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소설 - 하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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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남녀사이라는 것은 묘한 것이라, 할머니는 자신이 다로 군을 보호한다고 생각하시면서도 이미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다로 군에게 의지하며 남다르게 뛰어나느 자질을 마치 애인처럼 든든하게 생각하고 계시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아직 당신보다 키가 작은 다로 군을 우러러보는 듯한 어조로 말씀하셨죠.

지금이 난세라면 너는 대장감인데.

이혼하고 나자 겨우 세상에 대한 의리를 다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상처보다도, 이제 자유로이 살게 되었다는 해방감이 더 컸습니다.

누가 뭐래도 엄마가 한가한 것은 좋지 않아. 지금까지 내버려둔 주제에 갑자기 간섭하고 난리라니까.

말투만은 건방지게 어른스러웠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안색이 나쁘고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어린애 같은 여자아이였습니다. 다로군도 다로 군대로 불쌍하지만, 눈앞의 이런 철없는 여자아이가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혜택받은 미래를 앞두고 벌써부터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것도 또 그 나름대로 가여웠습니다.

말다툼이 매일 계속되기 시작한 것은, 요코 아가씨가 삿포로에 돌아가고 한 달 정도 지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로군이, 미국에 가고 싶다. 아니 미국이든 브라질이든 일본인이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다, 무조건 외국에 가고 싶다 라고 말을 꺼냈던 것입니다.

...자신은 우타가와 가에 출입하는 동안 완전히 그 분위기에 물들어 대학을 나와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일본에서 나 같은 출신의 사람이 제대로 된 길을 걸으려고 하면 어떻게 남처럼 제대로 된 인생을 보낼 수 있을까가 최종목적이 되어 버린다. 남만큼 되는 것이 최종목적인 인생은 걷고 싶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술은 안 마셔?
-끊었어.
-언제부터?
-태평양 한복판에서.
-십오 년 전의 얘기야?
-응
-그때부터 안 마셨어? 정말?
-응. 한 방울도 안 마셨어.
-하긴, 반년 사이에 평생 마실 양을 마셨으니. 반성했나보네.

내 아파트에 굴러들어와 술에 찌들어 있던 육 개월이 부끄러워서 마시지 않은 것이라면, 그 육 개월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나날인 걸까? 그 육 개월은 없었던 것으로 해버리고 싶은 걸까? 나의 비아냥거림을 감지한 다로 군은 고집을 부리는 건지 여전히 메뉴를 뒤적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사는 데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다시 마시려고 해.

일본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가난해졌다는 그런 말을 들으면 말이야, 농담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 하다못해 물질적으로라도 풍족해지면 좋을 텐데. 돈이 남아도는 만큼 온 일본에 더러운 것이 넘쳐흐르게 된 것뿐이야.

요코 아가씨가 열심히 마사유키 씨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마사유키 씨가 온화한 외관과 달리 무척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 아내의 애인에게 공평하려고 노력한 나머지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평을 스스로 배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사유키 씨의 그런 부분이 세 사람의 관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희미하게나마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나와. 바그너의 오페라를 공부하고 있을 때 읽었는데, 거기 `작은 사람들`이라는 게 나오거든. 원래도 작은데 점점 더 작아지고, 점점 더 안일해지다가, 끝내 멸망해버릴 운명에 처한 사람들. 하루에 언니는 있지, 역시 자기 손자니까 최종적으로는 부정하고 싶지 않은 거야. 성격이 좋다느니 마음이 따뜻하다느니 하면서 감싸주거든. 공부도 못하고 패기도 없는 아이들인데 말이야. 하기야 공부는 잘한다 해도 다들 패기가 없으니까, 결국은 마찬가지 이야기지만. 어쨌든 모두 경박해.

-그렇지만, 이상하게 죽으면 안 돼. 너무 슬프니까. 참 좋은 인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죽음이어야 해.
-이런 게 좋은 인생이었다고?
-그렇지만, 사실이잖아. 최고였잖아. 이 이상은 있을 수 없잖아.
- 이 이상은 있을 수 없었다고? 그렇지 않아! 그렇지만 요코는 나랑 결혼해주지 않았잖아. 나를 상대로는 싫다고 했어. 나 따위와 결혼하면 남들한테 부끄러워서 죽어버리겠다고 했어.
-다로,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구나.
-계속 원망하고 있었어. 요코는 나같이 태생이 나쁜 인간의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모를 거야. 절대 몰라.
-몰라도 괜찮아.
-늘 죽이고 싶다고 생각해왔어.
-언제부터? 내가 그런 심한 말을 해서?
-아니.
-훨씬 전부터?
-응
-그럼 어렸을 때부터?
-응. 치토세후나바시의 정원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래....나는 계속 무서웠어. 어릴 때부터 계속 무서웠어. 다로 군과 둘이서 있으면 세상이 자꾸 멀어지는 것 같고, 우리만 자꾸자꾸 다른 사람들한테서 멀어져버리는 것 같아서 무서웠어.
-계속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어. 죽여버렸으면 좋았을 걸.


둘이 각자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버린 듯, 한참 동안 다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요코 아가씨가 갑자기 작게 소리쳤습니다.

-아아, 너무 행복해.

다로 군 팔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조금 상체를 일으키고는, 다로 군 얼굴을 아래에서 올려다봅니다.

-내가 죽어도, 계속 죽이고 싶다고 생각해야 해.
-내가 죽어도, 죽이고 싶을 거야.
-아아, 난 얼마나 행복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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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양품은 90%가 구조다 - 노력을 성과로 직결시키는 구조의 힘
마쓰이 타다미쓰 지음, 민경욱 옮김 / 푸른숲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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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회의 자리에서 논쟁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에서는 사원들이 열심히 논쟁을 벌여 방향성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방향은 위에서 결정하고 방향이 결정되면 사원들이 실행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도록 몸을 가볍게 해둬야 합니다.

점포를 수없이 찾아가 사원들의 의견을 직접 들었습니다.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문제점을 발견한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어떤 기업이나 하는 일이죠. 문제는 그것을 해결하는 실행력입니다. 문제점을 찾은 뒤, 이번에는 그런 문제를 낳은 구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반드시 어딘가에 그 문제를 만드는 구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경기가 나빠졌기 때문에`, `사원의 의욕이 부족해서`와 같은 막연한 이유로 문제가 일어나진 않습니다. 그 정도에서 문제 찾기를 그만두는 것은 사고 정지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적성을 파악할 때도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은 기본입니다. 무인양품에서는 `커리파`라는 성격 판단 툴을 사용해 사원들의 적성을 판단합니다. 지나치게 시스템에 의존하는 게 아닐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직속 상사의 판단에만 맡기면 호불호의 감정이 개입되어 냉정한 판단이 불가능해집니다.

무인양품에는 일곱 개의 아울렛에 점포가 있었습니다. 저는 매년 하나씩 폐쇄해 사장 티임 때까지 세 곳으로 줄였습니다.
...무인양품에서는 이 방법(아울렛)에 의존하지 않고 시즌 중에 모두 파는 구조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봄에는 오키나와부터 제품을 투입하고 가을에는 홋카이도부터 투입합니다. 의복 잡화의 물류비는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드어 사가 지역의 가게에서는 판매가 부진한 봄 상품을 신주쿠 점포로 이동시킵니다. 이처럼 장소를 바꾸기만 해도 주력 판매 상품을 만들 수 잇습니다. 중요한 상품은 인터넷을 통해 먼저 판매하면 판매 동향을 미리 파악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경영자를 비롯한 부장, 과장 등 관리자는 부하 직원이 `무조건 열심히`노력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래서는 생산성은 오르지 않고 효율화는 도모되지 않습니다. 애써 노력하는 본인도 좋을 리 없겠죠. 리더는 `노력하면 성과를 내는 구조`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인양품은 우선 `오후 늦게는 새 업무를 맡기지 않는다`는 룰을 만들었습니다.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작성하는 데 두 시간 걸리는 자료를 만들라고 오후 5시쯤 지시하면 당연히 야근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상사만이 아니라 다른 부서에 일을 의뢰하는 것도 이른 오전 시간에 끝내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업무를 요청하는 쪽도 데드라인을 재빨리 역산해 일을 할당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무인양품에서 채택했던 다양한 구조 만들기에 대해 소개했지만, 어떤 구조도 10년 이상 지속되진 않습니다. ...저는 무인양품 워크숍 등에서 이 책에서 얘기했던 것을 사원들에게도 되풀이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 물어보면 98퍼센트 정도의 사람이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 사원에게 의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개선을 해도 금방 원상태로 돌아갑니다.

이 정도는 말로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것까지 명문화해야 합니다.

초조해하지 말고, 머무르지 말고, 자만하지 말고

`막번뇌`
이 말은 제가 사장에 막 취임했을 때 수첩에 적어놓은 단어입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집권 세력인 호조 도키무네는 원나라의 침략을 당해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원나라의 두번째 침략 전, 그가 겐초지 라는 절을 방문해 무가쿠조겐 대사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대사는 종이에 이 단어를 적어 도키무네에게 건넸다고 합니다.
`번뇌하지 마라. 망설임 없이, 고민 없이 그저 눈앞에 있는 일에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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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앤디파트먼트에서 배운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전하는 가게> 만드는 법 - 배우고, 먹으면서 배우는 가게
나가오카 겐메이 지음, 허보윤 옮김 / Epigram(에피그람)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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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안 좋으면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에도 질적 변화가 생깁니다. `제대로 된` 물건을 사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이지요.

옛날에 한 유명 디자이너는 "자신의 명성으로 물건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상품에 디자이너의 이름을 붙여 판매하는 것은, 상품을 본래의 생활용품으로 대하지 않고, 디자이너의 명성이라는 가치를 담은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일이므로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속하기`는 제작자가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물건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금방 단종될 것이 분명하다면 롱 라이프 디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단명할 물건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물건과 함께 긴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가지 추억을 쌓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작자가 계속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 물건은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입니다.

돈이 많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팽배한 세상이다 보니 일단 많이 파는 것이 모든 일의 대전제입니다. 장사치든 정치가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거래든 사업이든 파는 행위의 최전선은 바로 파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판매하는 곳에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당신에게는 팔지 않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고, 그래서 무엇이든 돈만 지불하면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린다면, 사회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극단적인 말이었지만 매장의 자세가 그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저희 가게도 이익을 우선시하지는 않지만, 이익에 대해 냉철하게 생각합니다. 롱 라이프 물건을 팔면서 가게가 롱 라이프 하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대단한 돈벌이가 안 된다고 해도 유지는 할 수 있는 수준이면 괜찮아요. 그러나 적자인 채 재고만 쌓여간다면 가게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저는 매장이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하는 가게`에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매력이 있는 공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수적입니다. 적자냐 아니냐의 여부는 가게 규모와 그다지 상관없습니다. 가게 규모가 작아도 얼마든지 적자가 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생활용품점의 현실은 참담합니다. 생활용품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잡화를 팔면서 `라이프스타일 스토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싸면 그만인 유행품과 잡화 체인점에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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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 개정판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1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육후연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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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아, 사람의 삶에는 기뻐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등 다양한 감정이 있지만, 그것은 사람의 생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서 나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으로 기다리다 젖어드는 허무함. 아, 사람의 삶은 정말 비참합니다.

나 역시 로제 룩셈부르크의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가 메스껍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깊은 흥미를 느꼈다. 이 책은 경제학에 관한 내용이지만 경제학 차원에서 읽으면 지겨울 따름이다. 정말 단순하고 뻔한 내용뿐이다. 아니, 어쩌면 경제학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너무 따분하다. 사람은 원래가 인색한 존재여서 영원히 인색하다고 하는 전제가 아니면 전혀 성립되지 않는 학문이 경제학인데, 인색한 사람에게는 분배니 뭐니 전혀 흥미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다른 부분에서 묘한 흥미를 느꼈다. 가차없이 낡은 사상을 모조리 파괴해 가는 저자의 저돌적인 용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도덕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태연하게 지체없이 달려가는 유부녀의 모습마저 떠오른다. ...로쟈는 마르크시즘에 대해 일편단심의 슬픈 사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쑥스럽기 그지없는 부탁 하나 드릴게요. 어머니의 유품인 삼베 기모노. 그걸 누나가 내년 여름에 나 입으라고 손질해 주었죠. 그 옷을 내 관에 넣어 주세요. 나 입고 싶었습니다. 동녘에 밝아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안녕. 어젯밤의 취기는 완전히 가셨습니다. 나는 말짱한 정신으로 죽습니다. 한 번 더, 안녕.


누나.
난 귀족입니다.

전 애초부터 당신의 인격이나 책임감에 기대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저의 일편단심 사랑의 모험을 성취하는 것만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저의 그 소원이 이루어져 제 마음은 숲속의 늪처럼 고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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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뿔(웅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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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이 여행을 떠난다고 믿었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려면 삼천 년이 걸리는데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어야 영혼이 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 정도로 보존에 신경을 쓰진 않아요."

나는 다시 아이들이 오기 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아침을 하는 대신 나는 매일 아침 이탤리언델리에 가서 갓 구운 롤빵과 거피를 사마셨다. 집안일에서 이렇게 멀어졌다는 사실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하지만 전에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치 창가의 의자나 보도의 옥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런 곳에 와서 아침을 먹는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와 기쁨 대신 지루하게 반복되는 외로운 삶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익숙한 삶을 버리고 나오기가 쉽지 않았어.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지만, 치러야 할 대가겠지. 남자와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는 중이야. 섹스에 대해 편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쉽지는 않지. 워낙 그렇게 살았던 게 아니니까. 젊지도 않은데 새로 뭔가를 배운다는 게 쉽지 않아.

우리가 다시 만났더라도 옛날과 다른 뭔가가 시작되진 않았을 것이다. 혹 만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의 자리를 알고 있는, 드러낼 수 없는 사랑만이 제자리에서(누군가는 바보 같은 결말로 이어지거나 쓸쓸하게 감정이 식고 말 것이 두려워 승부수를 두지 않는 이런 사랑을 두고, 진짜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달콤한 실개천이나 지하의 암반수처럼 계속 살아남는 것이다. 그 위를 덮은 이새로운 정적과 봉인의 무게를 안은 채 그 어떤 모험도 무릅쓰지 않고.

그녀는 제자리에서 온갖 가능성들을 다 생각해 보았다.

책 읽기는 이제 그만두자.
불우한 가정이나 가난한 나라에서 애들을 입양해다 아이들의 상처와 ㅕㄹ핍을 보듬으며 시간을 보내볼까.
교회에 가서 신앙을 키워볼까. ...

침대에 앉은 채 그녀는 이 모든 생뚱맞은 공상들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아마 지금처럼 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온당하고 상식적인 거래일 터이다. 사실 그 거래는 이미 진행되고 있기도 했다. 이미 일어날 일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 역시 선명하게 인식하자. 날이 가고 해가 갈테고, 비슷비슷한 감정들이 반복되겠지. 아이들이 자라나고, 아이들이 한두 명 더 태어나고, 그 아이들 역시 자라버리고 나서, 그녀와 브렌던은 해마다 나이 먹고 늙어갈 것이다.


전에는 한 번도 자신이 장차 일어날 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미래에 이렇게나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결혼이 큰 변화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최종적인, 마지막 변화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 혹은 그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게 자신의 행복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자신이 한 거래의 대가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스러울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전혀 없는 그런 삶의 전망.

이 삶에 집중하자. 그녀는 생각했다. 갑자기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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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5-03-22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이 문장때문에 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군요.
아주 따뜻한 봄날입니다.

LAYLA 2015-03-23 01:58   좋아요 0 | URL
살아본 언니가 쓴 책의 내공이 있더군요 :)

다락방 2015-03-22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네번째 인용문 때문에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방금 검색해보니 중고 있길래 주문했어요 ㅋㅋㅋㅋㅋ

LAYLA 2015-03-23 01:5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좋아하실 거 같아요. 올리브 키터리지를 다 읽지 않았는데(망할 크레마) 올리브 키터리지랑 느낌 비슷했거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