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구판절판


신야는 절대 둔재가 아니었다. 만약 반 아이들 모두 집에서 따로 공부하지 않고, 학원에도 다니지 않고, 오직 학교 수업만으로 시험을 치렀다면 아마 신야는 누구보다도 좋은 성적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처럼 거북이가 한 걸음 한 걸음 열심히 앞으로 나갔기 때문에 이긴 게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기어가는 모습을 토끼에게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34쪽

아버지는 "저 녀석이 가고 싶다고 하면 도쿄든 어디든 보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어머니는 '말이야 쉽지만'이라면서 우는 아이도 뚝 그칠 정도의 견적서를 아버지 앞에 보란 듯이 꺼내놓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걸 보려고도 하지 않고 "이 봐, 당신 자신을 한번 생각해봐. 친구라고는 모두 이 규슈에 사는 촌구석 사람들 뿐이지?"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야 그렇죠. 모두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동창들뿐이니"
"그렇지? 나 역시 그래. 그렇다면 요스케만큼은 도쿄에 나가서 좀 더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안 해봤어? 아니 , 이를테면 말이야. 고치 현에서 가다랑어를 잡는 집 아들이나 교토의 요정 집 아들, 아니면 홋카이도에서 낙농을 하는 집 딸이라도 괜찮아. 그렇게 여러 지방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 아냐?"
어머니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제야 상경할 내게 무엇을 챙겨줄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어미와 달리 애비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발로 차서라도 밖으로 내쫓는 것밖에는 없겠지"-58쪽

이래봬도 고등학교 때는 남학생들이 주최하는 미인 콘테스트에서 여러 번 1위를 차지했던 전례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들에게 미움을 받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고토미는 좋겠다. 예쁘지, 성격 좋지" 하며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비행기 띄운다고 떡고물 안 떨어진다"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는 내 자신에게 나름대로 만족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스피커가 고장나 조명이 환하게 켜진 댄스플로어에서 "네게는 괴로움은 없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 또한 없다"라는 악마인지 천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나의 내면에 올려 퍼졌다.
-75쪽

어느날 밤, 고토와 둘이서 해초 팩인가 뭔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고토는 바닥의 이불 속에서였다. 이제 그만 자려고 할 때쯤 "그만 불 꺼"하고 고토가 말했다. 전기 스위치까지는 분명 내 쪽이 가깝긴 했다. 그러나 침대에서 몸을 빼는 것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있지, 형광등에 다는 긴 끈 같은 거 있잖아. 우리도 그걸 사서 달자"
내가 그렇게 제안하자 "손잡이에 작은 돌고래 같은 게 달린거?" 하고 고토가 물었다.
"꼭 돌고래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만, 그런 게 있으면 꽤 편리하지 않을까?" 굳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평소라면 '괜찮겠다'고 쉽게 도의했을 고토가 이 제안에 대해서만은 드물게 반대 의견을 냈다.
"그런데 말야, 편리한 것들은 대체로 품위가 없어" 라고. -129쪽

가게에 걸려 있는 간호사 차림의 겐야 사진을 보고 역시 처음에는 어머니도 누나도 긴장했지만, 두 사람 다 술이 센지 겐야가 늘 마시던 '포 로지스' 검은 병을 함께 비우는 동안 점차 분위기도 누그러져 갔다. 급기야 술이 취한 마리네 마담은 "겐야는 유부남을 좋아했다가 번번이 채이고 말았어요. 한번 당했으면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도무지 세상 사는 요령을 몰랐어요" 하면서 거칠 것 없이 말했는데도, 겐야의 어머니는 "아아, 그건 우리집 혈통이에요. 나도 남의 남자를 빼앗아 그 애 아버지와 결혼했으니까요"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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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품절


나는 모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상상이다. 내가 창조한 인물들은 내 마음 바깥에 존재한 적이 없다. ....물론 소설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아는 체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나는 어쩌면 시대가 도치된 자서전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지금 허구 속에 들여놓은 집들 중의 어느 하나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찰스는 변장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것은 하나의 게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28쪽

-만나뵙게 돼서 기쁩니다, 부인, 참으로 멋진 집이군요
-나한테는 너무 크지요. 이 나이가 되도록 이 집을 지키고 있는 건 다 남편을 위해서랍니다. 그이가 그걸 원했으니까요.
풀트니 부인의 시선은 찰스를 지나 남편 프레더릭의 초상화에 가서 멎었다. 1851년에 세상을 떠나기 꼭 2년 전에 그려진 초상화에는, 그가 현명한 기독교인이고 위엄있고 잘생긴 남자-무엇보다 대다수 남자보다 뛰어난 남자-였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확실히 그는 기독교 신자였고,극도로 위엄을 차리는 인물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나머지는 화가가 상상해서 그려 넣은 것이다. 고인이 된 지 벌써 16년이 지난 풀트니 씨는 대단한 부자이긴 했지만, 보잘것없는 위인이었다. 그가 인생에서 진실로 뜻 있는 일을 한 게 있다면, 그것은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떠난 일이었다. -137쪽

그녀가 갑자기 뒤쪽에 있는 숲으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그는 말을 끊었다. 찰스보다 예민한 그녀의 청각은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그도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그러나 그녀는 어느새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모아 쥐더니, 동쪽으로 50미터쯤 떨어진 풀밭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잔디 위로 약간 높게 뻗어 오른 가시금작 덤불 뒤로 사라졌다. 찰스는 공범자처럼 어쩔 줄 모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좀 더 기다렸다. 그들이 가버린 것을확인한 다음, 그제야 가시덤불을 빙 둘러 돌아갔다. 사라는 덤불 밑에 얼굴을 돌린 채 웅크려 앉아 있었다.
"가버렸소. 밀렵꾼들인가 보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가시금작화는 활짝 피어 있었고, 샛노란 꽃봉오리들이 촘촘하게 매달려 있어서, 초록빛 나뭇잎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기는 그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가 말했다.
"체면을 염려하는 신사라면 라임의 스칼렛 우먼(주홍빛 여자. 창녀라는 뜻)과함께 있는 모습을 들켜선 안 돼죠"
이것도 역시 하나의 단계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조적인 신랄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뒤통수에 미소를 보냈다.
"아가씨한테서 주홍빛을 볼 수 있는 곳은 두 뺨뿐인 것 같은데요"-161쪽

찰스는 창밖으로 목을 길게 빼고, 소금기가 배어 있는 공기를 맡았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네레이데스들이 드나드는 이동식 탈의실의 검은 윤곽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날 밤 깊은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파도가 자갈으 굴리며 속삭이는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훨씬 더 멀리 떨어진 어디에선가, 잔잔한 바다 위를 날며 보금자리를 찾는 갈매기들의 목쉰 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 램프가 켜진 방 한구석에서 의사가 딸그락 거리며 약을 조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찰스는 두 세계- 등 뒤에 있는 따뜻하고 잘 정돈된 문명의 세계와, 눈 앞에 있는 차갑고 어두운 신비의 세계-사이에서 떠돌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우리는 누구나 시를 쓴다. 시인은 다만 언어를 가지고 시를 쓸 뿐이다. -198쪽

아내보다 못난 여자들도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아내보다 잘난 여자들이 있다는 생각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남자도 있다. -296쪽

남자의 허영심은 여자에게 복종받는 데 있었고, 여자의 허영심은 궁극적인 승리를 얻기 위해 복종하는 데 있었다. -344쪽

찰스는 맞은편 보도에 서서, 그 건물을 영원히 없애 버리고 싶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물론 그의 이 같은 거부감 속에는 비열한 면-조상들의 판단과 그 영향력에 자신을 내맡기는 단순한 속물근성- 도 있었다. 그러한 거부감 속에는 게으름-노동에 대한, 판에 박힌 일상에 대한,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데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한 거부감 속에는 비겁한 면도 있었다. 여러분도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찰스는 다른 사람, 특히 자기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 건너편 창문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 출입문을 토?드나드는 사람들-이들과 관꼐를 맺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그를 구역질 나게 했다.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거부감 속에도 한 가지 고상한 요소가 있었다. 돈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는 다윈이나 디킨스 같은 위대한 과학자나 예술가는 되지 못할 것이다. 고작해야 딜레랑트, 한량, 무위도식자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속에는 야릇하고 덧없는 자존심도 섞여 있었다. 쓸모 없는 존재-가시 말고는 암것도 가진게 없는 존재-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은 신사의 수많은 결점을 보충해 주는 유일한 장점, 즉 그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자유라는 생각은 그에게 너무도 분명히 다가왔다. 저 가게에 한 발짝만 들여놓으면, 나는 끝이야.-384쪽

그래, 내가 창녀면 어때요? 사회가 무슨 권리로 나를 욕할 수 있죠? 도대체 사회가 나한테 무슨 혜택을 주었단 말인가요? 그래, 내가 사회에서 소름 끼치는 암적존재라면, 그 병의 원인은 썩은 시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사회의 불행한 사생아가 아닌가요? 예, 잘난 선생님?
- 더 타임스 에 실린 독자의 편지에서 1858.2.24-389쪽

태어날 때부터 노섬벌랜드의 넓은 토지를 주머니에 넣고 나온 토머스 버그 경은, 역사의 흐름조차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단단한 바위임을 입증해 보인 사내였다. 그는 먼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추구해 온 일을 집안 전통에 따라 계속 추구하고 있었는데, 그 일이란 바로 사냥과 술과 오입질이었다. .....그를 클럽에서 제명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광산에서 나오는 석탄을 클럽에 공급하고 있었고, 그것은 선물이나 다름없을 만큼 염가였기 때문에, 언제나 그를 옹호하는 쪽이 우세하곤 했다. 게다가 그의 새오할 방식에는 어딘가 솔직한 데가 있었다. 그는 수치심도 없이 악덕을 저질렀지만, 위선을 부리는 일도 없었다. 그는 남의 실수에 관대한 편이었다. 클럽의 젊은 멤버 가운데 절반은 적어도 한두 번은 그에게 빚을 진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신사답게 상환기일을 무기한 연장해 주었고, 이자도 받지 않았다. ....탁한 푸른색을 띤 그의 눈동자는 당당한 천진난만함, 악마처럼 타락한 인간의 불경스러운 솔직함을 담고 있었다.-390쪽

아아, 그 입술은 벌써 다른 사람들의 입술을 맞췄고, 그 가슴은 나보다 먼저 다른 사람들을 껴안았구나
-매튜 아널드 <이별> 1853-404쪽

"그 점도 깊이 생각해 봤습니다"찰스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저도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 얘기할 때 쓰는 알쏭달쏭하고 위선적인 겉치레 말은 잔뜩 알고 있으니까요. 여자들은 가게에 진열된 물건들처럼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고, 남자들이 가게에 들어가 이것저것 뒤집어 보고 물건을 고르듯 여자를 고르는 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남자들은 이 여자나 저 여자가 내 마음에 든다고 지목하지요.여자들이 이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그 여자들을 점잖고 존경할 만하고 겸손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물건들 중에 하나가 건방지게도 자š燒?변호하고 나서면..."
"짐작건대 그 여자는 아마 더 했을 걸?"
찰스는 의사의 심한 질책에서 슬쩍 비켜섰다
"그 여자는 상류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을 한 것뿐입니다. 상류 사회에서는 결혼 서약을 어긴 여자들이 수없이 많은데도 대부분 용서받습니다. 반면에 그 여자는 주소를 보냈을 뿐인데도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더구나 거기에 대한 책임은 저한테 훨씬 많습니다. 저는 그 여자를 찾아가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 결과를 피할 수 있는 자유도 갖고 있었으니까요"-515쪽

작가는 서로 충돌하는 두 욕망을 링 위에 올려놓고, 그 싸움을 묘사한다. 그러나 승부는 사실 작가가 편드는 쪽이 이기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작가가 승부를 결정하면서 보여주는 솜씨(바꿔 말하면, 승부는 미리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고 독자들을 설득하는 솜씨)와, 작가가 편드는 욕망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보고 작가를 평가한다. 괜찮은 작가, 한심한 작가, 못된 작가, 웃기는 작가...등등-527쪽

그에게 가장 큰 적은 권태였다. 그리고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자기는 파리에 오고 싶지도 않았고 , 그렇다고 이탈리아나 스페인, 아니면 유럽의 어디 다른 곳으로 다시 떠나고 싶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를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도 권태였다. -555쪽

"여긴 어떻게 오셨나요 스미스선 씨?"
주소를 보낸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질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찾아온 것이 전혀 달갑지 않다는 투였다. 그는 그녀의 질문이 언젠가 언더클리프에서 뜻밖에 마주쳤을 때 그가 던졌던 질문과 똑같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이 이상하게도 서로 뒤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는 그가 사정하는 입장이었고, 그녀는 마지못해 들어주는 입장이었다.-574쪽

견딜 수 없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는 그녀를 가난에서 구해 주려고, 이 야릇한 집구석의 야릇한 처지에서 구해 주려고 여기 왔다. 완전 무장을 갖추고, 못된 용을 찔러 죽일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할 그녀가 규칙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그녀는 사슬에 묶여 있지도 않았고, 흐느껴 울지도 않았고, 손바닥을 비비며 제발 구해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장무도회가 열리는 줄 알고 괴상한 옷차림으로 만찬 파티에 나타난 사람 같았다. -577쪽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도안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어서, 격식을 차리는 그의 딱딱한 태도를 저주했다. 그 체면 차리기야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외로운 낮과 외로운 밤들, 눈만 뜨면, 아니 꿈속에서조차 사방에서 그녀의 영혼을 느껴야 했던 그 숱한 나날들......그리고 느닷없이 흐르곤 하던 눈물을 털어놓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었다.-578쪽

그는 자기가 진정으로 그녀보다 뛰어난 점을 알았다. 그것은 타고난 신분도 아니고, 교육 정도도 아니며, 지성도 아니고, 남녀 간의 차이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능력이었고, 이것은 한편으로는 타협에 대한 무능력이기도 했다. 반면에 그녀는 소유하기 위해서만 베풀 수 있을 뿐이었다. -603쪽

신비로운 법칙과 신비로운 선택으로 이루어진 인생의 강물은 황량한 강둑을 지나 흘러간다. 그리고 또 다른 황량한 강둑을 따라서 찰스는 자신의 시체가 실린, 눈에 보이지 않는 상여를 뒤따라가는 사람처럼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임박한,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드디어 자신에게서 믿음 한 조각, 그 위에 자기 존재를 세울 수 있는 진정한 고유성을 찾아냈기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비통하게 그것을 부인하려 하지만, 그리고 그의 눈에는 그 부인을 지지하는 눈물까지 고여있지만, 그리고 사라가 어떤 면에서는 스핑크스 역할을 맡기에 유리한 점을 많이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은 결코 상징이 아니며, 수수께끼도 아니고, 따라서 수수께끼를 푸는 데 실패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깨닫기 시작했다. 인생은 하나의 얼굴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주사위를 한 번 던져 내기에 졌다고 해서 포기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도시의 냉혹한 심장부로 구제할 길 없이 끌려 들어간 인생이 아무리 부적합하고 공허하며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을 견뎌 내야 한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거친 바다로, 사람들 사이를 갈라 놓는 고독한 바다로 다시금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606쪽

......앤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리어트 씨, 제가 생각하는 좋은 친구는 똑똑하고 박식한, 그러니까 화제가 풍부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제가 말하는 좋은 친구라고요."

"당신이 잘못 생각한 겁니다."

그가 점잖게 말했다.

"그건 좋은 친구가 아니라 최상의 친구지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예의범절만 갖추면 누구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교육은 그렇게 훌륭할 필요도 없습니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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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2007-06-12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음. 김영하씨 에세이집에서 링크를 따라 왔는데, 역시 한권의 책은 여러권의 책을 낳는 모양이에요 : )

LAYLA 2007-06-12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해요 ^^ 내이름은 빨강. 읽고 싶어서 중도 예약하려고 보면 언제나 예약초과에요 잉잉 ^^ 김영하씨가 책 소개하는 에세이집 내면 좋을거 같은데 말예요. ^.^
 
뷰티풀 몬스터
김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품절


사실 나에겐 포즈와 실체를 구별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전시장에 태연히 남성 소변기를 들여놓고는 그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역시 전시장에서 누드 모델과 마주 보고 앉아 태연히 체스를 두었던 작가 뒤샹만큼은 ‘진짜’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뒤샹은 전 역사를 통틀어 아티스트로서 가장 유머러스하고 동시에 가장 품격 있는 포즈를 취했는데 그 포즈를 일관성 있게 평생 동안 유지했다는 점에서 진짜였던 것 같다. 나는 무엇보다 모나리자 얼굴에 수염을 그려넣음으로써 르네상스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작에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보냈던 뒤샹의 그 쿨한 표정이 좋다.
그는 숨쉬는 일을 작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는 평상시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며 살았다. "삶은 그리는게 아니고 그냥 사는 것"이라고 했던 뒤샹은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E때에도 일절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매일 체스만 두었다. 오죽하면 그의 아내가 그가 잠든 사이에 아교로 체스판을 붙여버렸을까? 그는 작품이든 명성이든 혹은 사랑이든 가정이든 무엇에도 얽매이는 법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붙잡고 싶어 아등바등거리는 것들에 대해 그는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존재의 품격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144쪽

시공사 순종 혹은 반항의 역사 <아내>
"좋은 아내는 없다. 좋은 아내는 이러해야 한다고 떠들어댄 사람만 있었을 뿐"

-207쪽

마초와 메트로 섹슈얼 사이에는 아주 사소한 차이밖에 없다. 겉으로는 달라보여도 결국은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화려한 꽃무늬 셔츠를 입고도 마음속으로는 "여자란 언제나 남자 몸 아래 깔려 헐떡이는 동물이다"라고 생각하는 스물여덟 살 청년이 있는가 하면, 흰 양말 위에 스포츠 샌들을 신고도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쉰네 살 아저씨도 있다. 말하자면 사람마다 개별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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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07-05-1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님 흰 양말위에 스포츠 샌들을 신고도.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자가 아름답다고 말한 당시 쉰네살 그분은 제가말안해도 아시겠지요 ㅎㅎ

오랜만에 뵈어요. 님 페이퍼는 꼬박 읽고 있어요.^^

LAYLA 2007-05-13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항, 그분이었군요! 전 눈치못채고 있었지 뭐에요 ^,^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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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가장 노릇을 해내고도 나는 담배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드디어 상황은 시작된 것이다. 이제 김단은 나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떨어져 지내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일어난 일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들이 일어날 가망성도 점점 커질 것이다. 하지만 김단은 점점 더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얘기해주지 않게 될 것이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점점 작아질 것이다. 결국 김단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김단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강한 여자로 키워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울면 안 된다. 우는 여자가 남자를 이길 방법은 없다. 어떤 경우에도 울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육체적인 힘도 중요하다. 태권도나 검도를 삼 년쯤 배우면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맞진 않을 것이다. 킥복싱도 좋은데..온갖 생각을 하며 담배연기를 뿐던 나는 재미있는 상상에 접어들어 빙그레 웃었다. 15년쯤 지나 (그보다 훨씬 빠를 수도) 김단이 제 남자 친구와 처음으로 여행을 가는 날, 나에게 어떤 거짓말을 할까. 나는 과연 김단에게 속을 것인가, 아니면 속는 체 할 것인가. 아마 김단은 나를 속일 수 있을 것이다. 강한 여자는 남자를 속일 수 있다.-56쪽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교양은 근대적인 사회에 주어지는 축복이면서 더욱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교양은 그지없는 진보다. (보수적인 교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상인가.)-62쪽

하지만 이미 찬성하거나 이해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끼리 생각을 재확인하고 학습을 늘리는 일이 세상을 개선시키는 건 아니다. 퀴어의 세계는 문화 담론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72쪽

나는 애당초 아들을 갖기를 바라지 ㅇ낳았다. 세상에 한 명의 가해자를 추가하느니 차라리 한 명의 피해자를 낳아 강하게 키우는 편이 낫다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
이른바 '이념적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사나이'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삶의 진보성. 공허한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과 생활의 진보성을 체득하는 일,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성적 차별의 문제였다.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들이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하는 갖은 불공정함을 놓아 둔 채 어떤 진보도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적 차별은 '사나이'로부터 나온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사내다운 사나이가 존재'하기 위해선 언제나 '여자다운 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나이'라는 말은 온갖 범죄, 온갖 악행, 온갖 불평등, 온갖 권위주의, 온갖 파시즘의 면죄부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더러운 세상은 그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사나이들이 뒤섞여 저ㅏㅁ다의 사내다움을 과시하고 경합하는 과정의 부산물인 것이다. -81쪽

'정치 의식'을 초월한 듯 행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경제 의식' 아래에 머물 뿐이다.-91쪽

양심과 정의를 가르치는 일이 학생의 인생을 그르치는 일이 되는 마당에, 선생이 단지 선생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권위를 부여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따져야 할 일은 선생과 학생 사이의 권위적 질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질서이며, 지켜야 할 건 '교권'(선생만의)이 아닌 '인권'(선생과 학생의)이다.-104쪽

지식인의 역할이 바로 거기에 있다.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정보만으로 당대 현실을 파악할 때, 혹은 그게 모두라고 단정할 때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알리는 일 말이다. 지식인은 그런 역할을 해내기 위해 특별히 선택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1999년의 한국을 파악하는 통찰을 얻기 위해 1999년 한국 이외의 모든 것을 공부한다. 연 사람들이 사도세자나 장희빈의 사생활을 역사라 여길 때 지식인들은 프랑스 혁명사나 러시아 혁명사를 배우고, 여느 사람들이 이문열이나 김진명을 독서라 여길 때 지식은들은 구태여 촘스키니 부르디외니 하는 사람들을 읽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122쪽

당대를 파악하는 지식인의 노동은 용접을 하는 용접공의 노동이나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노동처럼 사회적으로 분담된 하나의 역할일 뿐이다. 지식인의 노동이 원래부터 다른 모든 노동보다 존귀한 건 아니다.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원래부터 존귀한 것은 없다. 사회가 지식인에게 육체노동의 의무를 면해주고 존경과 명예를 준 것은 지식인이 원래 존귀해서가 아니라 당대를 파악하는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지식인에게 등대의 역할, 이정표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 지식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상한 삶과 세상의 존경과 명예가 제가 나면서부터 똑똑하고 잘나서 얻은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들은 지식인 세계를 형성하고 그들끼리만 소통 가능한 암호언어 (그들이 지적 대화라고 부르는)로 그들의 서푼짜리 허영심을 충족시킨다. 그들은 또한 그 서푼짜리 허영심의 냄새나는 퇴적물을 지성이니 교양이니 인문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몸네 두른 채 당대 현실로부터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짓는다.-123쪽

'군부독재정권의 억압에 신음하던 국민들', 혹은 '일천이백만 노동자'라는 말은 지식인들의 레토릭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한국인이 그런 일에 신음할 만큼 근대적인 시민의식을 가질 기회가 있었던가. 한국 노동자들은 일천이백만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라는 근대적인 계급의식을 가질 기회가 있었던가. 한국인들은 봉건사회에서 바로 식민통치, 그리고 극우 파시스트 치하에서 3대 이상을 살아왔다. 그런 한국인들이 파업하는 지하철 노동자와 자신들이 같은 노동자라는 걸 개닫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노동자인 그들은 우습게도 "노동자 새끼들 땜에 내가 못 살겠다."고 분노하곤 한다. -131쪽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절대선인 사람들과 절대악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기성찰이 가능한 사람들과 자기성찰이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이천 년 전 예수가 보여주었듯, 세상을 바꾸는 삶이란 대개 자신을 망가트리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160쪽

사회적 사건에 대한 관용은 사회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상식-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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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이야기
신경숙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8월
품절


슬픈 영화는 날 울려요

10분 후면 그 남자가 찻집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그 남자는 지난 8년 동안 약속시간을 1분도 늦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조금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가 약속시간이 되면 찻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번 정확했다.
J는 30분 전에 이 찻집에 왔다. 그 남자와 알고 지내면서 단 한번도 없던 일이대. 대부분 그 남자보다 조금 늦게, 아니면 조금 이르게 였으나, 조금 이르게라고 해도 10분 이상 빨리 온 적은 없었다.
J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약속시간 3분 전이다. 그 남자는 오늘도 다른 때오 ㅏ다름없는 마음인가 보았다. 8년의 세월이 마침표를 찍는 날인데도 말이다.-74쪽

그 남자는 정확한 시간에 역시 정확하게 찻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남자는 J를 향해 빙긋이 웃었으나 J는 외면해버렸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지?
J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태연한 그 남자의 태도가 자꾸만 마음에 거슬렸다. 그래서 그 남자가 차 주문을 하러 온 찻집 종업원에게, 홍차 둘! 했을 때 J는 아니오, 저는 주스 주세요 파인애플 주스로!했다. 그 남자의 동공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8년 동안 찻집에서 그 둘의 차 주문은 언제나 홍차 둘이었고, J는 단 한번도 그 홍차 둘에 다른 의견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
따끈한 홍차 한 잔과 차가운 파인애플 주스가 그들 앞에 놓여졌다. J는 주스를 끌어당겨 한 모금 마셨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속으로 주스는 살려울처럼 파고들었다.
"그래 물건들은 다 챙겨왔어?"
"그래"
그 남자는 찻잔을 한 쪽으로 밀어놓고서 가방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너도 다 갖고 왔지?"
"그럼"
J도 옆 의자 위에 얹어두었던 가방을 그 남자가 올려 놓은 가방 옆에 올려놓았다. J가 들고 온 것이 훨씬 더 컸다.-74쪽

"빠진 것 없지?"
"내가 알고 있는 한은 없다. 너야말로 뭐 빠뜨린 거 없냐?"
"소모품들 받은 건 다 써버려서 다시 되돌려주고 싶어도 없어졌으니 할 수 없는 거 아니니?" 설마 전에 제주도에 있을 때 귤 한 상자 보내준 거며, 생일날 보내준 과자 이런 것까지 다시 받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받을 수 있으면 다 받았으면 좋겠지만 먹고 쓰고 그래서 없어진걸 낸들 어떡하겠냐?"
"고맙네"
J는 괜히 서러워졌다. 저 남자가 8년 동안 내 옆에 있었던 그 남자가 맞는가?
캠퍼스 커플로 만나서 커피 한잔을 같이 나눠마시고, 방학 때마다 매일 하루 한 통씩 편지를 써 보내던 그 남자,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자기 아내가 될 줄으 알고 있었다던 그 남자, 긴 머리의 여자만 보면 모두 나 같고,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한들 나와 함께 볼 수 없으면 무의미하다던 그 남자, 무덤 속에 들어갈 때까지 그 마음 변치 않겠다고 말하던 그 남자가 맞는가? 결혼도 안했는데 학교 졸업 후 직장을 갖자마자 첫 월급부터 지금까지 월급봉투를 꼬박꼬박 J에게 갖다주며 용돈을 타가던 그 남자가 맞는가? 그 돈으로 선물까지 하던 그 남자. 2주일 전까지 그들은 연인이었다. J가 혼자서 연극을 보러가기 전까지만 해도.-76쪽

<슬픈 영화>라는 노래가 있다.
한 여인이 약속이 있다는 애인의 말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갔는데 그 영화관에서 다른 여인과 함께 영화를 보러 온 애인을 만나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노래.
J가 본 것은 슬픈 영화는 아니고 슬픈 연극이었다.
J가 연극표 두 장이 생겨서 그 남자와 함께 갈까 하고 전화를 했는데 연극 얘기도 꺼내기 전에 약속이 있다는 것이었다. J는 말도 못 꺼내보고 다른 친구와 함께 소극장엘 갔다. 그러고선 슬픈 연극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연극이 시작될 무렵 친구가 옆구릴 툭툭 쳐서 보니까 그 남자가 웬 여자와 함께 저만큼 앞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둘은 아주 다정하게 팸플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J는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서 남자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남자가 돌아다봤을 때 J는 뛰쳐나와 버렸다. 세상에 그 남자가 저럴 수가. -77쪽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변명했다. 제주도로 발령이 나 근무를 했을 때 옆자리에 앉았던 동료인데 모처럼 휴가를 얻어 서울에 온 참에 연극을 꼭 한 편 보고 돌아갔으면 해서 같이 구경하러 간 것일 뿐이라는 거였다. <슬픈 영화>라는 노래에서는 울며 돌아온 여인에게 어머니가 왜 우느냐고 물으니까 슬픈 영화는 늘 날 울려요, 라고 대답하지만 J의 대답은 너 같은 위선자하고는 다시는 얼굴을 마주대하고 싶지 않아, 였다.
"뭐 위선자?"
어떻게 해서든J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던 그 남자는 위선자라는 말에는 참을 수가 없어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쳤다. 그 마음대로의 결과가 지금 이 자릴 만든 것이었다. 그만 만나자, 이젠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되자, 그래도 정리해야 될 것은 정리해야 되니까 그동안 서로 선물 줬던 것이며, 같이 찍었던 사진이며, 각자 가지고 있는 상대의 독사진들을 가지고 한 번 만나자, 이것이었다.
분한 마음에 상황을 이렇게 진전시키기는 했지만 J는 그 남자가 정말 위선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가 위선자라면 자기는 더한 셈이었다. 그가 제주도로 내려가 있던 그 해의 생일날, 사무실 책상위에는 그가 제주도에서 보내온 축전과 과자가 놓여 있고, 지하 다방에서는 다른 남자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가.
-77쪽

J는 새삼 그 남자의 존재가 자신의 생활 어디에나 속속 들어와 있다는 것을, 그 남자가 준 것들을 정리하면서 깨달았다. J 의 방에 있는 책과 스카프와 스탠드....그 남자가 자신에게 준 것들 투서잉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더구나 그 남자가 J에게 꼬박꼬박 받아다 준 월급 저축앤은 상당액이었다. 결혼하게 되면 그 돈으로 방을 얻든 집을 얻든 할 것이었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젯밤 내내 J는 그 통장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해야 될까를 생각했다.
내것도 아닌데 돌려줘야지.
J의 마지막 결심은 돌려주자, 였다. 결국은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마치 그남자의 아내나 되는 듯이 기뻐하며 저축을 했던 자신을 생각하니 어이엇ㅂ기도 했다.
"나랑 헤어지게 되어 너희 부모님이 제일 좋아하시겠다!"
"갑자기 부모님은 왜 끄집어내?"
"갑자기는 무슨 갑자기야! 나 못마땅해 하셨잖아. 순 서울놈이라 말 붙이기가 힘들다고 하셨대며?"
"연극 함께 보러 갔던 그 여잔 제주도 토박이야?"
",,,,"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해"
그 남자는 J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혼자 종알거리던J도 머쓱해져, 남자가 가져온 가방을 무릎으로 끌어내리고,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을 그 남자 앞으로 가까이 밀었다. 그남자도 가방을 탁자에서 끌어내려 옆의자에 내려놓았다. -78쪽

"그리고 나한테 갖다 준 월급은,,,"
갑자기 그 남자가J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너 가져..그게 좋겠어"
J는 멍하니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 가지라고?
J는 콧잔등이 찡해왔다. 그걸 도로 내놓으라고 할 남자는 아닌 줄 알았짐나 막상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J는 마음과는 달리 깍쟁이 같은 목소리로 팩 소릴 쳤다.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이걸론 모자랄 것 같애. 생각해봐. 지난 세월 동안 당신한테 들인 시간과 공정이 얼만데 이 정도가지고 되겠어? 더 내놓아야 되겠어. 이것 갖고는 안되겠어!"
",,,,,,?"
"왜? 내가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 같애?"
",,,,,,?'
"왜 그렇게 빤히 봐?"
"나 돈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내 월급은 그동안 너 다 갖다줬잖아. 그게 다야....더 줄 돈이 어딧어!"
"그럼 못 헤어지겠네 뭐"
얼마 후, 두 사람은 다른 찻집으로 자릴 옮겼다.
종업원이 차 주문을 받으려 왔을 때 그 남자는 홍차 둘, 이라고 말했고 J는 그저 그 남자의 와이셔츠에 묻어 있는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떼내어 주었다. J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남자 부자였다면 큰일날뻔했네.-80쪽

복사꽃 같은 시절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아편 같은 것이지. 그 아름다운 순간들을 차분히 녹여내지 못하고, 언제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욕망과 저울질하는 시절이지. 내 꽃 같던 시절에 그 남자는 어쩐지 마음에 반도 안 찼었지. 따로 다른 이를 만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건만 다만 그와 만나고 있는 순간들은 지나가야 할 찰나적인 것만 같았었어.
그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눈여겨보고, 그 남자와 여기 앉아 있으면서도 언제나 저기를 생각했었지. 이 사람 아닌 다른 사람, 이곳 아닌 다른 곳, 이것말고 저것. 그 시절에 나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것에 취해 있었어. 견디다 못해 그가 다른 이와 결혼을 한다고 했을 적에도 아무렴 어떠랴 했지. 그래, 그는 어떤 시골마을이고 난 기차를 타고 거길 떠나야 한다고 말이야. 죽을 때까지 내 편이라고 그가 말할수록 나는 저편의 그 무엇에 끌려서 그 남자의 순정을 모른 척했어. 아니야. 모른 척한 게 아니고 나는 정말로 몰랐어. 그러다가 어떤 허깨비 같은 이가 내게 잠시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그의 곁을 완전히 떠나버렸지. 하지만 너무 잠시였어. 그 허깨비와 헤어져 돌아와보니 그는 이미 결혼을 해버렸더군. 그가 이제 내 손안에 있지 ㅇ낳다는 사실. 그가 이제 이곳 사람이 아니고 저곳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언제나 이것말고 저것을 눈여겨보는 것이 내 마음이었는데, 바로 그가 이제 저쪽에 있고 보니 그제야 내 눈에 그가 들어오는 거야.-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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