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아노 Play It Again - 아마추어, 쇼팽에 도전하다
앨런 러스브리저 지음, 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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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페이지에 달하는 볼륨감 있는 책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을 완독하는데 꼬박 한 달이나 걸렸다. 몰입이 쉽지 않았고 글이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저자에게 딱히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집어던지지 않고 꾸역꾸역 읽어나간건 다른 분들도 많이 평하신 좋은 번역. 그래 번역이 좋으니 읽는 맛으로 끝까지 가보자 싶었다. 세상에 살면서 번역맛으로 책을 읽은건 처음이다. 


중년의 아마추어가 무언가에 도전해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면 이 책은 글쎄. 나는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우선 내용적으로 이 책은 저자의 도전에 대해 그다지 상세한 기록을 하고 있지 않다. 나오는 이야기는 '바쁘다 연습할 시간이 없다 오늘도 10분밖에 연습을 못했다' 뭐 이런 것들 뿐이고 가디언지 편집장인 저자가 어떻게 줄리안 어산지와 컨택하고 위키리크스를 보도하게 되었으며...이런 저자의 본업에 대한 이야기가 더 상세하게 나온다. 이걸 이 책의 매력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언론인 지망생이 아닌 관계로 굳이 왜 그런 이야기를 다 읽어줘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중년의 도전'에 방점을 찍기 보다는 '커리어 끝판왕 가디언지 편집장'에 더 방점을 찍는 그런 책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책에는 연습과 도전 자체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늘 바쁘다 연습할 시간이 없다만 무한 반복) 저자가 인맥으로 얼마나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는지가 더 상세히 기술되며, 저자가 그런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피아노 레슨에 대한 조언을 얻는 장면이 계속 이어진다. 왕립음악원 교수, 유명 피아니스트, 심리학자, 음악신경학자 기타 등등 심지어 콘돌리자 라이스까지 등장한다.연습도 안하면서 그런 사람들은 그리 열심히 만나 악보가 외워지지 않는다,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하며 전문적인 레벨의 조언을 구하는 걸 보면, 1세계 백인 남성이 커리어가 끝판왕이면 중년의 위기를 이런식으로 럭셔리하게 타개하는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다. 한국에서도 돈 많고 커리어 좋으면 중년의 위기 돈으로 잘 넘길 수 있지만 콘돌리자 라이스가 묵는 호텔에 아침부터 찾아가 음악 이야기 하며 하하호호 담소를 나눌 순 없겠지. 성공한 1세계 백인남성의 문화자본 멋지다 멋져.   


책을 읽다 보면 이 도전을 하며 이미 책을 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래서 그는 '분량'을 위해 그 유명인들을 일부러 만나고 다닌 것일까? 그렇다 할지라도 참 실망스러웠다. 나는 진솔한 에세이를 보고 싶었던 것이지 엔터테이먼트 쇼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책에는 저자가 피아노 캠프에서 만난 다른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이야기가 슬쩍슬쩍 나온다. 낮에는 교사나 간호사, 택시기사로 일하고 아침이나 저녁에만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마추어들. 나는 겨우 한단락 두단락 나오는 그들의 이야기가 더 진정성있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바빠서 연습할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 백번하고 그런데 유명인사들 만나서 사교활동은 열심히 하고 그랜드 피아노 소ㅑ핑하러 다니고 또 그 그랜드 피아노 놓고 지인들과 실내악 연주할 작은 별장을 신축하는 가디언 편집장의 이야기... 피아노 레슨 선생님도 3명쯤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중국어 공부가 힘들어서 도전성공기 보고 긍정에너지 뿜뿜 충전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니 맥이 풀린다. 중년의 위기 극복과 아마추어의 도전에도 자명한 계급이 존재하는구나 선명히 다가온다. 


일과 삶 밸런스를 찾고자 하는 언론인 혹은 언론인 지망생에게 추천한다. 언론인으로서 성공하면 이렇게 할 수 있답니다. 하지만 웬만하면 이런 걸 책으로 낼 필요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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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nyeok 2024-05-0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현실적인 감상 너무 공감합니다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ㄷㄷ...감사합니다
 
다시, 피아노 Play It Again - 아마추어, 쇼팽에 도전하다
앨런 러스브리저 지음, 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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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사회적‘ 성공을 경험한다. 즉 아이들을 낳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을 획득하며, 어쩌면 명망을 얻기도 하고 각자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그럭저럭 유명세를 누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각자가 가진 개성을 억눌러야만 사회생활에서의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간과한다. 이미 경험했어야 할 인생의 수많은 면들이 흐릿한 기억과 함께 뒤섞여 헛간에 방치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희망을 접긴 이르다. 때로는 이러한 기억들이 회색 잿더미 아래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는 석탄조각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융은 이러한 타오르는 석탄 조각을 끄집어내서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는 것이 바로 중년 이후의 세월이라고 보았다.

음악을 배운다는 것은 치유의 과정과 유사하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서두를 수 없다는 말이다.

클레이 셔키의 신간 인지적 잉여를 읽었다. 다소 모호한 듯한 제목은 미국인들이 멍하니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낭비하는 시간을 가리킨다. 셔키는 사람들이 매년 대략 2000억 시간을 텔레비전 시청에 허비한다고 추산하고 있다.

스타인웨이는 그 숲의 가장 중심부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어내서 사운드보드감으로 씁니다. 중심부는 햇볕을 받기 위해 나무들이 더 높이 자라거든요. 나무가 키가 크다는 것은 더 곧게 자란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사운드보드의 재질로는 최상품이지요. 다른 피아노 제작사들은 아무래도 품질이 떨어지는 가문비나무로 어떻게든 해보는수밖에 없고 말입니다.

살림이 넉넉한 집이라면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 음악가가 함께 연주하는 경우가 적잖았소. 그게 또 하나의 독특한 점입니다. 아마추어들만의 연주도 아니었고, 가족끼리 모여서 음을 맞춰보는 것만도 아니었단 말이지. 누구라도 첫손에 꼽는 정상급 음악가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음악이 있었소. 그럴 때면 우리도 미친 듯이 연습을 하곤 했지. 그러니까 어떤 면으로는 나도 프로만큼 연주 실력을 키우겠다는 포부를 품고 자랐단 말이오. 물론 그렇게 높은 수준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아마추어는 아마추어낄, 전문 연줒는 전문 연주자끼리 따로 논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소. 그러니까 처음부터 높은 기준 같은 게 존재했고, 거기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던 셈이죠. 아마추어들이 프로들의 덕을 볼 수 있는 환경이었달까요. 최소한 히틀러가 집권할 때까진 말입니다.

완벽한 예술은 노력의 흔적이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발라드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도 벌써 석 달이 넘었다. 중간 평가를 한번 해볼까? 아무래도 헤드라인은 코다의 절반가량을 머릿속에 집어 넣었다는 게 될 것 같다. 나로서는 놀랍기 그지 없는 성과다. 무엇보다도 5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에도 이런 능력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는 소심함에 갇혀 지난 40년을 허송했지만, 사실은 내 안에 그런 능력이 계속 존재해왔던 것이다.

16개월간의 여정이 끝난 지금, 두 가지 물음 -시간은 충분한가 와 너무 늦은 건 아닐까-에 대한 답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먼저 첫번째 질문. 그렇다, 시간은 있다. 아무리 정신없이 바쁜 삶이라 할지라도 시간은 있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면 시간이야 여기서 10분, 저기서 10분, 하는 식으로 야금야금 모으면 그만이다. 물론 내 경우에는 비록 업무량은 급증했을지라도 아이들은 모두 성장한 다음이라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간을 냄으로써 삶의 질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업무 압박과 스트레스가 가장 심하던 바로 그때, 자그마한 이스케이프 밸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무엇인가에 100퍼센트 전념함으로써 삶이 균형을 되찾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두번째 물음에 대한 답 역시 마찬가지이다. 2010년 여름만 하더라도 쉰여섯 먹은 두뇌에 새로운 요령을 집어넣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러웠다. 내 두뇌가 평생 보여주지 못한 자질들을 함양토록 하기 위해 1년 반 동안 노력했다. ...따라서 중년에 접어든 지도 한참인 두뇌가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은 신경 회로를 전면 가동해 새로운 과제를 받아들일 유연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기분이 무척 삼삼했다. 그러니까, 아니, 너무 늦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머니께서 옳으셨던 거다. 악기를 배우게 하신 선택이 옳았고, 음악이 삶에 기쁨을 더할 것이라는 혜안이 옳아쓰며, 악기를 다룰 줄 알면 낯선 사람들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깊고 오랜 우정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역시 옳게 하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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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정도 중국 친구의 초대를 받아 중국에 다녀왔다. 결혼식 초대였다. 일주일 내내 먹고 예쁜 것 보고 좋은 사람들과 깔깔거리며 웃고 아주 공주같은 대접을 받고 왔다. 중국식 결혼식 그리고 중국식 대접의 대단함을 몸으로 느꼈달까. 


자영업한지 만 2년이 지나서 나는 내가 자영업자로서 누리는 자유도 값을 쳐서 계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잠들고 싶은 시간에 잠드는 자유, 마음대로 일을 쉴 수 있는 자유, 얼굴 보기 싫은 사람과는 만나지 않을 자유 이런 것들. 이번에 일주일간 장사를 쉬며 매출은 다소 줄어들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그냥 놀고 싶을 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내 멋대로 놀 수 있다는 것이 퍽 만족스러웠다. 직장 다니면 백만원 이백만원을 낸다고 해도 살 수 없는 자유이니까. 내가 내 휴가 쓰겠다는데 며칠이나 눈치를 보고 팀장에게 사유를 눈치보며 말하던 그 감각을 생각하면 지금의 자유가 너무나 소중하다. 물론 지속가능한 자유로운 생활을 위해서는 여러모로 궁리를 하고 노력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일주일 동안 좋은 중국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 있다보니 중국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고 중국어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층 더 강해졌다. 사실 가을즈음까지 열심히 장사를 해서 돈을 모으고 겨울엔 따뜻한 남쪽으로 가서 중국말을 쓰며 살아보고 싶다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겨울을 따뜻한 나라에서 보내고 싶다는 것은 나의 오랜 소망이고, 중국어를 잘 하고 싶다는 것은 나의 실용적 목적이다. 이번에 결혼한 새신랑 친구는 나의 장사를 보더니 이리 말했다 "누나 장사를 할 거면 광저우를 가고 타오바오에서 팔아야 해요. 물건 하나에 80원 100원 남겨도 중국은 사람이 많아서 그게 다 돈이 되는거에요. 한국 인구가 5천만명인데 우리성 사람이 1억명이 넘어요" 내가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에서 기웃거린다 해서 그게 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웃거려 보기라도 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것이 아닐까. 운이 들어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내가 남자친구에게 "저 중국어 이렇게 못해서 안되겠어요. 중국가서 좀 배우고 와야겠어요" 운을 띄웠더니 남자친구는 정색하여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안돼요. 열흘 넘게 못보는 건 안돼요." 이 말을 들은 내 친구들은 요즘 세상에 이런 남자가 어디 있냐며 좋아하였고 내 동생은 '자고로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 어디 남자가 여자 앞길을 막냐'며 화를 내었다. 나는 내 핏줄을 부인하기 어렵다 생각하였다. 어쨌든 나는 갈 것이니까. 


남자친구는 여전히 바쁘다. 그리고 엄마는 나이 든 딸이 오랜만에 연애하는게 그리 좋은지 매일매일 말을 바꾼다. 하루는 '그래 돈 버는게 뭐가 문제냐 열심히 일하고 바쁘면 좋은거지' 그러다가 또 하루는 '그렇게 바빠서는 안되겠다. 결혼하고 평생 그렇게 일만 할거다'이런다. 사실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 같다. 그냥 인형놀이를 하듯이 이렇게도 대어보고 저렇게도 대어보며 소녀처럼 신이 났다. 


귀국하자 마자 밀린 일을 하느라 몸이 탈이 났다. 혹은 일주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탈이 나는 나이든 몸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몸은 정상이 아니지만 꾸역꾸역 급한 일들을 해치웠고 이젠 6월을 살아가야 한다. 언제나 약간은 낭만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기다리며 설레었고 그렇게 잘 살다가 올해 처음으로 내 운명의 노를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내 의지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 보고 싶다고. 그렇게 보낸 반년. 물결의 힘을 느끼며 그래도 스스로 노를 저어보기는 했구나 하고 느낀다. 운명은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내가 편안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내가 노를 열심히 저어서가 아니라 물결이 그리 거세지 않았고 바람이 내가 가고 싶은 방향과 얼추 비슷하게 내가 탄 배를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언제나 나에게 다정하지는 않겠지만 따뜻한 바람이 부는 동안은 감사히 이 행복을 즐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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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가 동생들을 소개시켜 준다며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제비집 요리 해줄게요." 무서워서 못 먹는다 했더니 여자 몸에 좋다며 꼭 만들어주겠단다. 나는 중국 사람의 집에는 제비집 하나쯤은 당연히 있는건가 싶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먹어보기로 하였다. 


남자친구네 집엔 같이 사는 사람도 있고 또 언제든 드나드는 사람들도 많아서 현관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니 꼭 열한켤레의 남자 운동화와 한 켤레의 슬리퍼 그리고 나의 가죽 슬링백 구두 한 켤레가 오밀조밀 모여있게 되었다. 내가 손님이라는 이유로 가만히 앉아 쉬는 동안 네명의 젊은 남자들이 야채를 씻고 면을 삶고 육수를 내고 상을 펴고 분주히 일을 했다. 예쁜 풍경이었다. 


식사가 시작되고 술이 돌자 한 동생이 나에게 이 고기 좀 먹어보라고 내민다. "이제 뭐에요?" "그냥 고기에요." 내가 반쯤 먹자 쳐다보던 동생들이 "누나 그거 오리 혀에요!" 하고 깔깔 웃는다. 남자친구가 만든 시금치 무침과 땅콩소스냉면도 먹었다. 굳이 오늘 준비할 필요는 없었지만 내가 얼마나 요리 잘 하는지 봐야겠다 했더니 준비한 음식들이다. 8시에 시작한 중국식 식사는 새로운 손님이 오고 종류가 다른 술이 테이블 위를 차례대로 돌며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돈 이야기, 장사와 사업 이야기, 가족 이야기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중국식 예절들을 하나씩 보고 듣고 배웠다.


밤이 깊어 드디어 자리가 정리되고 남자들이 요리를 준비할때처럼 다같이 일어서서 정리를 하는데 나는 또 손님이라서 또 술이 취했다는 이유로 남자친구의 침대에 길게 누워 바깥의 그릇소리 물소리 발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들어와 내 옆에 앉더니 말했다. "우리 결혼할까요?" "...저 밥도 못하는데요." "밥은 제가 다 해결할 수 있어요. 예쁜 딸 두 명 낳고 싶어요. 저는 아이한테도 존댓말을 할 거에요. 반말은 할 줄 모르거든요."


지금까지 외국 남자들을 만날때는 이국의 사람이 주는 그 이국적인 정서와 느낌이 좋았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하며 자유롭다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친구와는 한국어로 대화하고 이국적인 느낌보다는 나보다 한 세대 앞선 다른 시대의 사람과 연애를 한다는 느낌이 있다. 그에게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경로이고 나에겐 아직도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그는 다정한 가부장이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아내 어떤 엄마가 될지 모르겠다. 그는 처자식을 위해 기꺼이 고생을 할 사람이지만 나는 내 산후우울증을 상상만 해도 괴롭다. 


남자친구집으로 걸어가며 생각했었다. 언젠가 나는 아 예전에 중국 남자랑 사귀었었고 그 사람 보겠다고 이 동네까지 와서 걸은 적이 있었다고, 그런 추억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지금까지의 연애는 모두 새드엔딩 혹은 새드도 되지 못할 무미건조한 엔딩이라 해피엔딩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남자친구에게는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가 귀여워서 웃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어서 집을 사야 한다며 새벽까지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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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5-17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라일라님. 좋네요. 정말 좋아요...

2017-05-27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미달 2017-05-2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남친이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프로포즈인 것 같은데, 그냥 웃음으로 무마하는거라면..NO인건가요? ^^

LAYLA 2017-05-27 00:50   좋아요 0 | URL
아직 사귄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서로를 잘 몰라요. 남자친구는 제가 허락할때까지 기다린다 하네요.
 

남자친구와 등갈비 먹으러 갔다.


"이런데 데이트할 때 잘 안 오는 거 알아요?"

"왜요?"

"서로 예쁜 것만 보여주고 싶은데 이거 먹으면 못나지잖아요."

"몰랐어요. 잘 못 데려와서 미안해요. 하지만 정말 좋아하면 못난것도 예뻐보여야 하는거 아니에요? 레이라씨 모습 제가 다 받아요(받아 들여요) 걱정말고 드세요." 


밥 먹고 산책을 했다.

"@@씨 지금까지 고생 많이 했잖아요. 앞으로도 고생 더 할 거 같아요?"

"필요하면요."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주차장에 차 넣는 찰나에 전화가 왔다. 주차중이라 했더니

"네. 제가 자기 전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자기는 먼저 잔다 해서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좀 더 있다 자겠다 했더니

"빨리 자 주세요."





안 예쁜 말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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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5-1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AYLA 2017-05-12 18:20   좋아요 0 | URL
락방님 댓글보니 갑자기 와인이 마시고 싶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