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끊임없이 배우고, 자기 스스로 개선되어가는 상황을 많이 깨달았고, 그래서 사람들한테 "사람은 끊임없이 변한다. 한 시기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고 합니다. 오늘 내가 어떤 책 하나를 보고, 어떤 말 하나를 들으면서 오늘 내가 달라진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거든요. 사람은 계속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 같아요.
-51쪽
저는 검찰까지도 그렇다 치고, 법원의 경우에는 이영훈 대법원장님이 광화문 네거리에 나와서 과거의 일을 가지고 정말 백배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법을 배운 사람의 책임이죠. 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나중에 검찰에 가서 "검사님 고문당했습니다" 또는 법원에 가서 "고문당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조차 제대로 안 준 그 책임은 면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운 자의 이름이여, 판검사'라는 제목을 달았을 정도로 같은 법조인으로서 부끄러워 잠이 안 오더군요. 군사독재라는 게 결코 전두환, 노태우 이런 사람만 한 게 아니잖아요. 그 밑에 하수인들이 있었던 건데, 그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을 하고, 법원이나 검찰에 있고, 변호사를 계속 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민주화의 도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겠죠. -70쪽
세상에 안 된다고 생각하고 주저앉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요. 부닥치면 뭔가 이루어낸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사회운동에서는 긍정적인 생각이 세상을 바꿔내는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75쪽
시민운동을 해보니까 공공적 지식인을 양성해내는 훈련 과정이더군요. 돈이 있습니까? 사람이 있습니까? 오직 명분만 가지고 사람을 모아내고, 돈을 모아내고 해서 사회 현실을 바꿔내는 거잖아요, 그런 사람이 정치권에 가면 잘할 수밖에 없죠. 대부분의 경우에 희생과 헌신에도 능하죠. 그래서 저는 앞으로 우리나라 시민운동가들이 지방 의회도 가고, 군수나 시장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박원순-78쪽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문학이 기여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고, 참된 문학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개혁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조정래-103쪽
제가 만날 학생들한테 얘기하는 게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는 거거든요. 연세대 교훈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거거든요, 그게 성경에 있는 말인데, 진리라는 게 잘못하면 도그마가 되고, 마녀재판이 되고 그러잖아요. 그게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굳어지면 엄청난 폭력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해서 자유에 관한 글을 많이 썼죠.-121쪽
-..'표현의 자유 억압'과 변화의 거부 그리고 '성의식의 이중성'을 극복하려면 어떤 노력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결국 지식인의 책문데, 대중들은 굉장히 자유화되었다고 볼 수 있죠. 인터넷을 통해 자기 의견을 거리낌 없이 개진하고 그러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변신을 한다는 거에요. 학생들도 보면 대학 때 다르고 대학원 때 다르거든요. 교수되면 또 달라지고, 제가 <나이 값> 이라는 글에서 "제발 나이 값 좀 하지마라"고 쓴 적이 있는데, 나이만 좀 들면 보수로 바뀌고, 권력 지향적이 되어버리죠. 그게 우리나라의 제일 큰 병폐에요. 서양의 경우 피카소나 헨리 밀러 같은 경우 칠팔십 대에도 야한 그림 그리고 야한 소설 썼거든요. 우리 작가들을 보면 쉰 살만 지나도 역사소설, 민족 소설 같은 대하소설만 쓴단 말이에요. 그래야만 인정을 받고. 젊었을 때는 연애소설을 쓰다가도 그렇게 변하죠. 이게 아주 심하거든요. 그게 일본하고 다른 점입니다. -127쪽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죠? 윤동주 시인을 저항시인이 아니라 휴머니스트이자 자신에게 솔직한 시인이었다고 평가하셨는데요 -그게 윤동주뿐 아니라 우리나라 해방 전 작가들에 대한 가장 잘못된 이해죠 그래서 제가 <이상화론>을 쓸 때도 <나의 침실로> 같은 것도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이 아니라 침실로 가서 섹스하자는 것이다 라고 했어요 내용을 보면 그렇거든요 침실이 뭐예요? 방인데. 근데도 그걸 해방공간이니 뭐니 하고 해석한다고요. 이상도 마찬가지에요. 이상의 <오감도>도 정자들의 질주라고 해석했는데요. 그것도 전부 식민지 시대의 불안을 표현했다, 이런 식으로 간단 말예요. 윤동주가 저항한 게 없거든요. 이한열 같은 거예요. 재수 없어서 죽은 거야, 불심검문에 걸려서. 그런데 그 사람 시에 저항이란 걸 한 구석도 찾아볼 수가 없지, 있다면 전부 자신에 대한 저항이죠.<십자가>라든가 <간>이라든가 <또다른 고향>이라든가 읽어보면 전부 내부의 자아분열, 이런 걸 그리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걸 제가 심리적으로 해석을 했죠.-135쪽
-삼국지 열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국에서는 홍루몽을 더 쳐주고 수호전도 많이 보는데, 수호전은 산적 얘기잖아요. 따지고 보면 민중의 얘기일 수 있죠. 그런데 <삼국지>는 권력자들의 얘기거든요. 그입장에서 서술한 거고. <삼국지>에 이렇게 열광하는 건 그만큼 사람들이 권력 지향적으로 돼서 그런 것 같아요-138쪽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얘기의 핵심이 야한 정신 같은데,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야한 정신이라는 게 어떤 것입니까? -전체보다는 개인, 봉건윤리가 아니라 자유주의 윤리, 그리고 특히 야하다를 들 야 자를 써서 자연의 본성에 솔직한 사람, 이런 뜻으로 쓰죠.-139쪽
-요즘 특별히 관심을 가지신 일은 있습니까? -...제 소망은 더 용기를 내서 미발표 작품도 발표하고, 한편으로는 산문으로 계몽도 해야 될 것 같아요. 제가 만날 얘기하는 게 우리나라는 아직 셰몽주의 시대도 안됐다는 거거든요. 계몽주의 시대 때 한 게 종교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든가 비합리성에 대한 저항 이런 게 아니겠어요. 우리나라는 아직 합리적인 생각조차도 뿌리를 못 내리고 있거든요. 아직 전근대적이라는 야기지. 겉으로는 최신 프랑스 철학을 수입하면서도 속으로는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요. 산문으로서 일종의 계몽활동을 하고 싶어요. 그 전에도 많이 했죠. <사라를 위한 변명> 같은 것도 그렇고 <운명>도 그런거고.-140쪽
-작년에 문화 쪽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가 이순신 열풍이었는데요 -제가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철거하자고 글 많이 썼는데요. 동상도 서울대 교수가 만든 건데 완전히 깡패처럼 만들었잖아요. 어깨 올라가고 눈 부릅뜨고...이순신이 그런 사람은 아니었단 말이죠. 그런 식으로 아주 말하자면 무 숭상이지. 힘. 물론 이순신은 영웅이지만 그런 영웅숭배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죠. 제가 <천재와 영웅>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천재는 박대하고 영웅은 숭배한다"는 내용이에요. 영웅은 좋은 것만은 아니거든요. 대개 괴팍하고 고독해요. 그런데 천재들은 언제나 시대를 이끌어가거든요. 장 자크 루소 같은 사람도 당대에는 판금당하고 잡혀가고 그랬거든요 <에밀>때문에. 그런데 그게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천재를 중시하는, 괴짜를 인정하고 개성을 인정하는 이런 풍토는 없고 어떤 수단으로든 영웅만 되면 그사람은 대단하다고 평가하잖아요. 박정희가 대표적인 예죠. 영웅숭배 굉장히 심합니다. 마광수-152쪽
삼성이라는 기업조직과 이건희 일가라는 인적집단을 구분해서 봐야 하는데, 동일시하려는 의도가 있죠. 이건희 회장 측에서는 끊임없이 이건희=삼성, 삼성=국익, 국익=국민의 행복 이라는 등식을 심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각 등식 사이에는 엄청난 과장과 논리 단절이 있죠. 국익과 국민의 행복이 꼭 일치하지는 않거든요. 현대 정치학 개념에서 국익은 가장 복잡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왕의 이익이 국익인 나라도 있고 소수 독재자의 이익이 국익인 나라도 있고 우리나라에도 국익의 개념이 변천되어온 역사가 있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마법과 주문을 거는 거죠. 이건희=국익, 국익=나의 행복 그래서 우리가 황우석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집단에 의해 또 다른 집단에 대한 살육이 있었던 거 아닙니까? 언로이라는 건 무원칙하거나 특정인의 이익에 의해 매겨진 등식이 부등하다고 하는 것을 밝혀주는 거거든요.그렇잖아요. 그 등식이 부등하다고 하는 것을 일깨워주고 끊임없이 일반 시민사회의 이해와 일치하는 등식을 매겨주는 것이 언론이 할 일이거든요. 우리는 '짐이 곧 국가'라고 하는 등식에 저항해서 수 많은 사람들의 피로등식에 부등호를 매겨운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역사를 수행하는 것이 언론인데, 지금은 신성불가침의 등식이 된 거죠. 그들과 나는 같지 않고, 그들의 이익과 내 이익이 같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영원히 자본 시대, 이건희 왕조의 일방적인 신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261쪽
초동목부들, 손수레 끌고 시장바닥에서 구두 파는 사람들은 겁이 나서 그렇게 못할 거예요. 과연 사회정의라는 게 뭔지, 누구 좋아라고 우리가 이러고 사는 건지..하물며 그 대한민국 당대 파워엘리트들한테 그렇게 돈질을 일상적으로 업무 삼아 하는데 그 사람들 눈에 일반 국민들은 얼마나 하잘 것 없이 보일까. 돈으로 거래할 것 없는 그 헐벗은 사람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263쪽
연대에서 경영학을 했고, 대학원 때까지 런던 비즈니스 스쿨이라는 데서 경영학 공부를 하면서 마지막까지 기대를 못버리고 잡았던 것이 뭐냐 하면 Ethical Resource Management라는 건데요.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 경영에서 윤리적인 것도 하나의 자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잘 관리하면 기업 생산성이 높아질 수도 있고, 시장에서 더 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군의 학문적인 움직임이 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시장 속의 양태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자본의 반공익적이고 사악함을 상쇄하기 위한 아편적인 도구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기부행위라든가 소외계층에 대한 시혜적 차원이죠. 그들의 99가지 치부를 덮기 위한 한가지 방편, 마법수 같은 거죠. -264쪽
기자는 랜턴 같은 존재예요. 말이 난무하는 어둠 속에서 사회를 울리는 메시지들의 실체를 조명해서 의미 없고 소수 개인의 이익만을 위한 얘기는 배제시키고, 음모적인 시각도 배제시켜서 그야말로 청명한 가을 밤 귀뚜라미 울음소리 같은 거, 시냇물소리 같은 거, 그야말로 진짜 우리 공동체 존재와 맞아떨어지는 것들만 흘러가고 넘치도록 만드는 거죠. 그런데 그 랜턴들이 배터리가 없으면 배터리를 교체하거나 버려야죠.-267쪽
아까 저의 분노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통상 윤리라는 것과 도덕성이라는 것은 성인군자의 옷자락 끝에 묻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정당한 분노, 수오지심, 이런 게 의 아닌가요? 대한 민국 농민들이 둘이나 죽었는데 아무도 화 안내잖아요.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던 1987년에는 이한열이라는 학생이 최루탄을 맞아 죽은 걸 가지고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났어요. 그래서 우리 시민사회가 형성된 거죠. 그런데 지금 시민은 어디가 있어요. 농민들 홍콩에서 그 차가운 얼음바다에 뛰어든 것을 보고 다이빙 잘 한다며 비웃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저는 화나고 슬프거든요. 저는 시장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믿어요. 삼성공화국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니까요.-281쪽
우리가 사회적 개혁이다 뭐다 하는 것은 다 개인의 성취를 위해서 그러자고 하는 것인데, 성취할 개인적인 목적과 지양을 스스로 갖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본과 사회가 주어진 가치만을 달성하려고 하고, 이를테면 내가 고시를 패스하겠다거나 자격증 시험을 보겠다거나 하는 사회적인 목표나 시장이 부여하는 것을 소비해나가는 데서만 존재를 확인받는 시장 속의 소비자들만 넘쳐나기 때문에 개인주의도 없을 뿐더러 탐욕스럽게 욕구하는 소비자들만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개인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자유주의도 있을 수가 없죠. 이른바 사이비 자유민주주의가 횡행하고 있지만, 자유가 진정하고 실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처럼 형식적으로만 그치고 있는 거죠. 거론되는 내용들을 보면 스스로 그 사회 구성원들을 소외시키는 결정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자이툰 파병같은 것도 왜 파병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자기자식과 형제를 빼앗기고 있는거죠. 이른바 그 잘난 절차적 민주주의 의 도구를 통해서 집단적 살육을 부추기고 잇는 것이고, 미성숙된거죠. 그래서 전 사회적으로 황우석 같은 거짓과 가짜가 판치는 겁니다. 이상호-286쪽
사실 경제적 궁핍보다 더 나쁜 건 그 궁핍에 대한 경멸이죠. 이건 돈을 좇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자부심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잖아요. 지승호-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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