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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얼마전 미드를 보다가 내가 주인공들이 일하는 모습을 강렬하게 동경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나는 내가 러브라인이나 해피엔딩이나 주인공들이 일하는 고층빌딩의 반짝이는 야경을 동경한다 생각했는데 미드 시청 10년 차에 그간 가장 열망하고 동경했던 건 사실 그들의 일하는 모습이었단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의 일하는 모습이란? 상사에게 쪼이고 밥벌이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범인과 달리 잘나가는 커리어우먼 전문직의 모습들. 좋아하는 일을 신나서 열정적으로 하고 엄청 많은 돈을 벌고 그리고 그 돈을 마음껏 쓰는 모습. 명장면 명대사를 꼽자면 '로맨틱 할리데이'에서 헐리우드의 일급 영화예고편 제작자인 카메론 디아즈가 자신의 작업물을 보여주며 자신만만하게 "That's why they pay me big bucks." 라고 말하는 컷. 내가 얼마나 중증으로 일하고 성취하는 캐릭터에 경도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런 내 모습에 대해 나는 문제의식은 커녕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거라 믿었다. 회사에서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을 하고 때때로 노트북을 들고 복도를 뛰어다니며 난 제대로 살고 있다는 근거없는 믿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병철은 이런 내가 병들었다 한다. 강제와 규제로 노동생산성을 최대로 올리던 이전 사회가 생산성 향상의 한계에 도달하자, yes we can 을 구호로 외치며 개인이 자신의 자아실현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착취하고 생산성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긍정성 과잉 사회가 도래하였고, 이 시대의 대표적 병리환자가 바로 나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결국 지친 개인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자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의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는데, 21세기 현대인들의 질병은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이며 그 이면에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그의 분석은 탁월하다. 요즘 쏟아지는 힐링이 어쩌고 하는 현대인 마음 위안용 책들은 한병철의 분석 앞에 껍데기뿐인 가짜로 전락할 뿐이다. 내가 나를 착취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일시적인 마음비우기는 절대로 해답이 되지 못할것이다.
문득. 무서워졌다. 늘 의심하고 진짜만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생각했는데 내가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니 내가 내 삶을 분별있게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달까. 그의 분석을 부인하기에는 우울증이며 소진증후근이며 경계성성격장애 등 그가 열거하는 병명들로부터 어느 하나 자유롭지 못하다. 나이가 들수록 분위기가 가라앉고 인상이 변하는 게 단순히 사회생활에 닳고 나이가 들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한병철의 말이 10배쯤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늘 독립적이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성인으로서 당연히 아무 말 없이 꾹 참아내어야 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것이 나에 대한 나의 착취임은 감히 상상도 못한 채..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수동성과는 정말 거리가 먼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유적과정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간다면 적어도 동물 특유의 느긋함이라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정확히 말해서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그는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지키는 것이 노동에 매몰되지 않고 나를 지키는 것이라 믿었는데 이 뒤통수. 이제 나를 어찌 다시 지켜내어야 할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다. 가슴이 아푸다.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