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거짓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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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백수린의 에세이를 읽다가 이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궁금증이 일어 일부러 절판된 책을 구해서 읽었다. 여름과 거짓말을 소재로 한 일곱 편의 단편이 모여있는데 첫 두세편은 읽으며 아 이것이 독남문학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보단 낫다지만 중년남성 작가가 쓰기 때문에 생겨나는 어쩔수 없는 짜증 (우유부단하고 별볼일 없는 남성 캐릭터에 대한 온화한 시선이랄까)이 있었는데 갈수록 남성작가보다는 노년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작품에 많이 묻어난다 싶었고 마지막 작품은 화자가 노년의 여성이었음에도 별다른 기시감 없이 아주 설득력있게 읽혔다. 그리고 총평을 하자면 이런 소설,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들이 쓴 소설을 읽을 기회가 좀 더 늘어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 요즘 여성 작가들이 강세를 보이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젊은 여성작가가 잘 팔리고 또 출판사에서도 그 작가의 연령과 성별을 보고 밀어줄지 아닐지를 결정한단 인상이 있다. 결과적으로 독자가 볼 수 있는 세계는 2030 여성 작가가 보는 세계로 한정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고. 사실 현재 한국의 405060 작가들이 구려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도 어느 정도 동의는 한다. 지난 세월 동안 한국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감수성의 단차도 크다 보니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인들처럼 젊은 시절에 대학에 다니고 휴가는 취리히로 가고 취미로 오페라를 즐기는 그런 사람이 드무니까. 아무리 기성세대가 애를 써봐도 젊은이들이 보기에 구린 부분이 있단거, 잔혹하지만 그것도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앞으로의 10년 20년을 생각한다면 이 책처럼 품위가 있고 예술성이 있는 노년 작가들의 작품도 나오기를 기대하게 된다. 나도, 주어지는 책이 아니라 스스로 능동적으로 다양한 작가의 책을 봐야겠단 나름의 반성을 하게 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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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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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코의 요리는 풍성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고 큼직큼직했다. 유유코의 요리를 보고 깨달았다. 세에는 대범한 요리와 좀스러운 요리가 있다는 사실을. - P18

유리공예가인 마리는 "인간은 생산적이어선 안 돼. 쓰레기나 만들 이니까"라고 말했다. 본인은 실로 아름다운 유리공예품을 만들면서도 이런 말을 한다. "난 불가연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거야." 자각 있는 예술가는 훌륭하다. - P42

어릴 때는 어째서 바나나 냄새가 천국의 향기라고 생각한걸까. 부모님은 바나나를 꼭 반쪽씩만 주셨다. 한 개를 다 먹으면 이질에 걸린다고 했다. 베이징의 바나나는 어디서 왔을까. 타이완에서 왔을까? 죽기 전에 어떻게든 한 개를 온전히 먹고 싶었다. 우리 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 친구에게 물어보자 모두들 바나나를 반쪽씩만 먹었다고 한다. "이질 걸린대." 그 뒤로 바나나는 자꾸만 저렴해졌다. 값이 싸지니 아무도 이질 같은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얼마든지먹을 수 있게 되고 나서야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나나는 과일이라는 느낌이 없다. 감자 같다. 파근파근해서 목이 멘다. 그런데도 집에는 항상 바나나가 있다. - P86

사람에게는 저마다 식사의 미학이라는 게 있다. 좋아하는 음식을 먼저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후의 순간까지 남겨두었다가 한입에 쏙 넣고 음미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나는 한 치 앞은 암흑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지금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되도록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아 하는 성질 급한 인간이다. 그러나 남동생은 훨씬 선량하게 이 세상을 믿었다. - P96

아침에 추워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으면, 일어나기 전부터 통통통통 무를 채 써는 소리가 부엌에서 울려 퍼졌다. 멸치 우리는 냄새도 훅훅 풍겨왔다. - P100

생활은 수수하고 시시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일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 P221

"몇 년이나 남았나요?"
"호스피스에 들어가면 2년 정도일까요"
"죽을 때까지 돈은 얼마나 드나요?"
"1천만 엔"
"알겠어요. 항암제는 주시지 말고요, 목숨을 늘리지도 말아주세요. 되도록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럭키, 나는 프리랜서라 연금이 없으니 아흔까지 살면 어쩌나 싶어 악착같이 저금을 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나는 국수주의자라서 지금껏 오기로라도 절대 외제 차를 타지 않았다. 배달된 재규어에 올라탄 순간 ‘아, 나는 이런 남자를 평생 찾아다녔지만 이젠 늦었구나‘라고 느꼈다. 시트는 나를 안전히 지키겠노라 맹세하고 있다. 슬데없는 서비스는 하나도 없었고 마음으로부터 신뢰감이 저절로 우러났다. 마지막으로 타는 차가 재규어라니 나는 운이 좋다.

- P242

그러자 나를 시기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요코한텐 재규어가 안 어울려." 어째서냐. 내가 빈농의 자식이라 그런가. 억울하면 너도 사면 되잖아. 빨리 죽으면 살 수 있다고. 나는 일흔에 죽는게 꿈이었다. 신은 존재한다. 나는 틀림없이 착한 아이였던 것이다. - P242

산 지 일주일 만에 재규어는 너덜너덜해졌다. 나는 주차가 서투른데 우리 집 주차장은 좁기 때문이다. 너덜너덜해졌을 뿐만 아니라 까마귀가 보닛 위에 매일 똥을 쌌다.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 P243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ㅇ낳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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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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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은
커다란식빵 같아

누군가 조금씩 나를 떼어
흘리며 걸어가는 기분

그러다 덩어리째 버려져
딱딱하게 굳어가는 기분

- 안희연, <메이트> 부분,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 P1

소설이 삶을 닮은 것이라면, 한길로 꼿꼿이 가지 못하고 휘청휘청 비틀댄다 해도 뭐 어떤가. 내가 걷는 모든 걸음걸음이 결국엔 소설 쓰기의 일부가 될 텐데. 길 잃고 접어든 더러운 골목에서 맞닥뜨리는, 누군가가 허물처럼 벗어놓고 간 쓰레기들과 죽은 쥐마저도 내 빵에 필요한 이스트나 밀가루가 될 텐데. 그러므로 그림자처럼, 한낮의 시간에는 더욱 짙어지는 익숙한 열등감과 수치심이 찾아오면, 이제 나는 그것들을 양지바른 곳에 펼쳐놓고 마르길 기다리며 찬찬히 들여다본다. - P2

제가 보기에는 언어의 결여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경험입니다.
-파스칼 키냐르 -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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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이여, 안녕 마카롱 에디션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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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막장. 우울증과 조현병의 경계를 넘나드는 의식의 흐름이 감수성 하나로 예술이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겐 도덕도 없고 상식도 없고 염치도 없다. 자극적인 유튜브 컨텐츠나 될 법한 이야기를 보며 세대 초월 인생은 이렇게도 매울수 있구나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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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이여, 안녕 마카롱 에디션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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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은 집들이 마치 괴물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간다. 돈과 친구가 있을 때 집들은 층계와 정문을 가진 그냥 보통집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반겨주며 미소를 짓는 그런 정다운 집. 모든 것이 안정되고 뿌리를 든든히 내린 사람이라면, 집도 그걸 알아차린다. 집들은 겸손한 태도로 가만히 서 있는 듯하지만 친구 하나 없고 돈 한 푼도 없는 불쌍한 녀석이 들어오려 하면, 그동안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집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밟아 죽이기라도 할 듯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선다. 반기는 문도, 불 켜진 창문도 없이 그저 눈살을 찌푸리는 어둠만 존재할 뿐이다.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리고 곁눈질하며, 빈정거리면서 놀려대는 집들. 하나가 시작하면 이집저집들이 돌아가며 놀려댄다. - P41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아마 참나무처럼 단단한 건강을 가졌나 봐. 그러나 눈물을 흘릴 때는 예외였지. 그땐 강하지 못했으니까. - P56

겉으로 보기에 너무도 단순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내 인생도 들여다보면 복잡하게 얽혀 있. 즉 나를 좋아하는 카페와 나를 싫어하는 카페, 내게 친절한 길과 불친절한 길,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과 그렇지 않은 방, 내 모습이 괜찮아 보이는 거울과 그렇지 않은 거울,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옷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옷가지들로 복잡하게 얽힌 인생이 바로 내 인생이다. - P60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외향적 인간들이다. 뭘 좀 재미있는 게 없나 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남을 간섭하는 이런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대상이다. - P64

나는요, 인생을 이렇게 봐요. 누가 내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느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아니다.‘예요. 분명 나는 그렇게 대답했을 텐데, 단지 아무도 내게 그걸 묻지 않았지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에요. 내 일생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사건들은 내가 의도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답니다. ‘너는 네가 부탁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은 네가 아니다. 네 지금의 모습도 네가 만들지 않았다. 그러니 네 자신을 괴롭히지 마라. 그러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너는 그럴 권리가 있잖느냐? 너는 세상을 이 꼴로 만든 죄 많은 자들 중 하나가 아니니까.‘ - P82

그녀가 우는 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녀의 흐느낌이 그걸 말해 주더군요. 제 추측이 틀림없어요. 마치 어떤 음악을 들으면 금방 무얼 느끼는 것과 같은 거지요. - P116

모든 여성들은 다 잔인한 눈빛을 가졌나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부분의 인간이 잔인한 눈을 가졌지요. 자기도 모르는 무표정한 핏빛 잔인함. 나는 알지요. - P119

내 기분은 최상이다. 모든 것은 거칠 것 없고 부드러우며, 온화하게 움직인다. 에노와 나눈 사랑의 행위, 우리가 관람한 그림의 색채들, 황혼, 황혼이 질 때 나타나는 부드러운 북유럽의 색채들-분홍, 초록, 파랑 그리고 담자색. 바람은 신선하고 차며 수로에 켜논 불빛은 황금 애벌레 색이다. 바다갈매기가 물 위로 급강하한다. 기분은 최상이다. 모든 것이 온화하며 또한 울적하다. 마치 인생이 어떤 순간 그러하듯... - P139

자, 생각해 봐요. 인생을 야릇하게 만드는 건 이런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도, 사람들이 그 사건들을 겪어냈기 때문도 아니라니까요. 이런 괴상한 사건이 결국 잊혀진다는 사실이 인생을 요지경으로 만들지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천추와 같았던 어떤 시간이 결국 퇴색되고, 잊혀지며, 뇌리에서 사라진다는 것, 이것이 인생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거라니까요. 우리가 결국 잊게 되고 그러니까 매일이 새로운 날이 되겠죠. 그래서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는 거예요. - P167

몸조심하세요. 힘들게 노력하면 당신 이름의 약자가 새겨진 모조 담뱃갑 정도는 갖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 P182

그래, 난 강한 여자야. 나는 죽은 사람처럼 강하단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눈은 왜 감고 있지?

왜냐하면 죽은 자는 눈을 감고 있어야 하니까.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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