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가방을 뒤로 하고 베니스로 떠났다 다시 밀란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찾으러 온 것은 아니고 그것이 원래 계획된 동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밀라노로 돌아가는 길에 남동생이 기차에 두고 내린 가방을 역무원이 가지고 있다며 찾으러 오라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 연락을 받은 나는 이렇게 말했다. "미친거 아니야?"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약간 불길한 의미로(?) 의미심장하기까지 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인생에는 3번의 기회가 있다는 그런...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데 평생의 3대 대운같은걸 가져다 쓴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이 피어올랐다. 잃어버린 가방을 다시 찾은 건 물론 기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인생의 운 중 하나를 쓸 정도로 귀한 가방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예감은 어느정도는 맞았던 걸로 뒤에 판명된다. 


그러니까 이탈리아의 문제는.

잃어버린 가방을 누군가가 찾는 것까지 가능하다고 해도 그 가방을 가진 역무원과 만나는 것이 다시 또 엄청난 난관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대한 테르미니 역에서 캐리어를 끌며 역무원이 머무는 휴게실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었지만 도무지 그런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가방을 찾으러 오라는 연락부터가 공식적인 철도청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나는 기차 운전수인데 당신의 가방을 가지고 있소 밀라노 역에서 쉴 때 만나서 가방을 주리라'정도였기에 (우리가 먼저 가방을 찾고자 철도청에 연락을 한 다음에 받은 연락이 아니었다면 필시 사기꾼이라 여겨 답장도 하지 않았을 정도의 수상스런 문자...!) 옆에 있는 역무원을 만나 물어본들 그들은 두 손을 들어올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몰라~ 모른다구~ 식의 응대를 할 뿐이었다. 결국, 남동생은 혼자 기차역을 더 돌아보기로 하고 나와 엄마는 우리의 캐리어(총 3명의 캐리어 3개)를 끌고 먼저 호텔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 돈이 있는데, 그것도 현금과 신용카드가 있는데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렵겠는가? 재수가 없어 사기꾼을 만난다 해도 고작 몇십유로 정도 삥을 뜯기는 귀여운 수준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어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들어가 피곤하고 지친 몸을 누이려 하였는데... 택시 스탠드가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한 풍경이긴 했지만 택시를 기다리는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었으므로 택시가 부족한가보네~~~ 정도로 생각하고 우리도 그 줄 뒤에 가서 줄을 섰다. 기다렸다. 시간이 갔다. 택시는 오지 않았다. 단 한 대도 오지 않았다. 이건 무언가 이상하다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자 옆으로 지나가던 한 이탈리안 아저씨가 외쳤다.


"노 타악시 노 타악시 뚜데이" 


그는 두 팔을 들어올려 거대한 엑스자를 그려보였다. 줄을 서 있던 외국인 관광객들은 낙담한 표정이 되어 바로 자리를 뜨기도 했고 우왕좌왕하기도 했는데 나는 나름의 고생짬바가 있어서 그런지 담담하게 똑같이 큰 소리로 물었다.


"와이? 와이 노 탁시 뚜데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스뜰ㄹㄹㄹ롸이크!"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이탈리아다운 대답에 나는 바로 호텔로 전화를 해서 호텔차량이라도 보내달라고 했지만... 제 아무리 고급 호텔이라도 이탈리아 호텔이기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으니까 지하철 타고 오세요. ㅠㅠ 


여행용 캐리어로 리모와를 끌지는 못할망정 샘소나이트 고급형 정도는 끌고 다니는데 나는 이번 여행을 위해 신형 캐리어를 장만한 참이었고 정말로 그건 예전에 쓰던 낡은 캐리어에 비하면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다. 자체 쿠셔닝 스프링이 들어있어서 굴곡진 길을 끌어도 훨씬 적은 힘으로 끌 수 있고 잘 미끄러졌다. 하지만, 그런 좋은 캐리어라 하여도 사람으로 넘쳐나는(택시 파업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넘쳐나는) 밀라노 중앙역에서 대형 캐리어 3개를 2명의 여자가 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단을 쓸 수도 없으니 엘리베이터를 찾아 다니는 것도 일, 표를 끊는 것도 일...!! 지하철을 탈 에정이었다면 미리 네이버 블로그로 학습을 했겠지만 택시를 탈 예정이었기 때문에 사전학습이 전혀 없었고 새로 개편되었다는 밀라노의 존 시스템은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지하철을 타기도 전에 지쳐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드디어 플랫폼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우리와 함께 몇몇의 여인들이 함께 탔는데 우리가 부피가 큰 캐리어를 3개나 들고 탔으므로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리저리 자리낭비가 적도록 캐리어를 끼워넣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그들이 물었다. 


"업? 다운?" 

"We are going to take a metro"


어차피 지하철역 엘리베이터가 위로 가거나 아래로 가거나 둘 중 하나인데 그들은 또 물었다.


"업? 다운?" 

"메트로 플리즈." 


그리고 순간, 나는 내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내 캐리어 위에 얹어둔 가방 속으로 슬며시 손을 넣으려는 것을 발견해 거의 본능에 가깝게 탁, 쳐냈고 동시에 옆에 있던 엄마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마야! 야들이 내 가방 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엄마가 몸 앞으로 매고 있던 크로스백이 반쯤 이미 열려 있었다.


아아


드디어 이것은...

이것이 그렇게나 많이 들어왔던 악명높은 유럽의 단체 소매치기로구나...!

나는 그제서야 왜 그 여자들이 임신을 하고 있고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고 내 영어를 못 알아 듣는척 했는지 모두 이해할 수 있었고, 이 밀실공간에서 이 냔들을 어떻게 물리쳐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손으로 싸움을 벌이기에는 그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이기에 싸우는 틈에 또 내 가방을 열어 뭔가를 훔쳐가면 곤란했다. 돈도 돈이지만 여권이나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정말로 남은 여행이 너무 괴로워진다. 그래서 일단 두 손으로는 내 가방의 입구를 꽉 쥐어야 했고, 발은 캐리어들 사이에 묶여 있으니 결국 남은 건 입 뿐이었다. 나는 상체를 들어 엄마의 가방을 향해 손을 뻗는 여자애의 팔뚝을 콱 물었다. 


"아아아아아아아!!!!"


내가 개처럼 달려들자 소매치기 집시 여자들 중 물린 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나머지 여자들도 당황해서 나를 뜯어내려고 달려들었다. 정말 힘을 꽉 주어 물면 살점이 날아갈 수도 있을테니 적당히 물었는데도 그 나약한 집시들은 쌩 난리를 쳤다. 그들은 가해자인 주제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You are not stolen anything!!!!!!!!"


걔들이 뭘 가져갔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그 사이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것은 정말 영화같기도 했고 드라마 같기도 했다.

개처럼 집시를 물어뜯는 나와 그런 나를 뜯어내려는 집시들,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수십명의 이탈리아인들. 엄마와 나는 일단 캐리어를 끌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끝까지 소리를 질렀다. 


"이년들! 도둑년들! 폴리스! 폴리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이 또한 무척 이탈리아스러운 풍경으로, 그 수많은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냥 계단으로 가야겠군'의 표정으로 자리를 떴고 소수의 정의로운(?) 이탈리아 사람이 소리쳐서 역무원을 불렀다. 그리고 역무원 또한 '지긋지긋한 일이 또 생겼군'이란 표정으로 걸어오기 시작했고.... 그 사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소매치기 무리들은 눈치를 보다 빠르게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리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가방에서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력하게 다가온 역무원이 갑자기 기력이 돌아온 눈으로 몇 번이나 재차 물었다. "진짜? 정말로? 리얼? 잃어버린게 없다고? 다시 확인해봐." 


그렇게 고생 끝에 도착한 호텔은 또 다시 이탈리아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환영했고-방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서 무려 3개의 방을 전전해서 돌아다니며 체크인 노동을 함- 겨우 저녁식사를 할 때 즈음에 어느 노천 식당의 테라스에서 나는 마치 선언하듯 가족들에게 말했다.


"난, 내 주변 반경 3미터에서 가장 미친 년이야." 


후식은 당연히 젤라또로, 구글 맵에서 찾은 맛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이 나타나기 수백미터 전부터 사람들이 아이스크림 콘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핥으며 거리를 지나고 있었기에 그 가게가 정말 맛있는 젤라또를 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줄을 서서 고심해서 맛을 고르고 그 달콤한 젤라또를 맛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런데도 이탈리아가 좋다니 참 대단한 일이군!' 그리고 나는 또 막연한 불길함을 느꼈다. 언젠가 나는 이 곳에 살러 올 것이고 이탈리아어를 배우게 될 것이라는... 그 비효율적인 일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될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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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9-14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일 날뻔 하셨군요? 그래도 물건들을 잃어버리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임기응변!!👍
정신없는 여행 와중에도 젤라또는 맛있다니? 그런 맛에 여행하는 건가 봅니다.

LAYLA 2022-09-15 01:06   좋아요 1 | URL
저는 소문을 많이 들어 괜찮았는데 엄마가 너무 놀라셨어요. 다행히 도둑맞은게 없어서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네요 ㅎㅎㅎ

잉크냄새 2022-09-14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설로 전해지던 이탈리아 소매치기를 물어 뜯으셨군요.

LAYLA 2022-09-15 01:07   좋아요 0 | URL
이야기 들은 제 친구가 저에게 보통 도라이가 아니라며...‘보통 관광객들은 입질을 하지 않아..‘ 라고...

라로 2022-09-15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통 관광객!!^^;;;

LAYLA 2022-09-20 13:02   좋아요 0 | URL
그것이 가장 좋습니다. 과한 경험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잖아요. 다음에 이탈리아에 간다면 꼭 맛잇는 커피와 빵만 먹고 싶습니다 제발,,,ㅎㅎㅎ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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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영원히 잠든 아버지의 육신은 무거웠다. 다시는 태어나지 마요. 그게 아버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말이었다. - P29

자기야, 우리 장군이 심장 소리 좀 들어봐. 웅장웅장웅장, 이렇지 않아? 장군감 맞나봐. 앳된 임부가 옆에 선 남편의 손을 꼭 쥐고 달뜬 목소리로 말했을 때 정작 규의 귀에는 그 소리가 총성총성총성으로 들렸다. 부부가 뿜어내는 행복의 아우라가 규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밭은기침을 했다. - P49

번데기 한 뚝배기를 혼자 다 먹은 미예가 맥주잔을 시원하게 비우더니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참관수업 날 아이가 이름의 ‘태‘ 자를 ‘턔‘로 잘못 썼을 때 엄마들 사이에서 일렁이던 웃음이 자기에겐 비웃음으로 들렸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건이 나쁠 것 없는 아이가 공부에 소홀하면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다고.

돌이켜보면 그날 미예가 그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수라 언니가 딸에 대해 말한 직후였다. 수라 언니는 자기 딸이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하고 싶어하는 것도 없는 게으름뱅이 천둥벌거숭인데, 살아보니 어려서 공부 잘하고 커서 돈 잘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그런 거 아무 소용 없더라며, 딸은 제가 좋아하는 일이나 하면서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과 남편은 나중에 딸에게 카페 하나 차려줄 정도의 목돈이나 주고 끝내기로 했다고. 그 말 끝에 미예가 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때 미예는 속으로 수라 언니의 말에 발끈했던 - P113

걸지도 모르겠다. 언니, 속 편한 소리 좀 그만해요. 언니처럼 다 가진 사람이 뭘 알아요? 하지만 수라 언니의 말 가운데 내 관심을 끈 대목은 미예와 달랐고, 그 말은 그후로도 꽤 오랫동안 수라 언니에 대한 내 인상을 좌우했다. 나는 우리 딸이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 좋겠어. 저 사람은 어떤 큰 불행을 겪었기에 저런 소원을 갖게 되었을까? 그러나 이 고립의 밤에 혼자 소파에 누워 그날의 대화를 찬찬히 되짚어보니 언니가 방점을 찍은 단어는 다른 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 하고 바란 게 아니라 크게 불행하지 않게만 ‘살았으면‘ 하고 바랐던 게 아닐까 하고. - P114

율은 온이 교수로 일하는 대학교에 입학한다. 앞으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너 그러다가 율이 영영 뺏긴다. 전 남편은 그 소식을 듣고 충고랍시고 말했다. 뭐든 뺏고 뺏기는 것밖에 모르는 종족. 저는 딸과 아내를 버렸으면서 남이 주워 가면 뺏겼다고 징징대겠지.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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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숍 - 느낌 좋고 감도 높은 도쿄 핫플레이스 87
이시은.서동희 지음 / 동아일보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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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주방용품을 파는 중앙시장이 있다면 도쿄에는 가파바시가 있다. 중앙시장이 지극히 서민적인 곳이라면 가파바시는 장인의 솜씨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일본 전역의 장인들이 만든 칼과 냄비를 비롯해 다양한 주방 도구를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다와라마치 역 3번 출구로 나와 10분 정도 걸으면 꼭대기에 거대한 요리사 머리 모형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이 가파바시 거리의 시작점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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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즈워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0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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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제목인 도즈워스를 처음 들었을 때 those words의 발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 책의 주인공인 성공한 미국인 사업가 새뮤얼 도즈워스의 이름이다. 도즈워스는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제조업이 부흥하던 시기에 상업용 승용차를 제조하는 사업을 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50언저리가 되자 자신의 회사만큼 진지하거나 멋진 차를 만들지는 않지만 대량생산의 측면에서는 더 큰 경쟁력을 가진 회사에 사업을 매각하고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즈워스의 아내 프랜은 아직 많은 사람들이 마차를 타던 시절, 그러니까 도즈워스가 자동차 사업을 해보겠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비웃을 때 만난 여인으로 순수하고 아이같은 매력을 가진 사람이다. 처녀시절 유럽에서 생활해본 적도 있는 꽤 괜찮은 집안 출신의 프랜은 순수한 사랑으로 도즈워스를 택하고 도즈워스는 별 볼일 없는 자신을 택해준 프랜에게 보은하듯 충실하고 헌신적인 결혼생활을 한다. 그의 자동차 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렸기에 도즈워스는 큰 저택을 짓고 유모와 하인을 들여 프랜이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했고, 그 결과 프랜은 결혼하던 스무살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아이같은 외모와 마음을 지닌채로 마흔을 넘기게 된다. 도즈워스가 사업을 매각한 이후 유럽에 가자고 보챈 것은 프랜이다. 프랜은 더 늙기 전 마지막으로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고 그 장소로는 교양과 지성이 넘치는 유럽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내 말 들어봐! 이번이 우리 마지막 기회일 수 있어. 우리가 너무 늙어서 돌아다니기 싫어지기 전에 당신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때는 지금뿐일지도 몰라. 기회를 잡자! “난 마흔에, 아니 마흔하나에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아. 아무도 나를 서른다섯, 심지어 서른셋 이상으로 안 봐. 그리고 이 덜떨어진 도시에서 바보 같은 짓이나 하면서 영영 산다면 내게 인생은 끝난 셈이야! 그러지 않을래. 내 말은 그거야! 당신은 꼭 원한다면 여기 있어도 좋아. 하지만 나는 멋진 일을 할래. 나는 그럴 권리가 있어. 내겐 젊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5년이나 10년뿐이야. 마지막 탄창이라고. 그리고 난 그걸 허무하게 써버리지 않을 거야. 이해가 안 돼? 이해해줄 수 없어? 난 진심이야. 간절하다고! 내 목숨을 걸고 애원할게. 아니, 아니야! 요구할 거야! 점잖고 빠르게 다녀오는 단체 관광 정도론 안 된다는 뜻이야!”


유럽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즈워스는 평생 자신의 일부이자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에 후련함과 동시에 불안함을 느끼지만 보채는 아내에 떠밀려 유럽이 자신에게도 좋은 변화를 줄것이란 막연한 합리화를 하며 짐을 싸 유럽으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달콤한 휴식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했던 유럽여행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도즈워스는 일과 성취로서 인정받던 미국에서의 자신이 유럽에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우울함을 느끼게 된다. 프랜이 프랑스어로 통역을 해주지 않으면 택시기사를 부르거나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누가 인정해주고 말고를 떠나 빈둥대기만 하는 생활 자체가 고역이다. 반면 아내 프랜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서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만 고집하고 다람쥐 코트 같은 사치품을 사들이고 지인들의 소개를 통해 유럽의 저명인사들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다. 이런 나날이 이어지며 도즈워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프랜의 속물성과 경박함을 인지하게 된다. 도즈워스의 상식으로는 물려받은 작위 외에는 별다른 성취 없이 빈둥거리며 지적인 사교라는 것만 하는 사람들이 영 사기꾼처럼 보인다. 반면 그의 아내 프랜은 그런 사람들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한다. '백작부인'이라거나 '몰락한 귀족'이라는 단어에는 떨치기 힘든 낭만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프랜은 그들과 어울리는 동안 식대며 리무진값을 모두 자신이 사용하고 아무렇지 않게 도즈워스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한다. 동시에, 자신의 남편은 아는 것이 없고 촌스럽고 지겹다는 식으로 대한다.


일반적인 요즘 독자의 기준에서 프랜의 행동은 과도하게 철이 없고 제멋대로이고, 반면 도즈워스는 자신이 이룩한 사회적 성취에 걸맞지 않게 과도하게 소심하고 아내에게 휘둘린다.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이 그 부분이었다. 도즈워스는 경제적으론 충분이 감당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둘이서 여행 내내 호텔의 스위트룸에 머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내에게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방이 좋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아내를 위해 여기저기 호텔을 옮겨다닌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별 볼일 없는 사기꾼 같은 유럽의 저명인사들이지만 아내가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고 새벽까지 감기는 눈을 참으며 댄스파티를 다닌다. 자신은 이제 다른 도시로 떠나고 싶지만 아내가 아무것도 없는 몰락한 후작과 은근한 밀애를 주고 받고 있기 때문에 떠나기 싫다고 하자 더 이상 강요하지 못하고 혼자 다른 도시로 떠났다 다시 아내가 그리워 돌아온다. 그 모든 과정에서 프랜은 당당하고 그녀의 말에 기가 죽는 도즈워스의 모습은 가스라이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독자입장에선 소설의 개연성과 핍진성에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도즈워스가 뭐가 아쉬워서???


결국, 프랜은 그 시대의 멍청한 소설속 여주인공들이 그렇듯(ref.인생의 베일) 불륜남과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며 당당히 도즈워스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도즈워스는 끝까지 매달려보지만 사소한 호텔객실 예약 하나도 제 마음대로 해보지 못한 도즈워스가 유럽의 귀족이란 허울에 눈이 먼 프랜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둘은 헤어지고 도즈워스는 상심한 마음을 도저히 추스리지 못해, 그리고 미국에 돌아간다면 주변인들에게 받을 시선이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유럽 여기저기를 방랑하며 끝없는 외로움에 시달리게 되는데... 


큰 줄기의 서사로는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가 500페이지도 넘게 이어진다는 건 그만큼 서술이 상세하고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한다는 것. 그만큼 지루한 측면도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노벨상을 수상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고, 앞으로의 인생에서 웬만하면 내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책을 (고생스럽더라도) 읽어보자는 나름의 결심이 있었던 터라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읽은 뒤에야 하는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도즈워스와 프랜의 사랑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미국과 유럽의 이야기, 그러니까 미국의 유럽에 대한 근거없는 동경과 멍청하리만치 일방적인 애정, 반면 그 실체는 별 볼일 없고 허영과 무위로 존재하는 유럽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도즈워스가 유럽에서 경험하는 일은 단순히 프랜과의 다툼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겪은 다양한 일을 읽을 땐 지나치게 디테일하고 때로는 이런 것까지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불필요하게 보이지만, 완독을 한 이후에 보자면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형상화하기 위해 필요했던 아주 작은 조각들이었던 것이다. 그 시대만의 특수성이 소설의 디테일로 그려져 있지만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주제가 아주 명확하며 동시에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시대의 특수성이 21세기 독자가 독서를 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미국은, 그리고 전세계인은 유럽을 얼마나 동경하는가? 지금도 유럽은, 얼마나 겉만 번지르르한가? 


그렇게, 다 읽고 나서 보니 이 책이 사랑에 관한 책으로 홍보되고 있다는 것이 조금 웃기긴 하지만(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흥미를 느껴 읽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결론적으로는 내 기대와 달랐다는 점이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외로움에 절망한, 쉰이 넘은 나이에도 하는 행동은 젊은 베르테르 같은 로맨티스트 도즈워스가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는지는 책으로 읽어보시길. (그렇다. 미국인들은 엄청난 실리주의자이지만 그 실리에 대한 추종과 열망이 너무도 강렬해서 도리어 순수해 보이는 지점이 있다는 점...) 


*재미있었던 게 하나 있는데, 미국인들이 주고 받는 농담에 유럽에 장기로 다녀온 친구에게 '얼음이 있는 미국이 그립지 않았던가?' 하는 농담이 있다는 것. 100년도 더 전에도 유럽은 얼음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이 돈을 쥐어주겠다 함에도 아아를 파는 것에 그리 소극적이라는 것이 정말...정말... 유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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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내추럴해지는 방법 - 와인과 삶에 자연을 담는 프랑스인 남편과 소설가 신이현의 장밋빛 인생, 그 유쾌한 이야기
신이현.레돔 씨 지음 / 더숲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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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꽃은 술이다."
이 말은 레돔과 그의 와인 메이커 친구들이 늘 하는 말이다. 누가 한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명언이다. 태초에 농부가 비바람과 뙤약볕 아래 허리를 구부려 일하는 것은 무엇보다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다. 한 톨의 쌀과 밀은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경건함이 있다. 그러나 농업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인간이 배를 채운 뒤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 그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하면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얼마나 설레고 즐거웠을까. 술은 그런 것이겠지. 생존이 아닌 휴식과 즐거움을 위한 액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문학도 그렇다. 둘 다 생존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술 안 마셔도 살 수 있고, 글 안 읽어도 잘 살 수 있다. 살기 위한 것이 아닌 가외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술을 빚거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인생 무용지물의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이다.

- P25

세상을 바꾸기 위한 글도 있고 삶을 개척하고 인격을 함양시키거나 지적 수준을 높여 주는 등의 실용적인 글도 있지만, 문학의 순수한 존재 가치는 나만의 조용한 기쁨을 느낄 때다. 침대맡에 앉아 두꺼운 소설책을 읽으며 밤새 인물들을 따라가는 것은 생존과 관계없다. 술을 마시는 것 또한 그렇다. 무용한 즐거운 짓에 빠지는 것이다. - P26

"사람들은 머리 위 하늘은 자주 보면서 ‘아, 하늘이 맑아서 참 좋아!;감탄하며 즐거워하지.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하늘은 그토록 좋아하면서 왜 발밑의 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 하늘 보듯이 땅도 좀 보면 안 되나? ‘아 땅이 포슬포슬 건강하고 귀여워서 너무 좋아!‘ 이런 말 좀 하면 안 돼?" - P66

사람들은 향긋하지 않은 와인을 용서하지 않겠지만 농부는 안다. 포도는 인간을 위해 늘 상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 P130

그는 이 언덕에 살다가 사라진 모든 나무를 아쉬워한다. 특히 늙은 떡갈나무는 미생물을 폭발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어 주변의 병든 식물들을 치유해 준다고 한다. 식물들의 뿌리는 본능적으로 떡갈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해 가는데, 거기에 가면 온갖 좋은 박테리아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온갖 전통요법을 알고 조제해 주는 동네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아이가 아프면 무조건 동네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엄마처럼 식물들도 몸이 아플 때는 떡갈나무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 P219

의사를 전달하는 것만이 언어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고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프랑스어로는 내 맘대로 까불 수가 없으니 물고기는 늘 헐떡거리며 목이 말랐다. 프랑스가 아무리 좋다 해도 한국이 아무리 살기 힘들다 해도 이곳에 돌아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언어다. 모국어를 다시 찾아 그 강에서 헤엄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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