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에 찾은 선술집엔 디제이 박스가 있었다. 입석 테이블에 서서 하이볼을 마시며 디제이가 틀어주는 시티팝을 들었다. 오너가 권한 사케를 마셨다. 다음 술은 뭘 마실까요. 내가 묻자 그는 또 다른 술을 내어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시티팝은 어느새 90년대와 2000년대의 한국가요로 바뀌었고 나는 동행과 함께 가벼운 춤을 췄다. 자연스레 옆의 남자와 어깨가 부딪혔다. 그는 나만큼 올드 케이팝을 좋아했다. 성시경과 임재범과 박진영과 쿨 핑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감탄하고 환호하는 그가 귀엽다 생각했다. 


나는 그가 나와 비슷한 또래일거라 생각했다. 이렇게나 올드 케이팝에 즉각적으로 환호할 수 있단 건 정말로 그 노래와 청춘을 함께한 같은 세대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어깨가 스치다가 건배를 하고 같이 춤을 췄다. 몇 살이세요? 먼저 물은 건 나였다. 저, 서른이요. 강아지처럼 순하게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서른이란 나이가 어색하지 않긴 했지만 나는 되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노래를 다 알아요? 그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저 이런 노래 좋아하거든요. 인터넷에서 보았던, 이전 세대의 노래를 유튜브로 배우고 애정한다는 요즘 청년인듯 하였다. 마치 어린 내가 내 이전 세대가 사랑했던 홍콩 영화를 한 철 지나 사랑하였듯이. 


다시 또 같은 리듬에 고개를 까딱이다 그가 물었다. 몇 살이세요? 나는 웃었고 내 동행이 대신 답했다. 많아요. 아주 많아요.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저 보다 많다구요? 술집은 꽤 어두웠다. 정말로 몇 살이에요? 눈을 동그랗게 뜬 그에게 나는 내 출생년도를 말했고, 그는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기분이 특별히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의미가 있는 말이 존재할 공간도 상황도 아니니까. 이 노래들 좋아해서 우리 나이가 비슷한 줄 알았어요. 내 말에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답했다. 우리 같은 노래 세대잖아요. 에이치오티, 핑클, 에스이에스. 그렇지 않아요? 그에겐 이국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교포들 특유의 해사하고 밝은 웃음이랄까, 그리고 약간은 어눌한 발음까지. 음악이 시끄러워 그에게 다가서 말을 하다 그의 귓볼에 내 입술이 스쳤고 그는 자신이 교포는 아니라 말했다. 저 광고해요. 컨텐츠 만들구요. 


오너가 마감하고 같이 한 잔 더 하자고 해서 기다리는 사이에 그 역시 계산을 하고 업장을 나가기 전 나의 인스타그램을 물었다. 나의 인스타그램. 나의 인스타그램... 비공개 계정인 나의 인스타그램엔 술집에서 만난 남자에게 보여주기엔 애매한 것들이 많았다. 부모의 죽음, 사업상의 사고와 어려움, 그래서 내가 언제 어떻게 슬펐는지에 관한 감상적인 문장들, 기타 등등. 나는 내 인스타그램을 말하는 대신 내 폰을 내밀고 그의 인스타그램을 먼저 받았다. 그의 인스타그램은 힙했다. 쿨이 아니라 에스파나 뉴진스와 더 어울렸다. 그의 나이와 외모와 업계가 그러하듯이. 나는 그의 친구신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놔두었다.


2차 술자리까지 다 마친 다음 올라탄 택시가 빠르게 달리는 동안 변호사 미팅 녹음파일을 들었다. 내가 처한 현실은 이런 것이다. 소송과 강제경매와 돌아서면 돌아오는 직원들 월급날짜와 대출금 이자. 서른인 친구는 너무도 귀엽지만 그와 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까.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의 클라이맥스에서 함께 립싱크를 할 수 있단 것 외에. 하지만, 난 분명히 그런 생각을 했다. 강제경매를 막고 성공적으로 엑시트 한다면, 그래서 현생의 번뇌의 고통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이런 귀여운 남자아이와 춤이나 추고 술이나 마시고 그가 환한 낯에 내 얼굴의 그늘을 발견한 뒤 마음이 변하기 전까지는 함께 재미있게 놀겠다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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