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arthian Tales 어션 테일즈 No.3 - Be My IDOL
김보영 외 지음 / 아작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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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자가 ‘모른다‘고 가정하고 글을 쓰는 태도는 곤란하다고 본다. 독자는 작가보다 많이 안다. 단지 집중하지 않을 뿐이다.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쓰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그보다는, 당신이 하는 말에 아무 관심이 없으며, 그래서 집중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도 귀를 기울이고,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이해하도록 쓰라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 - P19

얼마 전 지브리 스튜디오 프로듀서가 쓴 콘텐츠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읽었다. 저자는 지브리에 입사한 뒤 회사에서 ‘정보량을 조절한다‘라는 말을 계속 듣는다. 정보량이 많으면 사람들이 여러 번 다시 찾는 작품이 되는데, 대신 어려워져서 아이들이 보기 힘든 작품이 되므로 정보량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그런데 정보량이 뭡니까?"하고 묻자, 다른 프로듀서가 "그림의 정보량이란 선의 수입니다."하고 간명하게 답한다. 말하자면 그림에 선의 수가 많으면 정보량이 많아진다. - P21

인간이 한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정보의 수는 극히 적으며, 수월하게 기억할 수 있는 정도는 1-2개로 보는 편이 좋다. 그렇다면 어려움의 관건은 정보의 내용보다 수라는 가설은 매우 그럴듯하다. - P21

제 글을 쓰면서도, 다른 분들 글 읽는 심사 하면서도 뼈저리게 생각했던 게 있어요. 요즘처럼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굳이 책을 찾아 읽는 독자들은, 작가보다 몇 수 위예요. 작가로서 제가 알고 있는 걸 독자들은 이미 다 간파하고 있죠. 트릭, 기법, 반전이랍시고 집어넣는 것들, 모두 다, 그래서,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거나, 상상력을 뛰어넘겠다거나, 머리싸움에서 이기겠다는...그런 야심은 좀 버리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 욕심을 가진 글은 너무 뻔히 의도가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실현도 불가능해요.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아도 그 분이 저보다 이야기의 트릭을 잘 알고, 백 배 천 배 똑똑해요. 게다가 작가가 글을 아무리 잘 써도 화려한 시각효과,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이길 순 없죠. 그러니 베스트셀러의 꿈도 버리시는 게 현명하겠지요. 그런 시대예요. -황보라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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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즈워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0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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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사람을 사귀면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확인시키기 위해 자기 업적을 전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미국인 특유의 열망을 지녔다.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레벌레이션이요. 이제 그만두고 세상을 둘러볼 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즈워스라고 합니다." - P64

새로운 것은대체 무엇인가? 그림? 엔진에 관해 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림에 관해 어눌하게 이야기할 까닭이 있을까? 언어? 할 말이 없는데 3개국어를 할 줄 아는 게 무슨 소용인가? 예절? 팰맬에서 스치던 잘난 귀족이나 공직자가 궁전에 으스대며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샘은 궁전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고작 왕이라 불릴 권리를 물려받은 사람보다는 유닛의 앨릭 키넌스(미국의 사업가)가 더 존경스러웠다! - P95

자네, 자네 자신이 미국에서 더 행복한지 유럽에서 더 행복한지 마음을 정하고 거기서 지내게! 나는 유럽 카페에 가서 웨이터들에게 햇볕이 드는 자리를 달라고 사정하는 것보다는 유럽 은행가들이 찾아와 대출해달라고 사정하는 게 더 좋네! - P266

벌 수 있는 돈은 한 푼 빠짐없이 번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브렌트, 나는 늘 뭔가 만들고 싶었다. 은행예금 말고도 뭔가 남기고 싶었어. 네가 채권을 팔면 그러지 못할까봐 걱정된다. 채권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건 알지! 보기 좋은 그림도 찍혀 있고. 하지만 그렇게 빨리 돈을 벌어야 하....

아버지 때보다 사는 데 돈이 훨씬 많이 들어요. 가져야 할 것도 너무 많고요. 제가 어릴 때는 리무진이 있으면 신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요트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돈을 벌고 나면 쉬면서 취미도 가질 수 있죠. 유럽을 구경하고 애국심도 고취하고 그런 거요. - P272

샘은 자신을 포함한 컨트리클럽의 남자 대다수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말도 너무 많이 했다. 잡담에 곁들이는, 즐겁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던 음료였던 술이 금주법 때문에 열광의 대상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술 때문에 초조해졌고, 야한 포스터를 몰래 보는 아이들처럼 술에 매료됐다. - P295

성당 한 곳을 열 번 본 사람은 뭔가 본 것이다. 열 곳의 성당을 한 번씩 본 사람은 별로 본 것이 없다. 그리고 백 곳의 성당에 삼십 분씩 들른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셈이다. 벽에 400점의 그림을 가득 걸어두면 한 점을 걸어놓은 것보다 사백 배 재미없다. 그리고 웨이터의 이름을 알 정도로 자주 가기 전까지는 그 카페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여행의 법칙이다. - P332

사실 여행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 즐거움과 혜택에 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뭘 보려고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친척과의 싸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결국 새로운 친척을 만나 싸우게 된다. 그들은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솔리테르를 하거나 십자말풀이를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그 밖에 지긋지긋한 일을 찾는 것처럼 할 일을 갖기 위해 여행한다. 도즈워스 부부는 이를 알게 됐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처럼 인정하지 않았다. - P333

샘은 프랜이 누구 못지않은 진열창을 지녔지만, 안쪽 선반에는 별것 없다고 생각했다. - P341

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국제 여행사에서의 경험 덕분에 그는 관광지를 모으지 않는 미국인, 여행을 가장 많은 박물관에 다녀온 사람이 우승하는 토너먼트로 여기지 않는 미국인을 상상하지 못했다. 미국인들이 독일인을 모두 매일 저녁 맥주를 마신다고 생각하듯잉 그는 미국인은 모두 가이드북에 나온 장소를 전부 다녀와 표시한다고 믿었다. - P354

‘뭔가 하겠다‘는 막연한 결심과 ‘뭔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술 취한 사람의 맹세와 같을까? - P380

샘은 그녀의 눈이 실은 매정한 것이 아니라 지적이라고 판단했다. - P461

그런데 왜 유럽에서 지내십니까?

아...미국이 두려운 것 같아요. 거기선 불안하거든요. 다들 절 지켜보고 있다가 제가 ‘중요한 일을 하자‘고 하지 않으면 비난하는 느낌이에요. 영화관을 세우거나 아인슈타인을 공부하거나 브리지 게임에서 우승하거나 슈나우저를 교배하거나. 그리고 미국에는 사생활이 없어요. 저는 사생활을 누리는 데 있어서는 사치스러운 여자랍니다. - P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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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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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생의 항로는 크게 보아 두 개의 힘으로 진행되며, 습관과 우연이 그것이다. - P67

절약이란 수동적인 미덕이며 안정된 생활에 대한 희구이자 닥쳐올 미래와 위기와 우연에 대한 두려움이다. - P154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다시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젊음이란 너그러운 것이니까.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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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사에서 볼 건 호수위에 떠 있는 섬이다. 크게 3개의 섬이 있는데 우리는 일정상 제일 큰 하나의 섬만 볼 수 있었다. 유럽역사에 해박한 것도 아니고 사전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라 발길 닿는대로 대충 구글맵 후기를 보는데 isola bella 라는 섬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볼 수 있는 궁전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배를 타고 그 섬으로 향했다. 사실 뭍에서 배로 가면 타자 마자 내리는 수준으로 아주 가깝긴 하지만 그 곳에 궁전이 있다니 조금 의아하기는 했다. 아무리 옛날이라도 신하들을 불러들이고 나라를 다스리려면 육지에 궁전이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티켓을 끊고 이게 뭣이냐 하고 들어가 본 궁전은... 시작부터 말이 나오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압도했다. 우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난간부터 폭이 30센티미터는 족히 될 듯한 붉은 대리석을 곡선으로 깎아 만들었는데, 대리석을 판으로 만들어 붙이는 건 많이 보았어도 이렇게 덩어리로 난간을 만든 건 처음 봤다. 엄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가 진짜 옛날에는 스위스보다 잘 살았는갑네. 이것만 봐도 알겠다." 


이어지는 동선으로 침실과 연회장과 초상화를 전시하는 방 등이 이어졌고 모든 방이 그저 탄성이 나올 뿐이었다. 창문이 있는 방에서는 당연히 아름다운 호수의 정경이 펼쳐진다. 베르사유 궁전을 볼 때도 화려하네 돈이 많았네 정도의 감상이었지 이렇게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지는 않았는데 왜 그럴까 이유를 생각해보니 이 곳은 사용하는 색채나 질감이 아주 부드럽다. 연한 분홍색이나 하늘색으로 각 방의 벽을 칠하고 화려함은 필요한 곳에 적절히 포인트로 더할 뿐 여기저기 금실이나 보석장식 같은 것을 꽝꽝꽝 덕지덕지 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급스럽지 않다거나 돈을 아낀 기색이 느껴지는 건 전혀 아니다. 방마다 대리석 조각을 아낌없이 쏟아부터 각각 다른 디자인으로 만든 한숨이 나올만큼 아름다운 바닥이라던지, 방의 컨셉에 따라 사용한 하늘색 대리석이라던지(하늘색 대리석이 존재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진으로 찍으니 연한 회색으로 나와 그 색감이 전혀 전해지지도 않았다) 이 곳에 살았을 누군가의 초상화를 싸고 있는 액자의 섬세함에서 돈을 아낄 생각따위는 일도 없다는게 잘 느껴지기 때문이다. 규모가 베르사유보다 아담하다면 아담한 궁전인 것도 좋다. 누군가의 취향이 드러날 수 있는 정도의 규모, 돌아보는 사람도 지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감탄을 할 기력이 남아있을 수 있는 정도의 규모. 


궁전을 다 보고 나면 거대한 계단식 정원이 나타난다. 정원에는 하얀색 공작 두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보기엔 좋았는데 나는 공작이 그렇게나 경망스럽게 꽤액꽤액 우는 새라는 건 또 처음 알았네. 예쁜거 봐서 좋았고 저녁에 호텔에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 궁전이 왕족의 궁전이 아니라 상인의 궁전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1300년대에 은행업으로 크게 부를 쌓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암석으로 이루어진 섬 위에 짓기 시작한 궁전이고 결국에는 짓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후대에 걸쳐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 왕족이 아니라 상인의 궁전이라는것마저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이때쯤부터 엄마는 유튜브로 스스로 자신이 방문한 장소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코로나 불경기때 자신이 사는 곳의 유적에 대한 소개 동영상을 올린 여행 가이드 분들이 꽤 많았다. 


스트레사 다음 목적지는 베니스. 스트레사는 스위스 국경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작은 동네라 정신없는 이탈리아의 느낌은 없었는데 베니스로 가는 기차로 갈아 타기 위해 밀라노 역에 내렸더니 난리 부르쓰 이탈리아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명확한 동선이랄게 없어서 넘쳐나는 관광객들은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거대하게 뒤얽히며 제각각 지 갈길로 서로를 피하며 가고 있고 기차 플랫폼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게이트 같은게 있긴 하지만 그냥 넘으려면 넘을 수 있고(역무원인지 경찰인지도 보기만 할 뿐 제지하지 않음) 철도청 유니폼을 입은 직원에게 다가가 "화장실이 어디에요?" 물었더니 웃으며 "굿 모rrrrrr닝?" 하고 그냥 웃으며 쳐다보고 있고 (정색했더니 자기도 정색하며 손가락으로 가르쳐 줌) 기차시간에 늦을까 달려서 화장실로 갔더니 1유로를 넣어야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이라 맨손을 간 나는 그냥 다시 기차로 돌아와야 하는...그냥 대환장 파티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엄마와 동생과 시간이 촉박한 기차에 올라 캐리어를 짐칸에 넣다가 내가 동생에게 물었다. "니 배낭은?" 잠시 멍한 표정의 동생이 답했다. "앞에 기차에 놔두고 왔네." 


우리 기차의 출발시간은 10여분 남짓 남았고 동생은 바로 뛰어나가 우리가 내린 기차를 향해 뛰어갔지만.... 눈 앞에 보이는 역무원에게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더니 고개를 갸웃하길래 나는 이탈리아어와 비슷한 스페인어 단어라도 소지질렀다. "볼사!!!(가방) 엔 오트로 트렌!!! (다른 기차에!!!)" "오!" 역무원은 그제서야 눈을 크게 뜨고 비극을 마주친 듯한 격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의 손목시계를 탁탁 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너희 지금 기차 타야 하고 그 가방을 찾을 방법이란 없다는 뜻인거 같았다.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세상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가방을 잃어버렸다? 찾을 길은 영원히 없으리라. "여권은 가지고 있지?" 다행히 동생의 여권은 배낭이 아니라 앞으로 매는 작은 가방에 들어 있었고 우리는 빠르게 결정, 혹은 포기했다. "일단 이거 타고 가자."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 정신없고 어수선하고 약간은 남루한 듯도 하면서 또 분명히 풍요로운 땅인 그들의 땅을 배경으로. 



하단부가 바로 그 부내 넘치는 대리석 난간



그저 완벽한 응접실




저 바닥이 자세히 보면 참 예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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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7-05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나 유산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이라는 것이 함께 어우러져야 하니 아무곳에서나 볼 수 있는 기술문명의 구경거리하고 다르네요

바람돌이 2022-07-0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드디어 사진이.... 궁전이 진짜 아름답네요.
이탈리아에서 가방을 두고 내렸다. 아마 가도 없을거예요. 그냥 빨리 포기하는게 맘 편한.... 저희도 예전에 일행이 택시에 배낭을 두고 내렷는데 뭐 포기햇어요. 그런데 친구가 진짜 하루씩 지날 때마다 그 가방에 뭐가 있었는지 한개씩 한개씩 생각해내는데 정말 장난 아니게 뭐가 많았더라구요. 돈으로 치면 금액도 장난 아닌..... 그래서 내내 속쓰려 햇었어요. ㅠㅠ
 

스트레사 기차역에서 호숫가의 호텔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였다. 오래된 돌 바닥에 캐리어를 끌자 드르륵 캐리어 핸들을 잡은 손 끝으로 돌 바닥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 했다. 스위스에도 돌 바닥은 많았지만 이렇게 거친 곳은 잘 없었다. 휴양지라 호수를 바라보는 큰 호텔이 몇 개 서 있었고 다행히 우리 호텔은 기차역에서 걸어갈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식 인테리어가 깨끗하게 잘 관리된 그 호텔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짙은 밤색의 목재를 사용하고 샹들리에와 조명은 화려하게, 빛은 주홍빛에 가깝도록 어두운 듯 하며 무겁게. 바닥에는 색이 있는 대리석으로 이런저런 패턴을 만들어 화려하게 연출하고 베란다나 온실쪽은 천장에 작은 스테인드글라스도 만들어 놓았다. 모든 곳에 공을 들인 옛날식 호텔이다. 엘리베이터 마저도 문에 두터운 원목판을 덧댄 옛날식이었다. 동양인 셋이 위풍당당 아이고 힘들다며 캐리어를 끌고 들어서자 분홍피부에 은발의 노인들이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빛의 천으로 싼 로비의 의자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백인들이 휴양지로 좋아하는 곳이고 코로나 때문에 동양인 관광객이 거의 없다보니 우리는 마치 장르가 다른 회화속으로 뛰어든 기분이었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도 눈이 있으니 예쁜 것 돈 낸만큼 즐기고 가겠습니다...!


체크인을 하며 리셉셔니스트의 외모에서부터 이탈리아에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색은 금발이 아니라 짙은 갈색이고 손에는 화려한 매니큐어와 여러개의 반지, 팔찌 또한 여러개이다. 말투도 더 경쾌하다.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방은 가장 높은 층(그래봐야 5층이지만)의 호수를 바로 바라보는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오래되었지만 그만큼 귀한, 요즘은 만들라고 해야 만들수도 없는 곡선의 가구들이 들어가 있었고 욕실은 당연히 대리석으로 마감하였고 그리고 욕조도 들어가 있었다. 욕실 바로 옆의 벽에는 색색의 대리석을 손톱만하게 잘라 장미다발 모양을 모자이크 해놓았는데 그런 정성이 너무 좋았다. 단 한가지 조금 아쉬웠던 건 호텔의 침대와 침구인데 아무래도 요즘 유행하는 푹신푹신 침대가 아니라 다소 딱딱한 침대였고 기본 베딩이 딱 봐도 90년대식 무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그 베딩 아래로는 아주 깨끗하고 빳빳한 흰색시트를 깔아 두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입실할 땐 파랗고 그림같던 호수였지만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더니 호수와 하늘의 경계가 안개속으로 숨어버렸다. 비가 더욱 거세지고 하늘에서 우루룽 소리도 들려왔다. 우리는 대충 짐을 풀고 호텔의 바에서 고풍스러운 황동색 버켓에 받아 올려준 뜨거운 물로 컵라면을 먹은 뒤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근 뒤 한국에서 가져온, 최근에 새롭게 출간된 싼마오의 에세이를 읽었다. 뜨거운 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싼마오의 남편인 호세가 얼마나 속 터지는 인간인지를 에세이로 읽자니 열이 올라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제는 흔한 말이지만서도 남자를 만나지 않아 인생 망친 여자는 없어도 남자를 잘못만나 인생망친 여자는 차고 넘친다. 간단한 셈만 할 줄 알아도 남자는 만나지 않고 사는게 똑똑한 여자들의 현명한 인생살이 방법이련만... 이렇게 하나마나한 생각을 하며 마른세수를 하고 욕실 쪽을 바라보니 어머, 보통의 욕실들과 달리 이 호텔의 욕실에는 세개의 다리를 가진 아주 귀여운 플라스틱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형태도 귀여웠지만 무엇보다 버터색의 색상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나는 욕조에 들어가 있는 그대로 상체를 길게 내밀어 그 의자를 쭈우욱 당겨보았다. 그리고, 뒤집어서 브랜드를 확인했다. 


GEDY made in Italy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브랜드라면 내가 여기서 하나 사서 가면 되잖아? 너무 멋진 기념품이 될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마트폰으로 브랜드 이름을 검색하고 이런저런 검색어를 붙어 보았다. gedy stool, gedy trio, gedy chair... 그리 어렵지 않게 내가 본 그 의자가 나타났다. 구매할 수 있는 링크도 몇 개 찾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일반 상점 링크가 아니라 빈티지샵 링크이고 이미 그 의자들은 수백유로에 모두 판매완료된 상태라는 점이었다...! 조금 더 검색을 해보니 GEDY라는 브랜드는 이탈리아 욕실용품 브랜드인데 70-80년대에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협업하여 일부 제품들은 뉴욕의 MOMA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빈티지 콜렉터들 사이에서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의자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이탈리아인가? 일부러 빈티지를 구해서 놓았을리는 없을테고 옛날에 호텔을 오픈하며 들였던 기본 플라스틱 의자가 세월이 지나 빈티지가 되어버리는 그런 곳? 


엄마는 모든것이 깨끗하게 정돈된 스위스에서 어수선한 이탈리아로 넘어오자 심란한듯도 했지만 나는 주입시키듯 계속 말했다. "엄마 여기가 더 좋지 않아? 주차도 이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한국이랑 더 비슷하다니까." 스위스에서는 노란선으로 된 주차라인은 개인에게 지정된 주차장을 뜻하는데 거기에 주차를 하면 강제 견인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자유롭게 주차를 할 곳은 거의 전무하고 호텔에 돈을 내고 주차를 하더라도 주차할 장소가 협소해서 많이 고생을 했다. 반면 이탈리아는 한국처럼 2차선 도로 갓길에 그냥 흰색 선을 주욱 그어두고 아무나 편하게 대고 싶으면 대고 가고 싶으면 가면 된다. 극도의 P형 인간인 나는 이런 이탈리아에서 무한의 편안함을 느꼈다. 


동네에서 맛있다는 젤라또 집에 가서 젤라또를 한 컵씩 사서 먹고, 저녁은 조금 동네 외곽으로 걸어나가 구글 맵에서 평점이 좋은 피자 가게를 찾았다. 야외 테이블에는 동네 아저씨들이 앉아 술과 피자를 먹고 있었다.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들이 많은 걸 보자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우리도 야외 테이블에 앉자 주인 아주머니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 아저씨에게 우리에게서 떨어져 저 멀리 다른 테이블의 아저씨들에게 합석하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아저씨는 조금의 반항도 없이 순순히 자리를 옮겼고... 평소에 알고 지내는 동네 주민들이라 해도 애초에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이유가 있을진데 합석을 하란다고 순순히 하고 또 합석을 받는 입장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그 풍경이 너무....좋았다!!!! 이탈리아어만 적힌 메뉴판과 구글맵 후기에 남겨진 사진을 이리저리 맞춰보며 무엇을 먹을지 정하는 동안 가게 앞 담벼락에는 공사를 마치고 퇴근하는 듯한 작업자들이 두 차 사이의 빈틈에 1톤 트럭을 신묘하게 주차하고는 야외자리의 아저씨들에게 다가가 손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고 또 합석을 했다. 우리는 피자를 먹기도 전에 그 뜨수운 분위기에 이미 감화되어 버렸다. 아 이탈리아...! 각박한 스위스에서 치인 마음이 둥글어지는 이탈리아...!


셋이서 배가 부르게 넉넉한 음식에 술까지 먹은 뒤에 나온 빌지에 찍힌 가격은 스위스에서 먹던 파스타 한그릇 값도 되지 않았다. 배를 두드리며 오래된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외쳤다. "우리 젤라또 또 먹자."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다짐했었다. 이탈리아에 닿기만 하면 1일 3젤라또를 하겠다고. 오늘 오후에 도착했으니 1일 3 젤라또는 무리더라도 식전 식후로 나누어 젤라또를 먹는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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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03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이탈리아....
맛있는게 너무 많고 1일 1 젤라토 할 수 있는 곳요. 저도 다시 가고싶은....
라일라님의 고풍스러운 호텔묘사가 너무 실감나서 저도 지금 거기에 가있는듯한 느낌이예요.

LAYLA 2022-07-04 17:3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바람돌이님 1일 1젤라또가 아니라 1일 3 젤라또 입니다...!!!ㅎㅎㅎ 젤라또 가게들 자정까지 문 열어줘서 너무 좋았어요 ^.^

transient-guest 2022-07-05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이탈리아네요! 자리가 나는 방식도 모습도 음식과 가격도. 대도시는 몰라도 외곽의 좋은 곳을 다녀오고 싶습니다

LAYLA 2022-07-10 23:49   좋아요 1 | URL
제가 뒤늦게 쓰다 보니 까먹은게 있는데 이탈리아에서부터는 조식에서 케이크가 나오더라구요. 하다못해 살구 타르트 같은거라도...! 아침부터 케이크를 많이 먹을 일은 없지만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광경이랄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