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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평점 :
1. 빈지노, 댓글창, 그리고 앙드레아
유튜브 댓글창을 들여다보면 얼굴도, 나이도, 지나온 삶도 모르는 이들의 감정과 생각을 무수히 접하게 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음악의 경우다. 그저 '잘 부른 노래'에는 칭찬이 달리지만, 진정한 명곡의 반열에 든 작품에는 자기도 모르게 토해낸 사람들 각자의 사연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예술이란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네 삶에 점점 더 풍부한 의미의 그물망, 다정한 위안의 그림자를 드리우나보다.
그중 빈지노의 「멀어」라는 곡의 댓글창에서 인상 깊었던, 이름모를 시인들이 남긴 구절을 두 가지 소개한다.
"가사에 그립단 말 한 마디 없는데 그리움이 절절 넘치네."
"'니가 보고싶다'라는 말을 양쪽으로 잡고 4분 7초만큼 늘이면 이 가사가 나올 듯."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비올라를 사랑했단 말 한 번 없는데 그리움이 줄줄 흐르네."
"'주인공 미모의 영욕과 못이룬 사랑'이라는 말 양끝을 잡고 623쪽 분량만큼 늘이면 이 책이 나올 듯."
사흘간 작가의 솜씨에 취해 일상의 행불행마저 무시로 잊고 지냈다. 이제 뒤로 한발 물러나, 이 장편에 담긴 우주를 요모조모 살펴볼 때다.
2. 줄거리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열둘의 나이로 홀어머니와도 떨어져 타향살이를 하게 된 주인공 미모 비탈리아니. 처음, 세상은 비천한 신분에 왜소증까지 타고난 그를 두고 더러운 난쟁이라며 철저히 멸시한다. 그러나 미모에게는 조각가로서의 천재가 있었다. 압도적인 재능에 힘입은 그는 갖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20대가 채 지나기 전에 부와 명예를 거머쥔 예술가로 우뚝 선다.
그 과정에서 미모는 피에트라달바를 근거지로 하는 유력한 귀족 오르시니 가(家)와 깊은 연을 맺게 된다. 오르시니 후작 부처는 세 아들을 두었다. 사고로 요절한 장남을 제외하면, 잔학하고 과격한 차남 스테파노와, 성직자로서의 경력을 착실히 쌓아올려 교황 비오12세의 비서 자리에까지 오른 차분하고 교활한 삼남 프란체스코가 가문을 이끌어가는 두 축이다.
그러나 미모의 삶에 둘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영향을 준 것은 후작 부처의 막내딸, 총명함과 이상주의의 화신인 비올라다. 묘지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늘 비범한 사건과 영감으로 가득했던 그들 동갑내기의 우정은 마흔을 즈음하여 마을을 덮친 대지진으로 비올라가 숨을 거두기까지 평생에 걸쳐 이어진다.
이후 미모는 창작을 멈추고 인적 드문 수도원에 40년 가량 칩거하다가 1986년,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작품은 죽음이 임박한 미모가 자신의 온 생애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3. 몰입의 요소
(1) 성장형 영웅의 모델
작품의 초중반은 무지하고 비천하던 미모가 비올라가 준 온갖 책을 통해 교화되고, 스스로의 재능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미모처럼 난쟁이도 천재도 아닌 나지만, 내세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헤쳐왔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낀 순간이 잦았다. 마음 밑바닥에 단단한 자부심의 뿌리를 박고 그를 정체성의 핵심으로 간직하며 분투하는 모든 이에게, 미모가 보여주는 입지전적 신화는 언제나 피를 끓게 하는 매력적인 서사다.
(2) 사랑, 그 헤어날 길 없는 무한의 춤사위
작중 미모와 비올라의 관계는 비유컨대 쌍성 혹은 행성-혜성 관계의 중간 쯤 어딘가에 위치하지 않을까 싶다. 쌍성이라 말한 것은 서로의 중력에 사로잡혀 서로의 주위를 맹렬히 맴돌면서도 끝내 완전히 합일할 수는 없던 그들의 운명 때문이고, 행성-혜성이라 표현한 것은 서로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시기가 각각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서로를 완전히 끊어버릴 수는 없던 그들 인연의 속성 때문이다.
너무 조금 산 것도, 너무 오래 산 것도 아닌 지금, 돌이켜보면 나 자신도 적잖은 사랑의 희락과 이별의 비참을 맛보았다. 누구와 얼마나 가까웠고 어떻게 멀어졌는가를 일일이 언급할 바는 아니다. 다만 미모와 비올라가 연출하는 여러 사랑의 국면마다 실제의 연애에서 겪고 망각의 서랍 속 갈무리해둔 여러 감정이 의식 위로 예고없이 떠올라 숨이 턱턱 막혀오는 순간이 여러 차례 있었다.
생각컨대 언제 누구와 겪은 어떤 사랑에서도 형언키 어려운 기쁨과 영영 낫지 않을 흉터를 충분히 얻으며 살아왔다. 다시 돌아간대도 결과는 늘 같을 것이다. 그러니 지나갔음에 슬퍼하지 말고, 일어났음에 감사하며 다만 묵묵히 다음의 인연을 기다릴 뿐.
(3) 여러 장르가 혼합된 작품의 성격
이 작품의 성격을 한두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주인공이 설움과 시련을 딛고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초반에는 전형적인 성장소설 내지는 영웅신화의 성격을 띤다. 비올라와의 첫 만남 이후부터 중반까지는 연애소설의 면모가 다분하다. 무솔리니의 집권과 몰락, 로마 가톨릭의 대응 등이 대두되는 중반부 이후부터는 역사극 내지 팩션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인간군상이 서로에게 온갖 술수와 협잡을 벌이며 긴장감이 고조되는 후반부는 영화 『대부』에서와 같은 정치극, 범죄물의 성격도 짙어진다.
하나의 작품에 이토록 많은 성격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자칫 지리멸렬하고 난삽한 결과물을 빚기 쉬운 위험을 내포함은 자명하다. 그러나 주인공 미모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잘 짜여진 내러티브에, 적절한 에피소드를 도처에 삽입하여 읽는 즐거움과 긴장감을 끌어올린 것은 과연 공쿠르상에 부합하는 필력이라고 할 밖에.
4. 단편의 바다를 항해하다 장편이라는 섬을 만나서
온 신경과 관심사가 단편소설의 독해, 이론, 창작에 쏠려 있는 올해인 만큼, 오랜만에 읽은 장편을 만나 산뜻한 환기가 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장편 역시 도전할 영역. 때문에 아무래도 단편과 장편의 전형적인 특징을 놓고 서사전략 면에서 거칠게나마 몇 가지 비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 서사와 세계관의 규모
분량의 제약으로 인해 한두 개의 플롯만 가지고 단일한 효과를 거두는 데 집중해야 하는 단편에 비해, 장편의 호흡은 훨씬 길고 장중하다. 모든 이야기를 한 번의 질주로 단숨에 풀어낼 필요가 없는 까닭에,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보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집필 및 독해가 허용되는 장르임을 새삼 깨닫는다.
(2) 독자의 의문을 해소해가는 속도의 완급 조절
문학은 어디까지나 줄글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단편과 장편 모두에서 독자가 작품을 덮어버리지 않도록 흡인력을 유지하는 것은 작가의 중대과제다. 다만 단편에서는 궁금중을 유발하는 소재의 제시와 개연성의 완성 모두 빠르게 이루어져야 하는 반면, 장편에서는 훨씬 다채로운 시도가 가능하다. 작품의 핵심이 되는 의문을 도입부에 배치한 후 계속 증폭만 시키다가 최후에 몰아서 해소할 수도 있고, 작품을 전개하는 틈틈이 해소하여 최종장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독자 스스로 점차 온전한 상을 완성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3) 삽화의 다양성과 그 기능
극단적으로 말하면, 단편에 쓰인 문장은 단 하나도 낭비없이 오직 주제의식의 표현을 위해서만 기능해야 한다. 위에도 말했듯 분량의 제약으로 인해 빠르게 승부를 봐야 하는 까닭이다. 때문에 끼워넣을 수 있는 삽화의 성격이나 분량 역시 극도로 제한된다. 그러나 장편에서는 한결 느슨한 일관성 아래 다양한 삽화를 시도함으로써 그것들끼리 시너지를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 보다 적절한 기술로 생각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풍부해지는 의미의 창발이 핵심. 따라서 독자 입장에서도 장편을 읽을 때는 모든 문장이 그저 차례로 나열되어 있다는 직선적인 이해는 금물이다. 중요한 에피소드는 잘 표시해 두었다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앞뒤를 충분히 오가며 반복하여 읽어 작가가 의도한 총체를 가능한 구석구석 깊이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한 독법이 아닐는지.
- 이 서평은 인친 @luv_minyun_ 님을 통해 열린책들(@openbooks21) 출판사로부터 지원 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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