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젊고 화려했던 시절 불꽃같은 사랑의 감정에 휩싸였던 사모님과 젊은 청년은 사천번의 낮과 사천번의 밤을 흘려보낸 다음 가까스로 다시 재회하게 된다. 처음엔 예의를 차리지만 두 사람 사이에 예전의 그 불길이 다시 붙었다고 생각하고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 위해 기차를 타고 교외의 호텔에 부부인척 체크인을 하지만, 갓 청소가 끝난 객실에 아직 남아있는 이전 손님의 체취를 느끼는 순간 둘의 애틋했던 감정은 이미 과거의 것임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보편적 경험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남녀들이 모텔의 싸구려 음료수나 허름한 여인숙의 때에 찌든 이불깃을 보며 소설 속 주인공들과 똑같은 기분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홍상수 식으로 적나라하고 민망하게 그려지던 것들을 슈테판 츠바이크는 아름답고 고상하게 그려내다. 이런 소재가 이렇게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힘. 단순히 모텔 음료수와 코오롱 냄새의 소품 차이는 아닐 것이다. 남루한 순간에 은은한 빛을 부여하는 작가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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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6-03-0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사놓고 아직 못 봤네요. 지금 저는 같은 작가의 `어제의 세계`를 읽고 있습니다. 자서전과 비슷한데요, 츠바이크의 결말을 알기 떄문인지, 서글프고 슬픈 부분들이 자주 눈에 들어오네요.

LAYLA 2016-03-01 10:34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책도 있군요. 전 슬퍼서 보지 못할거 같아요 ... ㅠㅠ
 
어떤 여자 대산세계문학총서 91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김옥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20세기 초 상류층의 이혼녀가 미국에 있는 약혼자와 결혼하기 위해 미국행 여객선을 탔다가 그 여객선의 유부남 사무장과 사랑에 빠져 미국에서 내려보지도 않고 그대로 일본으로 돌아온다. 이 책의 반은 여주인공 요코가 어떻게 유부남 사무장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를 그리고 있고 나머지 반은 요코가 어떻게 타락하고 미쳐 죽어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망한' 작품이라는 찬사에 참 많은 기대를 했는데 여주인공이 시대를 앞서가는 건 맞긴 했지만 그 시대를 앞서간 여주인공에게 선사하는 결말이 문자 그대로 '미쳐' 정신착란으로 죽는 것이라니. 유부녀의 불륜에 분노한 도쿄시민들이 요코하마 항에 나와 배에서 내리는 그녀를 돌로 쳐 죽였답니다. 와 별반 다르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려고 장장 500쪽이나 읽게 하였나 싶어 허무하였다. 캐릭터는 살아있고 문장도 좋다.


요코는 대부분의 경우 약자의 편을 들었다. 어떤 경우든 강자가 자신의 힘을 휘둘러 약자를 압박하는 것을 보면, 요코는 화가 치밀어 어떻게 해서든 약자를 이기게 해주고 싶었다. ...젊은, 세련된 외모, 부유한 환경, 뛰어난 재능과 같은 것을 바탕으로 한 남자들의 매력은 사무장 앞에서는 훅 불면 날아가는 먼지처럼 맥을 못 추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약한 자는 불쌍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약한 자는 불쌍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맹목이 한 문장에 담겨있다. 그래 맞다. 자신은 시대를 잘 못 타고 났다며, 싹수가 보이지 않는 남자와는 두 달만 살다 헤어져 버리고 그 남자의 아이는 자기 혼자 몰래 낳아 숨겨놓고 기르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요코라는 캐릭터가 사랑에 빠진다면 저런 남자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멋진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서 유부남 꼬셔 첩이 된 난 년이 사랑에 함몰되어 인생을 망쳐버린다는 교회 목사님 같은 소리나 하고 있다니 열불 터지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이디스 워튼의 '기쁨의 집'과 '그 지방의 관습'이 많이 떠올랐다. 둘 다 상류층 아가씨가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치며 (다양한 의미로) 타락해간다는 이야기이다. 겉으로 플롯만 보자면 어떤 여자와 비슷한 동류의 작품들 같지만 여성 독자로서 내가 느끼기에는 여성작가와 남성작가의 차이가 많이 난다. 이디스 워튼의 작품은 개성 있는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보수적 사회의 억압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다 발을 헛디디며 타락해가는 과정을 빈틈없이 촘촘히 그려낸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시선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고 캐릭터는 자신의 개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내딛는 한 발 한 발에는 캐릭터의 즉흥성이 아니라 현실의 무게가 실려 있어서 소설의 흐름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여성독자들은 무려 백여년 전에 쓰여진 이디스 워튼을 읽으며서도 저 여자들의 불행과 타락이 남의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 내가 저 처지에 처했더라도 똑같이 저 바닥으로 굴렀을 것이란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여자의 요코는 아리시마 다케오가 남성의 시각으로 창조한 인물이라 여자독자에게도 타자로만 느껴진다. 인공의 냄새가 나며,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은 더더욱 인공적이다. 요코가 스스로 죄를 짓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야기라면 이해가 가겠지만 자신이 유혹한 남자와 짧은 행복을 누린 뒤 정신착란과 건강악화등 연이은 불운으로 인생 종친다는 이야기를 보며 '나쁜 짓 하면 호랑이가 잡아간다 어흥' 보다 더 높은 차원의 메시지를 얻어내기란 어려워 보인다.

 

소설의 문장이나 흐름은 아마추어 티가 나지 않는 준수한 작품이지만 소설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 하는 부분에서는 용두사미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여주인공이 세상의 박해를 받아 좌절하고 만다는 이야기에 담긴 슬픔과 비극성을 작가는 1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그냥 자기가 그리고 싶은 섹시한 여자, 미친 여자를 그리고 싶었던 것일 뿐 (스스로 자신이 요코같은 여자를 가장 싫어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끌린다는 말을 했다) 실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자의 삶에 담긴 진실이 이 소설엔 함량미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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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 대산세계문학총서 91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김옥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요령껏 꾸려나가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이지만, 부족한 것이 많은 세 자매의 옷가지와 살림살이가 조금 남았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모는 염치도 없이 그런 것까지 탐을 내는 것이다. 백지와도 같은 덧없는 외로움과, `알거지가 될 바에는 아주 깨끗한 알거지가 되어주지` 하는 불같은 반항심이 사정없이 요코의 가슴을 태웠다 식혔다 했다.

요코는 남을 비웃으면서, 또한 스스로를 경멸하면서, 정체불명의 커다란 힘에 이끌려 불가사의한 길로 어느 틈에 들어서서 끝내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요코가 갈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도 없었으며, 다른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어쩌다 큰 소리로 불러 세우는 사람이 있다 해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속임수를 써서 고리타분한 여인네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런 심정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요코는 물론 몇 번씩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혼자서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내야만 했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다 스물다섯이 된 지금, 문득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요코와 함께 달리던 소녀들은 오래전에 이미 평범한 여자가 되어 까마득히 먼 곳에서 동정하는 듯한, 혹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요코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코는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설령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도 하나님의 뜻인지 뭔지에 따라 제멋대로 사는 여자이니까, 아저씨와는 부딪칠 수밖에 없죠. 그래도 남자는 괜찮아요, 그런 아집이 통하니까. 여자들은 아집을 관철시키려면 기를 써야만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따름이죠. 이 모든 것이 전생의 업이라는 거겠지요.

요코는 대부분의 경우 약자의 편을 들었다. 어떤 경우든 강자가 자신의 힘을 휘둘러 약자를 압박하는 것을 보면, 요코는 화가 치밀어 어떻게 해서든 약자를 이기게 해주고 싶었다. 지금 같은 경우 기무라는 단순한 약자일뿐 아니라 처지 또한 비참할 정도로 의지할 데 없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기무라에 대해서는 동정심이 일지 않았다. 젊은, 세련된 외모, 부유한 환경, 뛰어난 재능과 같은 것을 바탕으로 한 남자들의 매력은 사무장 앞에서는 훅 불면 날아가는 먼지처럼 맥을 못 추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약한 자는 불쌍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약간 떨리는 듯한, 전혀 때 묻지 않은 목소리로 낮고 차분하게 말하는 오카의 모습에는 자연스럽고 기품 있는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장지문을 흔들며 눈발이 휘몰아치는 문밖의 거친 자연의 풍경과 비교되어 그 모습은 더욱더 도드라져 보였다.

잠시 침묵한 뒤에, 오카는 당혹스러운 듯이 쓸쓸히 혼잣말을 하더니 또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오카는 아무리 쓸쓸해 보이는 때에도 좀처럼 울지 않았다. 그런 점이 그를 더욱 쓸쓸하게 보이게 했다.

요코는 오카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지금까지 자기한테서 빠져나갔던 힘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역경에 처한 여자에게 있어서 어떤 남자든 남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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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야상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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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문장으로는 그리 난해하지 않지만 전체적인 흐름으로 봐서는 꽤 난해한 작품이다. 마지막까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점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든, 소설의 화자와 함께 인도를 여행하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웠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반세기쯤 전의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한 친구를 찾기 위해 인도의 이 곳과 저 곳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데, 그가 어느 지명 하나만 던져도 나는 그와 관련된 기억을 공감각적으로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수준이라 이 목적없는 소설의 흐름에 즐겁게 동참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이다. 


"케이지 지구는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어느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들에서 그곳을 본 적이 있었기에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직면할 준비야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진은 어디까지나 피사체를 정방형에 가둬둔 것이다. 프레임 바깥의 피사체는 언제나 또다른 무엇이다. 게다가 그 피사체는 너무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 너무나 많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 문장을 보고서는 길거리의 소똥 냄새, 갠지스 강둑의 시체 타는 냄새, 노점에서 기름에 무언가를 튀겨내는 냄새, 도로의 툭툭이 뿜어내는 매연 냄새, 사원에서 흘러나오는 향 냄새를 순식간에 기억해내는 그런 것. 독자들은 세밀한 묘사가 아니라 작가의 통찰이 담긴 짧막한 단어 혹은 상황으로 그동안 묻어두었던 오랜 추억을 꺼내게 된다. 고작 백 페이지의 짧은 소설을 읽고서 인도 남부를 한바퀴 돈 것만 같은 상념에 잠기게 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인도의 샤워헤드가 떨어져 나간 샤워기와 호화로운 따즈호텔, 길을 달리다 갑자기 서 버리는 버스가 무엇인지 아는 독자들에겐 뼛속까지 와닿을 작품. 하지만 보통의 소설들처럼 서사가 독자의 손목을 잡아 작품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아주 조심스럽게 아무도 모르는 숲 속을 헤쳐나가는 느낌으로 스스로 한 발 한 발 내딛어 읽어 나가야 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인도를 여행한 경험이 전혀 없는 독자들에게는 조금 힘이 들수도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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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2-03-17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라님 인도에 다녀오신 적이 있으시군요. 저는 인도는 뉴스나 영화에서만 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프레임 바깥의 지독한 냄새. 책을 읽으면서 제게도 기억에 오래 남은 묘사인데 프레임 바깥의 끔찍함을 상상하며 읽었지만 레이라님의 생생한 기억과 함께 다시 보니 아마도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말씀 같습니다. ㅎㅎ

LAYLA 2022-03-20 18:5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북깨비님
제가 다녀온지도 벌써 십년이 지나 그 사이 인도가 많이 변했을거 같아요. 지긋지긋한 혼란스러움의 나라였지만 그 혼란스러움이 십년동안 정돈되었을거라 생각하면 아쉬워요.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하고 그래서 올해 연말에는 인도에 가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답니다. 이 책은 읽은지 오래되어 잊고 있었는데 북깨비님 댓글을 보고 인도에 가기 전에 한 번 다시 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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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꿈에서조차 그를 온통 사로잡은 이 감정이 절대적인 열정이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를 뒤흔들어놓을 만한 결정적인 계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는 행위였다. 그는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그 감정을 감탄, 경외심, 애착 따위의 이름을 덧씌워 부르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것이 미친 듯 날뛰는 절체절명의 열정적 사랑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열정이 지탱하던 긴장감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식물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는 자기 고유의 색을 유지하고, 꽃과 줄기가 시들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땅속의 새로운 자양분과 하늘의 새로운 빛이 필요하다. 하물며 인간의 꿈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언뜻 보기에 지상의 것이 아닌 듯한 꿈조차도 현실적인 감각에서 양분을 얻어야 하고,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징표의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추억의 잎도, 열매도 메말라버리게 마련이다.

인간은 대부분 감정이나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만, 동물은 말을 할 수 없기에 모든 감정 표현을 동공에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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