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구판절판


신야는 절대 둔재가 아니었다. 만약 반 아이들 모두 집에서 따로 공부하지 않고, 학원에도 다니지 않고, 오직 학교 수업만으로 시험을 치렀다면 아마 신야는 누구보다도 좋은 성적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처럼 거북이가 한 걸음 한 걸음 열심히 앞으로 나갔기 때문에 이긴 게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기어가는 모습을 토끼에게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34쪽

아버지는 "저 녀석이 가고 싶다고 하면 도쿄든 어디든 보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어머니는 '말이야 쉽지만'이라면서 우는 아이도 뚝 그칠 정도의 견적서를 아버지 앞에 보란 듯이 꺼내놓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걸 보려고도 하지 않고 "이 봐, 당신 자신을 한번 생각해봐. 친구라고는 모두 이 규슈에 사는 촌구석 사람들 뿐이지?"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야 그렇죠. 모두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동창들뿐이니"
"그렇지? 나 역시 그래. 그렇다면 요스케만큼은 도쿄에 나가서 좀 더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안 해봤어? 아니 , 이를테면 말이야. 고치 현에서 가다랑어를 잡는 집 아들이나 교토의 요정 집 아들, 아니면 홋카이도에서 낙농을 하는 집 딸이라도 괜찮아. 그렇게 여러 지방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 아냐?"
어머니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제야 상경할 내게 무엇을 챙겨줄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어미와 달리 애비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발로 차서라도 밖으로 내쫓는 것밖에는 없겠지"-58쪽

이래봬도 고등학교 때는 남학생들이 주최하는 미인 콘테스트에서 여러 번 1위를 차지했던 전례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들에게 미움을 받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고토미는 좋겠다. 예쁘지, 성격 좋지" 하며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비행기 띄운다고 떡고물 안 떨어진다"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는 내 자신에게 나름대로 만족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스피커가 고장나 조명이 환하게 켜진 댄스플로어에서 "네게는 괴로움은 없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 또한 없다"라는 악마인지 천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나의 내면에 올려 퍼졌다.
-75쪽

어느날 밤, 고토와 둘이서 해초 팩인가 뭔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고토는 바닥의 이불 속에서였다. 이제 그만 자려고 할 때쯤 "그만 불 꺼"하고 고토가 말했다. 전기 스위치까지는 분명 내 쪽이 가깝긴 했다. 그러나 침대에서 몸을 빼는 것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있지, 형광등에 다는 긴 끈 같은 거 있잖아. 우리도 그걸 사서 달자"
내가 그렇게 제안하자 "손잡이에 작은 돌고래 같은 게 달린거?" 하고 고토가 물었다.
"꼭 돌고래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만, 그런 게 있으면 꽤 편리하지 않을까?" 굳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평소라면 '괜찮겠다'고 쉽게 도의했을 고토가 이 제안에 대해서만은 드물게 반대 의견을 냈다.
"그런데 말야, 편리한 것들은 대체로 품위가 없어" 라고. -129쪽

가게에 걸려 있는 간호사 차림의 겐야 사진을 보고 역시 처음에는 어머니도 누나도 긴장했지만, 두 사람 다 술이 센지 겐야가 늘 마시던 '포 로지스' 검은 병을 함께 비우는 동안 점차 분위기도 누그러져 갔다. 급기야 술이 취한 마리네 마담은 "겐야는 유부남을 좋아했다가 번번이 채이고 말았어요. 한번 당했으면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도무지 세상 사는 요령을 몰랐어요" 하면서 거칠 것 없이 말했는데도, 겐야의 어머니는 "아아, 그건 우리집 혈통이에요. 나도 남의 남자를 빼앗아 그 애 아버지와 결혼했으니까요"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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