서도 내 인생은 무엇을 모색하였는가,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녀가 그를 버렸어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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