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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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대학에 속한 학생의 신분이다.  경영학과를 3년간 꿈꾼것도 아니고 대단히 이 과와 관련된 무언가가 하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다. 그저 원서 쓸 때 시간은 쫓기고, 이것 저것 어디에나 붙여놔도 말은 되는 과니까 싶어서 오다 보니 이 과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써 놓고 나니 난 참으로 무책임하게 나의 인생을 결정한것같기도 하다. 하여튼, 이렇게 과에 대한 진지한 고찰없이 들어와 놓고 보니 말이다, 이 과는 정말 욕망이 덩어리져서 뭉쳐진 과 같더란 말이다. 경영학과를 저런 과정으로 들어간 내가 나이브한걸지도 모르겠다만. 하여튼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점이 많았다. 대학이란 것이 원래 전국의 다양한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지만 경영대학생의 하나의 큰 흐름을 보자면 다들 욕망과 욕심과 야망으로 똘똘뭉쳐져 있더란 말이다. (모두가 다 그런건 아니다 당연히)애초에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는 학문이니까 그런 것이다. (과연 학문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과, 경영학이 목적이 아니라 대부분 돈과 명예와 성공 - 즉 사회에서 한가닥 해먹는것에 목적이 있어서 모인아해들이니 당연한 결과이다. 학문에 뜻이 있는 건 당연히 아니고-경제학자가 되고 싶다는 사람은 있어도 경영학자가 되고 싶다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난 한명도 못봤다) 하여튼 나는 그런 분위기에서 불편함을 느꼈고 때때로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돈과 성공에 대해 그리 초연한 편은 아니다. 그걸 가져야한다는 막연한 생각은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상대적인 것 아닐까..몇살엔 무슨 자격증을 따고 몇살엔 얼마쯤 모으고..벌써부터 (20대 초반부터) 국회의원 선거를 염두에 둔다던지, 주식과 부동산에 관심을 둔다던지하는 그런 욕망속에서 나는 지나치게 어리고 순진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것만 같았다.  소속집단 주류의 정체성과 다른 개인의 모습은 무언가 . 불안함을 유발시킨다는 걸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시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도대체가, 부동산 투자에 대해 이야기 하는 대학 내 라디오 방송이라니!! (대학생의 금전적 능력에 걸맞는 제테크 방법에 대해 학내 라디오 방송에서 주마다 일러준다.)하여튼 간에 중요한건 이게 아니고. 이 책에 실린 2편의 중편, 내가 훔친 여름 그리고 60년대식 중 내 마음을 움직인 건 60년대 식 이었다. 내가 훔친 여름이란 작품은 내가 김승옥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같다는 인상을 준 , 그러한 작품이었다. '선데이 서울'에 연재되었다는 60년대식에 이리 크고 깊은 감명을 받는 걸 보니 내 수준이 이 정도인가보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선데이 서울이 아마...뭐....그런 잡지 아닌가? 그렇다고 글이 수준이 낮은건 당연이 당연히 아니고, 작가가 나 같은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서 쓴 글이겠지..(내가 훔친 여름은 중앙일보에서 연재되었다고 한다) 60년대식은, 열정없는 한 인간의 하루 이틀에 걸친 행동을 하나하나 낱낱이 따라가며 그리고 있다. 김승옥 소설의 특징이다. 이제 기껏4편 읽었는데 모두 이렇다.

이 이상의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선택해서 읽어주세요

"...그리고 이런 말씀 드리기에는 좀 뭣합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형에게서 제가 느낀 바로는, 형은 많은 지식도 가지고 계신 것 같고 교양도 있어 보이고 선량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만, 뭐랄까요, 정열은 없는 사람같습니다. 정열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저는 별로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도인은 어안이 벙벙해져버렸다. 그에게 한 대 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그렇다. 도인이 가장 경계하는 것들 중의 하나야 말로 바로 정열이라는 것이었다. 도인의 이해 속에서 정열이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가장 나쁜 원인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정열이라고 하면 도인의 머릿속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어쩐지  수양이었고 연산군이었고 일본 군국주의자들이었고 히틀러였고 중공의 홍위병이었다. 그리고 약간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모든 것에서 엿보이는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판단이 결핍됐을 때 나오는 우격다짐의 행동이었고, 무기교를 감추려는 광란의 몸짓이었고, 지나가버린 일, 또는 이렇게 쓸 수도 있고 저렇게 쓸 수도 있는 시간에 대하여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느끼고 있는 절망감에 호소하는 과격한 프로파간다였다.....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정열이란 말처럼 서먹서먹하고 아니 두렵기까지 한 말은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서 정열을 제거해버리려고 노력해왔으며, 모든 사람들이 정열을 내세우지 말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화학기사의 입에서 '당신에게는 정열이 없어보인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도인은 이상스럽게도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정열이 없는 보이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는 얘기에선 패배감조차 느꼈다. 이런 느낌들이 정열을 하나의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정열이 없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 모욕감을 느끼고 패배감을 느낀 그는, 그렇다면 정열을 무의식적이나마 긍정하고 있덨던 것이 분명하다. 아니다. 이제야 도인은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열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과도한 정열이, 또는 정열로 위장한 추잡한 욕망이 빚어내는 인간에 대한 과오를 경계한 나머지 이제 그에게는 이성과 지성에서 나온 판단을 밀고 나갈 힘이 되어줄 최소한의 정열조차 닳아 없어져버린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무언가, 찌르르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열정과 야망.욕망을 혼동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타인의 욕망.야망에 기가 질려 어리버리하게 내가 가져야 순수한 열정도 놓치고 산 것이 아닌가. 나도 그들처럼 될까봐 두려웠다. 근데 닮기 싫다고서 행한 행동들이 야망의 부재가 아닌 열정의 부재로 나타난건 아닌가.하는 반성.아니 구분할 필요조차 없이 어느새 열정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열정이 없는 이성과 지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나를 변화시킬수 없다)  주변의 모습에 위축되지 말고, 열정과 욕망을 혼돈하지 말고, 나만의 열정을 지켜야겠다는  큰.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돈과 세속적인 부를 향한 노력을 욕망으로 정의 하는 내가 오만한 것인가 하는 의문도. 그들에게는 그것이 열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튼 내 기준에선 그건 나의 열정이 아니니 나만의 열정으로 살아야겠다는, 나만의 기준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 책이다. 감사합니다 김승옥님.  패션쇼에서 옷의 디테일이 보이면 하급. 아직 수준 낮은 디자이너의 쇼이고 옷의 이미지가 보이면 상급, 대가의 쇼라고 하였다. 모든 예술에서 통하는 말인가 보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그 무엇. 그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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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12 0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잘 읽었습니다. :) 저는 요즘 '혁명과 웃음'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또한 김승옥의 뛰어남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서, 더욱 공감되네요. ㅎ

blowup 2006-11-12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살아 보지 못한 시대의 에센스를 이렇게 잘 포착하다니요.
그렇게 내게만 찌리릿 하는 시대 정신이나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대상과의 불화과 사람을 성숙시키는 건 신기해요.
신기하게도요.



2006-11-12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06-11-1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저는 완전 팬이 됐어요 ^,^ 기인님은 국문학과이시니 좋은 책 많이 읽으셨겠죠? 알수록 정말 멋진 작가가 우리나라에도 많은거 같아요 ^^

namu님
그리고 약간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모든 것에서 엿보이는 그 무엇이었다. ...이 말 나오기 전에 이런 이야기도 나왔어요
요는 잘 살아보자는 거 아녜요?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도 알 건 다 알았거든. 멀리까지 가볼 것도 없고 해적질 해먹고 살았다고 깔보는 일본에만 가도 그 정도의 건물은 얼마든지 있어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악착스럽게 이익을 추구한 국가가 번영했소. 노골적으로 말해서 난 우리 정부에 불만이 많아요. ......세상에 체면이고 염치고 호주머니 속이 든든해야 돌보는 것이지. 국민소득 백몇십 달라 가지고야 어디 체면 차리게 됐나, 안 그래 젊은이? 체면이고 염치고 말야. 그런데 저 사람들 되게 체면 좋아하더군.끌끌끌.

60년대 이야기라고 해도 국민소득 백 몇십달라 라는 말을 들으면 또 아아 그렇지 그시대엔 그랬겠지 하고 깜짝 놀라고 namu님 표현대로 그 시대에 '자신이 살아 보지 못한 시대의 에센스를 포착'하는 김승옥이 천재같았어요..^^

속삭님
히히 네..맞아요 제 안에 존재하여 꺼지지 않고 있어주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지요 ^.^

2006-11-12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미달 2006-11-1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승옥 좋아요. ㅋ

LAYLA 2006-11-1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전 님의 글, 엄청 좋아해서 (아이 붓끄러워라 히히) 님의 댓글 자체만으로 엄청 기분 좋았답니다 ^^

미미달님 으흐흐 정작 서울 1964년 겨울 배울땐 학교에서 배우는 거라 별 감흥 없었는데 말이죠 ^.^ 미미달님은 학교때부터 좋아한거에요?


미미달 2006-11-13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64년 겨울. 학교에서 배웠을 때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다죠. ㅋ
가슴을 울리는 소설이었어요.
김승옥의 청년때의 고뇌에 찬 듯한 모습 또한 멋져서 천생 작가구나 싶어요. ㅋㅋ

LAYLA 2006-11-13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달님은 일찍 김승옥님의 매력에 눈을 떴군요. 멋진 글뿐만 아니라 잘생기기도 했죠 호호호

아싸 2007-02-08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왓! 읽어보니 저보다 많이 사신분은 아닌것 같은데 어쩜 그리 생각이 깊으신지요. ㅋ
참 그리고 선데이 서울은 아주 그렇고 그렇지는 않았던걸로 기억합니다. ㅋㅋ 물론 사소한 동네아줌니들의 춤바람이나 항상 이니셜로 표기되던 어느 스타의 충격고백따위가 주류였지만 전 아주 잼나게 읽었다구요 ㅋㅋ 저두 그땐 초등학교때라 아부지 몰래 읽긴 햇어두.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구판절판


나이가 좀 들면서 인간관계에 대해 알게 된 게 하나 있는데,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모든 게 간단해지는 것 같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원래 그런 사람이려니 하면 그만이거든. 마찬가지로 누가 나에 대해 뭐라고 해도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하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내가 잘 못한 거라면 고쳐야겠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내가 잘못해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싫어서 뭐라고 하는 게 대부분이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잇고 그걸 참을 수 없어서 덕훈 씨가 헤어지자고 했던 거잖아. 근데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덕훈시는 원래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인 거야.-63쪽

햄릿이 이렇게 말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햄릿이 지칭했던 여자란 삼촌과 결혼했던 그의 어머니였지만 사람들은 어쨌든 남자에 비해 여자가 약하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보다 더 약하다.생산력의 관점에서 보면 남자가 우월하다. 하지만 남작 절대적으로 우월했던 것도 육체적 힘을 필요로 하던 먼 옛날 수렵시대나 농경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자의 생산력은 점점 남자에 근접해 가고 있으며 육체적인 힘의 우위가 생산력의 우월성을 담보해 주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신은 적어도 태초에는 공형팼는지 혹은 세상이 이렇게까지 바뀔것이라고는 간파하지 못했는지 외적으로 강한 남자에게 약한 내면을 주었고 신체적으로 약한 여자에게는 강한 내면을 주었다. 그리하여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훨씬 더 고통스러워 한다.-117쪽

남자들이 더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사회화 과정이 다르다는 데에 있다. 대개의 여자들은 10대 중반에 이르면서부터 사랑의 시뮬레이션을 수도 없이 경험한다. 순정만화와 로맨스 소설이 그녀들의 텍스트이다. 도한 여자들은 연애할 때와 이별할 때 그리고 남자친구가 바람피울 때 그 모든 일들을 친구들과 공요한다. 이랬어. 어머. 저랬어. 저런. 이래야 돼. 정말? 저래야 한다니까. 깔깔. 그리하여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이미사랑에 관한 수십개의 시나리오들이 완성되어 있으며, 또한 각각의 시나리오마다 배역과 연기의 색깔이 어느 정도 설정되어 있다. 즉 그녀들에게는 수십가지의 대처방안이 이미 정리되어 있는 셈이다
남자들은? 10대 중반에 이르면서부터 스포츠 마노하나 무협지를 보며 영웅에 대한 환상을 키운다. 가까운 친구들과의 대화는 욕설이 절반을 차지한다. 그 속에 연애 이야기가 들어갈 자리란 없다. 사랑에 대한 시물레이션? 없다. 애인이 바람을 피운다고 친구가 고민하면?"술이나 마셔"라고 말해준다.(오쟁이를 지다니 쪼다같은 놈_)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면? 그럴리가 있겠나 (생각한 적도 없다니까-)막상 일이 닥치면?

왜 나야!-118쪽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 나는 청소기를 돌린다.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의 섞임이 듣기 좋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같이 빨래를 널고, 빨래가 다 마르면 같이 빨래를 개킨다. 할 일이 없으면 소파에서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tv를 본다. 아내가 책이라도 읽으면 또 그 옆에 누워 빈둥거린다. 살아가는 일의 즐거움이란 로또 같은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옆 자리에 아내의 무릎에 있다.-121쪽

-하나 물어보자. 그놈이 뭐가 그렇게 좋은데?
-글쎄. 종일 그 사람 생각만 하는 건 아니야.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진 것도 아니고, 죽도록 사랑해서 그 사람 아니면 아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야. 다만 그 사람하고 있으면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미래? 나하고는 미래가 없는 삶을 살았던 거냐?
-그런 게 아냐. 내가 말하는 미래라는 건 아파트 평수에 대한 얘기가 아냐. 아이를 몇을 두어야겠다는 얘기도 아니고 추상적인 얘기지만,내 삶의 방식이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에 대한 전망 같은 거야.
-그게 무슨 사랑이야?
-그 사람을 알면 알 수록 나를 알게 되는 것 같아. 그 사람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알게 되는 나에 대한 사랑인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서 나만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야. 나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그 사람도 사랑하게 되는 거지. 미묘한 얘기지만 어쨌든 그것도 사랑이야.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사랑이야
-그럼 나는?
-당신이란 사람에 대한 사랑이지. 당신은 매혹적이면서 선한 남편이니까. 곰곰 생각해봤는데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맞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 . 그런데 말이지.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129쪽

여자가 오르가슴에 이르도록 남자가 힘을 기울이는 것은 비단 성적쾌락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종족 번식을 위해 프로그래밍된 진화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져 있듯 수억 개의 정자 중 난자와 만나 수정되는 정자는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영국의 진화 생물학자 로빈 베이커와 마크 벨리스는 80퍼센트 이상의 정자가 여성의 질과 자궁 등에 있는 다른 남자의 정자를 적극적으로 찾아내 죽이는 역할을 하며 20퍼센트 미만의 정자는 다른 남자의 정자가 난자로 가지 못하게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여자의 몸안에서 수억의 때로는 수십억의 정자들이 서로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정자가 수정되는 과정에서의 전쟁은 수백만 년 이상 진행되어 온 진화의 결과이다. 여자의 몸은 이 전쟁을 조장하는 격렬한 전장일 뿐만 아니라 선택한 정자를 지원하는 첨단 기지의 역할도 수행한다. 여자가 느끼는 오르가슴의 타이밍에 따라 산성의 점액이 분출되어 알칼리성인 정자의 전진을 막아버린다. 여자 스스로 오르가스므이 타이밍을 결정할 수 없다. 어떤 정자를 몰살 시킬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여자의 몸이다. 그녀의 성향이나 의지와는 별개로 그녀의 몸은 더 나은 유전자를 획득하려고 하는 것이다. -213쪽

베이커와 벨리스의 연구는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일부일처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다른 종의 동물들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일부일처제는 인간 고유의 생물학적 본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여자는 여러 남자의 정자 중에서 가장 우수한 정자를 받아들이게끔 진화했고 남자는 그러한 조건에서 사진의 유전자가 존속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정자 전쟁이란 여자의 바람기가 남자의 그것 이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214쪽

삶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 없다. 다만 견딜 수 없는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217쪽

-거야 그렇지. 근데 내가 지금 이 나이에 거길 가서 뭘 할 수 있겠어
-아무거나 당신이 하고 싶은 거. 가령 축구 웹진 같은 걸 만들어서 운영해 보는 건 어대?
-그런 걸 아무나 하냐?
-당신이 하지 않고 있으니 아무나 하는 중이지. 당신이 하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될 거에요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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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부인 김승옥 소설전집 4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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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대의 한국소설을 제대로 읽어본건 이번이 처음인것 같다.

수능을 위해 혹은 논술을 위해 읽었던 책이야 이것 저것 있지만 내가 자발적으로 좋아서 고른 책..

60년대의 소설 속에 그려진 사랑이야기라고 하면 어떤 것일까

나는 80년대 중반에 태어나서 그 시절 이야기라면 정말 하나도 모른다

내 직전세대까지 받았다는 교련이나 반공 교육도 희미하게 느끼는 정도인데 60년대 이야기라니, 짐작도 안 가는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짐작을 하고 있었다.

아주 보수적이었던 20세기 초반 분위기야 쵸큼 알고 있으니, 60년대라고 하면 21세기 초반인 지금과 20세기 초반의 중간 정도 되는 사회이지 않았을까?

20세기초반보단 개방적이고

21세기 초반보단 보수적인

그런 사회분위기를 상상하며 책을 읽었다.

아니 근데 웬걸, 나의 짐작과는 다르게 이 책은 꽤나 강.하.다.

크게보자면 성에 대한 개방도에서 부터 사소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앞부분에 실린 '보통여자'에서 놀랐던 건, 결혼 전 여러여자들과 쉽게 관계를 가지는 남자주인공의 모습이었다.

보수적인 사회니 어쩌니 해도 돈주고 쉽게 여자를 사고 관계를 가지고 또 그러고선 선을 본 여자와는 예의를 갖추어 만나는 모습. 이런 건 뭐 시대랑 상관없는 거구나 ...싶었다.

또 60년대에도 맞벌이를 선호했다던가, 쌍꺼풀 수술을 많이 했다던가 하는 건 사소한 부분이지만 짐작과는 너무 달라 깜짝 놀란 부분들이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매력은 남자의 마음과 여자의 마음을 속속들이 뚫어보는 묘사들이다.

'보통여자'와 '강변부인' 두 편 모두 며칠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서술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이 두 소설 모두 어떤 상황에 처한 주인공들의 심리를 따라가며 하나하나 묘사하는 스타일이다.

'보통여자'의 경우 여자주인공의 마음과 남자 주인공의 마음을 모두 서술하는데 (남자가 분량이 적다..)

여자의 마음이 그려질 땐 어쩜 저리 여자 마음을 잘 알까, 도대체 스물 여덟먹은 작가가 어찌 여자맘을 저리 아는걸까 탄복을 했고 (그 때는 인터넷도 없었다. 김승옥은 천재같다)

남자의 마음이 그려질 땐 아아 남자의 심리란 이런 것이구나, 그런데 그 세속적이고 노골적인 심리묘사의 리얼리티...그게 좋았다. (이 여자 저 여자랑 자고 다니고 심지어 점심시간에 잠시 여관에 들렀다 회사로 돌아가는 남자의 정신상태..꽤나 이것저것 생각하고 재면서 살고 있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나는 '보통여자'란 제목의 뜻...이거 완전 너무 멋진 영화한편 본 기분이었다..^^

이렇게 만족도 최고였던 '보통여자'에 비해 '강변부인'은 덜 좋았다.

보통여자에 비해 빠른 전개, 자극적인 사건들이 계속 터지는 강변부인 인지라, 읽는 속도도 빨랐고 재미는 있었지만 이건 정말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생각 (이건 21세기에 일어나도 화제가 될 만한 수준의 사건들)

너무 야하단 생각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언어영역공부하면서도 느낀거였지만 예전의 한글로 씌여진 소설들은 뭔가 말이 이쁘다..

소리내어 읽으면 입안에 울리는 소리도 좋고, 소설이지만 운율이 있는것만 같다.

그리고 '남자'란 단어 대신 '사내'란 단어를 사용한다던지 하는 것들..이런 것들도 맘에 든다.

아아 완전 맘에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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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9-07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의 마음.." 이라기 보다는 "그남자의 마음.." ,,, 일반화하면 실제와는 많이 차이가 나요.

LAYLA 2006-09-08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책 속의 여주인공에게 몰입하다보니 ^.^ 히히히
 
강변부인 김승옥 소설전집 4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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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친구들 중에는 그럴듯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몇 사람이 고맙게도 수정이 금년에 졸업한다는 걸 기억해두었다가 서로 취직시켜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분들로서는 물론 가장을 잃은 수정의 가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주겠다는 뜻에서였는데, 그러나 수정의 어머니는 수정이까지 벌지 않아도 될 만큼 아직은 넉넉하니까, 라는 이유로 그 도움들을 사양했다.
김씨의 생각으로는 여자란 직장생활을 하며 아무래도 거세지고 여자다운 맛이 달라져버려서 앞으로 결혼생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맞벌이 할 수 있는 여자를 아내나 며느리로 맞으려는 풍조가 높아가고 있지만 그건 가난한 생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보려는 최후의 발악에 불과할 뿐, 결코 맞벌이 부부 자체가 이상적인 부부형태인 건 아니다. 집안살림만 해도 여자에게는 중노동인 것이다.

만일 아내가 맞벌이 할 수 있는 여자이기를 바라는 그러한 남자라면 나는 아예 딸을 주지 않겠다.
-51쪽

왜 한때나마 그런 사람을 보고 싶어 안타까워 했을까?
왜 그런 사람을 어머니는 나와 맺어주려고 해을까? 자신이 밉고 어머니도 원망스럽다.
수정은 자기가 속해 있던 세계 전체가 자기를 속였다는 느낌에 떨고 있었다.
그 여자의 기분, 그 여자의 꿈, 그 여자의 육체, 그 여자의 운명, 요컨대 그 여자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은 내팽겨쳐져 실은 아무의 보호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여자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 동안은 그나마 어머니라도 자기를 보호해주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아니다.

소리나 꽥 지르고 뻔뻔스럽고 진심은 감춰두고 거짓만 내보이며 그리고 여자를 폭력으로 지배하려는 사내한테 나를 떠맡겨버리려 한 것이다.
일부러 그런 사내를 고르려고 해도 힘들 것이다.

그만큼 어머니는 내 운명에 무책임한 것이다. 이젠 내가 귀찮아진 게 틀림없어
아무한테나 줘서 처지해버리려는 생각밖에 없는 거야.

수정은 끝없이 비참한 느낌에 빠져들어갔다.
자기를 보호해주고 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란 여자는 얼마나 무력한가!
자기의 힘만으로써는 도저히 이 세상에서 자기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을 수 없을 것 같다.-97쪽

"도둑인 건 사실이죠"
"내가?"
"도둑? 내가?"
"처녀 도둑. 후후훗"

말하면서 종숙은 대담한 자세로 명훈의 가슴을 힘껏 껴안았다. 단추를 잠그지 않은 바바리코트의 앞깃이 벌어지면서 네글리제만의 풍만한 가슴이 명훈의 가슴에 부딪쳤다. 명훈은 이제 익숙해진 그 여자의 젖가슴의 탄력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면서 여자가 말한 '처녀 도둑'이라는 말만이 귀에 거슬렸다.
어째 올가미를 씌우는 수작인 것 같았다.
이 여자가 역시, 그 동안 그런 내색을 내보인 적은 없었지만,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육체관계에 대한 책임을 남자에게만 돌리며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로구나, 생각하니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129쪽

어쨌거나 경숙이 일러주는 방법이란 수정으로서는 도저히 실행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경숙과 자기와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결혼을 하나의 계약이라고 본다면 경숙은 계약자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남편의 잘못을 추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는 무슨 권리로 현장을 습격한다는 따위의 어마어마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하니까? 사랑한다는 것도 권리일 수 있을까? 글쎄, 사랑한다는 게 권리일 수 있다고 해도 그 권리란 사랑하지 않아버린다는 데밖에는 쓸 수 없는 권리가 아닐까?-198쪽

그 여자 역시 섹스에 대한 근원적인 경멸감 내지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가정이란, 그리고 남편이란 섹스의 대상 이상의 존엄한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섹스에 대하여 무지해 보이는 남편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워 보였고, 순진한 남편을 통하여 자신의 몸 속에서 병균처럼 끓고 있는 자극에의 욕망이 건강한 육체의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죄스러운 것임을 깨닫곤 해왔던 것이다.
가정에서의 섹스란 엄하게 다스려 조그맣게 가둬두면 둘수록 가정의 다른 부분들, 즉 육아라든가, 문화적 취미생활이라든가, 친척들과의 보다 활발한 왕래라든가, 재산을 불려나간다든가 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질펀하고 시뻘건 낮짝을 한 자극적인 섹스란 놈은 어디까지나 가정 밖으로 몰아내놓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시뻘건 낮짝을 하고 있는 녀석과의 교섭이란, 내 가정이 제대로 잘 굴러나가고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때때로 영화구경을 가거나 보석반지를 사듯, 자신에게 속해 있는 죄스러운 욕망을 달래주는 정도로 슬그머니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261쪽

질투란 하면 할 수록 상대가 아니라 하는 내 가슴만 멍이 들도록 두들겨패는 것이다.-291쪽

"일본 책은 안 보셨습니까?"
"일본어는 다 잊어버렸어요. 내 이전 세대와 나는 그런 점에서 큰 차이가 있지요 번역투일망정 나는 모든 지식과 교양을 한글로 섭취한 최초의 세대, 김현이 말한바 4.19세대임에 틀림없어요"-3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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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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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 로렌스의 정의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사람, 다른 나라, 다른 연인 같은, '다른 것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자였다.

그것은 랭보가 청춘시절"la vie est ailleurs(인생은 다른 곳에 있다)"라고 했던 말의 메아리와 같다.-9쪽

앨리스는 자신이 왜 이렇게 절망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행복이란 즐거운 상태가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하던 자신이 아닌가. 괜찮은 직장이 있고, 건강하고, 살 집이 있는 마당에 왜 주기적으로 아이처럼 울고 짜고 난리람?

불만이 있다면 자신이 타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 뿐이었다. 지구상에서, 그리고 거기 사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 자신은 불필요한 존재 같았다.-13쪽

플라톤은 예술이란 삶을 모방하고자 분투하지만, 결국 실패할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이상 사회에서는 잉여 인간이었다. 로댕이나 클림트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들은 이미 존재하기에 재생산 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모방할 뿐이니까. 실제로 침대가 옆에 있는데 침대를 스케치 하는 게 무슨 소용있을까? 키스가 아주 흔한 마당에 무엇 하러 키스 장면을 영화로 찍는단 말인가?

오스카 와일드라면 정중하게 다른 의견을 주장했으리라. 지금은 진부해져 버렸지만 전설적인 그의 말에 의하면, 예술이 생활을 모방하는 게 아니고 생활이 예술을 모방한다. 이런 당황스러운 경구를 통해, 오스카 와일드는 무엇ㅇ르 말하려 했을까? 그것은 예술이 생활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3차원적인 애인에게 받는 키스는 영화에서 보는 키스보다 판에 박은 듯 형편없다는 것이다. 와일드의 '낭만적인 미학'은 토니 같은 남자들에게 그녀가 내리는 판결문과 같았다. 토니는 사무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앨리스에게 키스했는데 토니의 입에서는 양파수프 냄새가 폴폴 났고, 행동거지는 오랜만에 돌아온 주인을 맞아 촐랑대는 개와 비슷했다.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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