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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ㅣ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1학기 때 한국으로 교환학생 온 미국애, 캐나다애랑 언어교환하느라 매주 2번씩 만났었다. 법적으론 미국애, 캐나다애이지만 피는 다 100%한국인 애들이라 그당시 나는 스스로 인지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한국을 (당연히) 좋아하리라 전제하고 있었다. 그간 쿨한척 하고 있었지만 역시 어쩔수 없는 촌스런 한국인이였던 것이다. ㅉㅉ 한강 얼마나 좋아? 덕수궁 얼마나 좋아? 이런 마음이었고(지방에서 상경한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 경복궁을 가보지 않았다는 그들의 말을 듣고선 '경복궁을 보여주고 싶다'란 순도 100프로의 마음으로 소풍을 추진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니 불과 몇달전의 일이지만 어찌 그리 순진했을까 싶다.
어쨌든, 감 잡으셨겠지만 그들은 한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느정도 혐오하고 있었다. 사소하게는 왜 한국 여자들은 그처럼 외모에 신경을 쓰냐부터 시작해서 (왜 여자밖에 없는 여대에서 다들 하이힐 신고 미니스커트 입냐고 짜증냄) 인턴하러 갔더니 상사 눈치보느라 퇴근도 안시킨다고 이런 나라에선 살수가 없다 그러질 않나, 똑똑한 인재가 유학나갔다가 군대문제때문에 국적을 바꿔버리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유학간 애들은 다 군대면제를 시켜줘야 한다 그러질 않나(결국 한국은 시스템이 구지단 이야기.)
처음 한달간은 어리버리하게 이것이 다 그 잘난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고 그들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던것 같다. 왜 한국 여자들이 그토록 외모에 집착하는지, 왜 군대문제가 엄청나게 민감한지 등등. 내가 한계 혹은 본질을 알아차린건 그들이 "한국애들은 공부를 안해 다들 술집에나 가고"이런 말 했던 때였던것 같다. 맨날 교환학생끼리 모여서 술집이나 돌아다니니 보는 애가 술집에 있는 애밖에 더 있겠냐? 대학교 중도에서 밤새며 한국 대학생들의 향학열을 관찰할 생각은 안하고 술집만 싸돌아 댕기며 '한국인들은 이러니까 안돼~'이러고 있으니 짜증이 확 치솟았던 것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거 아님?
어쨌든, 이들과의 언어교환은 나에게 언어교환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었다. 바로 '필터'의 힘이다. 얘네들 눈에 한국이 뭘 해도 구질구질한 나라인것처럼, 한국인들 눈에 미국이나 기타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뭘 해도 번쩍번쩍 좋은 나라이겠지. 뭘 봐도 다 그럴듯해 보이고, 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것처럼 보이고, 다 선진적으로 보이고, 다 쿨해보이고 뭐 그렇겠지. 요즘 쏟아져 나오는 여행기또한 다 그렇지 아니한가? 뭐가 좋아, 뭐가 이뻐, 뭐가 아름답더라 뭐뭐뭐뭐 ..그래 난 깨달은 것이다. 한국인들의 눈에 그렇게 멋져 보이는 미국 캐나다 호주 유럽도 사실 우리 뇌에 각인된 '환상'과 '선입견'을 벗겨놓고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별로인 곳일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바라보고 있을수도 있다는 것을. 싸이 파도타기 하면 몇 명에 한명꼴로 가지고 있는 '유럽여행' 사진첩 폴더...유럽배낭여행은 대학생의 필수코스가 된지 오래... 그래 분명히 뭔가 이상했다. 미의 스탠다드가 서구에 치우쳐져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째서 유명 관광지나 미술관에 대해 '존나 구려'라고 말하는 사람(책)이 하나도 없었던 거지??????????/?/??? 우리는 그렇게 획일적인 취향을 가진 존재였던가???????
안타깝게도, 오륀지 교육을 받으며 영어에 목매다는 풍토에서 자란 한국인이 서구를 바라보는 객관적 시각을 가진다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일게다. 그간 무조건 유럽이 너무 좋아! 스페인이 좋아! 뭐 이런 책만 줄창 나온건 이런 배경이 있었겠지....생산할수 있는 콘텐츠나,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거기에 집중되어 있었을테니. 아마 여행기에서 불평을 늘어놓는다는건 한국인들의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었을테다. 어떻게 감히 루브르의 그 아름다운 작품에 대해서 불평을,.???!?!/ 뭐 이런거 아닐랑가. 국립현대미술관은 가본적 없어도 루브르가는데는 목숨거는게 트렌드인디욘.
빌 브라이슨의 책은 그런 점에서 한국인들에게 '가치'를 지닌다. 꿀릴것없는 미국인이 쓴 유럽 여행기...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유럽이 미국인에게 가차없이 '구린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 이 책의 에센스라고나 할까. 이 책 아니면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아마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은 빌 브라이슨의 유머에 낄낄대며 웃을테다. 근데 한국에서만 자란 나는 솔직히 빌 브라이슨 유머 별로 재미없었다. 지루하기도 하였다. 뭐 웃기라고 한 건줄은 알겠는데...everybody likes humor but everybody likes different humor 뭐 이런말도 있지 않나. 나는 당신이 말하는 미국식 유머를 알아듣질 못하겠시욘.. 성적인 농담은 불쾌하기만 했시욘..그치만 오스트리아에서 모차르트 기념품만 판다고 망할 모차르트!라고 할 땐 정말 미친듯이 웃었다는거^^ 한국인이라면 절대 쓰지 못할 여행기란 건 이런점에서. ^^
물론 부족한 점도 있다. 사실 이 책은 여행기로서의 별점만 매기자면 별 2-3개 정도밖에 못 주겠다. 빌 브라이슨 혼자 어느장소로 이동해서, 호텔잡고, 거리 좀 돌아다니다가, '흠 떠나고 시포' 이러면서 다른 도시로 떠나는 여정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한 도시에 머무르는 기간이 며칠밖에 안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거기서 친구를 사귀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미국인 답다), 감상이란 것도 그가 구사하는 말장난이나 유머에 비하면 비중이 미미한 것인지라... 앞서 말했듯이 성적인 농담중 불쾌한것도 한두개가 아니었다. 별4개는 그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단 점에서 준 것이다.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면 유럽도 이처럼 문제투성이로 보일수 있구나. 쪽팔리게 유럽가서 침 질질 흘리면서 역시 멋져..한국은 구져..이런 생각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해주었다. 책을 구입할때, 아름다운 여행기라던지 감상이 묻어나는 여행기라던지 이런건 절대 기대하지 마시라.
+ 빌 브라이슨이 미국인이 아니었으면(=유럽인으로서 미국을 까대는 내용이었으면) 2배쯤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미국인이 유럽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것보다 유럽인이 미국에 대해 불평 늘어놓는게 더 공감도 잘 갔을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