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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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가장 노릇을 해내고도 나는 담배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드디어 상황은 시작된 것이다. 이제 김단은 나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떨어져 지내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일어난 일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들이 일어날 가망성도 점점 커질 것이다. 하지만 김단은 점점 더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얘기해주지 않게 될 것이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점점 작아질 것이다. 결국 김단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김단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강한 여자로 키워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울면 안 된다. 우는 여자가 남자를 이길 방법은 없다. 어떤 경우에도 울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육체적인 힘도 중요하다. 태권도나 검도를 삼 년쯤 배우면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맞진 않을 것이다. 킥복싱도 좋은데..온갖 생각을 하며 담배연기를 뿐던 나는 재미있는 상상에 접어들어 빙그레 웃었다. 15년쯤 지나 (그보다 훨씬 빠를 수도) 김단이 제 남자 친구와 처음으로 여행을 가는 날, 나에게 어떤 거짓말을 할까. 나는 과연 김단에게 속을 것인가, 아니면 속는 체 할 것인가. 아마 김단은 나를 속일 수 있을 것이다. 강한 여자는 남자를 속일 수 있다.-56쪽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교양은 근대적인 사회에 주어지는 축복이면서 더욱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교양은 그지없는 진보다. (보수적인 교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상인가.)-62쪽

하지만 이미 찬성하거나 이해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끼리 생각을 재확인하고 학습을 늘리는 일이 세상을 개선시키는 건 아니다. 퀴어의 세계는 문화 담론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72쪽

나는 애당초 아들을 갖기를 바라지 ㅇ낳았다. 세상에 한 명의 가해자를 추가하느니 차라리 한 명의 피해자를 낳아 강하게 키우는 편이 낫다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
이른바 '이념적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사나이'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삶의 진보성. 공허한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과 생활의 진보성을 체득하는 일,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성적 차별의 문제였다.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들이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하는 갖은 불공정함을 놓아 둔 채 어떤 진보도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적 차별은 '사나이'로부터 나온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사내다운 사나이가 존재'하기 위해선 언제나 '여자다운 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나이'라는 말은 온갖 범죄, 온갖 악행, 온갖 불평등, 온갖 권위주의, 온갖 파시즘의 면죄부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더러운 세상은 그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사나이들이 뒤섞여 저ㅏㅁ다의 사내다움을 과시하고 경합하는 과정의 부산물인 것이다. -81쪽

'정치 의식'을 초월한 듯 행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경제 의식' 아래에 머물 뿐이다.-91쪽

양심과 정의를 가르치는 일이 학생의 인생을 그르치는 일이 되는 마당에, 선생이 단지 선생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권위를 부여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따져야 할 일은 선생과 학생 사이의 권위적 질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질서이며, 지켜야 할 건 '교권'(선생만의)이 아닌 '인권'(선생과 학생의)이다.-104쪽

지식인의 역할이 바로 거기에 있다.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정보만으로 당대 현실을 파악할 때, 혹은 그게 모두라고 단정할 때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알리는 일 말이다. 지식인은 그런 역할을 해내기 위해 특별히 선택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1999년의 한국을 파악하는 통찰을 얻기 위해 1999년 한국 이외의 모든 것을 공부한다. 연 사람들이 사도세자나 장희빈의 사생활을 역사라 여길 때 지식인들은 프랑스 혁명사나 러시아 혁명사를 배우고, 여느 사람들이 이문열이나 김진명을 독서라 여길 때 지식은들은 구태여 촘스키니 부르디외니 하는 사람들을 읽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122쪽

당대를 파악하는 지식인의 노동은 용접을 하는 용접공의 노동이나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노동처럼 사회적으로 분담된 하나의 역할일 뿐이다. 지식인의 노동이 원래부터 다른 모든 노동보다 존귀한 건 아니다.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원래부터 존귀한 것은 없다. 사회가 지식인에게 육체노동의 의무를 면해주고 존경과 명예를 준 것은 지식인이 원래 존귀해서가 아니라 당대를 파악하는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지식인에게 등대의 역할, 이정표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 지식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상한 삶과 세상의 존경과 명예가 제가 나면서부터 똑똑하고 잘나서 얻은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들은 지식인 세계를 형성하고 그들끼리만 소통 가능한 암호언어 (그들이 지적 대화라고 부르는)로 그들의 서푼짜리 허영심을 충족시킨다. 그들은 또한 그 서푼짜리 허영심의 냄새나는 퇴적물을 지성이니 교양이니 인문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몸네 두른 채 당대 현실로부터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짓는다.-123쪽

'군부독재정권의 억압에 신음하던 국민들', 혹은 '일천이백만 노동자'라는 말은 지식인들의 레토릭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한국인이 그런 일에 신음할 만큼 근대적인 시민의식을 가질 기회가 있었던가. 한국 노동자들은 일천이백만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라는 근대적인 계급의식을 가질 기회가 있었던가. 한국인들은 봉건사회에서 바로 식민통치, 그리고 극우 파시스트 치하에서 3대 이상을 살아왔다. 그런 한국인들이 파업하는 지하철 노동자와 자신들이 같은 노동자라는 걸 개닫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노동자인 그들은 우습게도 "노동자 새끼들 땜에 내가 못 살겠다."고 분노하곤 한다. -131쪽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절대선인 사람들과 절대악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기성찰이 가능한 사람들과 자기성찰이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이천 년 전 예수가 보여주었듯, 세상을 바꾸는 삶이란 대개 자신을 망가트리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160쪽

사회적 사건에 대한 관용은 사회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상식-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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