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 대산세계문학총서 91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김옥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20세기 초 상류층의 이혼녀가 미국에 있는 약혼자와 결혼하기 위해 미국행 여객선을 탔다가 그 여객선의 유부남 사무장과 사랑에 빠져 미국에서 내려보지도 않고 그대로 일본으로 돌아온다. 이 책의 반은 여주인공 요코가 어떻게 유부남 사무장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를 그리고 있고 나머지 반은 요코가 어떻게 타락하고 미쳐 죽어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망한' 작품이라는 찬사에 참 많은 기대를 했는데 여주인공이 시대를 앞서가는 건 맞긴 했지만 그 시대를 앞서간 여주인공에게 선사하는 결말이 문자 그대로 '미쳐' 정신착란으로 죽는 것이라니. 유부녀의 불륜에 분노한 도쿄시민들이 요코하마 항에 나와 배에서 내리는 그녀를 돌로 쳐 죽였답니다. 와 별반 다르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려고 장장 500쪽이나 읽게 하였나 싶어 허무하였다. 캐릭터는 살아있고 문장도 좋다.


요코는 대부분의 경우 약자의 편을 들었다. 어떤 경우든 강자가 자신의 힘을 휘둘러 약자를 압박하는 것을 보면, 요코는 화가 치밀어 어떻게 해서든 약자를 이기게 해주고 싶었다. ...젊은, 세련된 외모, 부유한 환경, 뛰어난 재능과 같은 것을 바탕으로 한 남자들의 매력은 사무장 앞에서는 훅 불면 날아가는 먼지처럼 맥을 못 추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약한 자는 불쌍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약한 자는 불쌍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맹목이 한 문장에 담겨있다. 그래 맞다. 자신은 시대를 잘 못 타고 났다며, 싹수가 보이지 않는 남자와는 두 달만 살다 헤어져 버리고 그 남자의 아이는 자기 혼자 몰래 낳아 숨겨놓고 기르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요코라는 캐릭터가 사랑에 빠진다면 저런 남자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멋진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서 유부남 꼬셔 첩이 된 난 년이 사랑에 함몰되어 인생을 망쳐버린다는 교회 목사님 같은 소리나 하고 있다니 열불 터지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이디스 워튼의 '기쁨의 집'과 '그 지방의 관습'이 많이 떠올랐다. 둘 다 상류층 아가씨가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치며 (다양한 의미로) 타락해간다는 이야기이다. 겉으로 플롯만 보자면 어떤 여자와 비슷한 동류의 작품들 같지만 여성 독자로서 내가 느끼기에는 여성작가와 남성작가의 차이가 많이 난다. 이디스 워튼의 작품은 개성 있는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보수적 사회의 억압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다 발을 헛디디며 타락해가는 과정을 빈틈없이 촘촘히 그려낸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시선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고 캐릭터는 자신의 개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내딛는 한 발 한 발에는 캐릭터의 즉흥성이 아니라 현실의 무게가 실려 있어서 소설의 흐름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여성독자들은 무려 백여년 전에 쓰여진 이디스 워튼을 읽으며서도 저 여자들의 불행과 타락이 남의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 내가 저 처지에 처했더라도 똑같이 저 바닥으로 굴렀을 것이란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여자의 요코는 아리시마 다케오가 남성의 시각으로 창조한 인물이라 여자독자에게도 타자로만 느껴진다. 인공의 냄새가 나며,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은 더더욱 인공적이다. 요코가 스스로 죄를 짓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야기라면 이해가 가겠지만 자신이 유혹한 남자와 짧은 행복을 누린 뒤 정신착란과 건강악화등 연이은 불운으로 인생 종친다는 이야기를 보며 '나쁜 짓 하면 호랑이가 잡아간다 어흥' 보다 더 높은 차원의 메시지를 얻어내기란 어려워 보인다.

 

소설의 문장이나 흐름은 아마추어 티가 나지 않는 준수한 작품이지만 소설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 하는 부분에서는 용두사미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여주인공이 세상의 박해를 받아 좌절하고 만다는 이야기에 담긴 슬픔과 비극성을 작가는 1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그냥 자기가 그리고 싶은 섹시한 여자, 미친 여자를 그리고 싶었던 것일 뿐 (스스로 자신이 요코같은 여자를 가장 싫어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끌린다는 말을 했다) 실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자의 삶에 담긴 진실이 이 소설엔 함량미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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