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가방을 뒤로 하고 베니스로 떠났다 다시 밀란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찾으러 온 것은 아니고 그것이 원래 계획된 동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밀라노로 돌아가는 길에 남동생이 기차에 두고 내린 가방을 역무원이 가지고 있다며 찾으러 오라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 연락을 받은 나는 이렇게 말했다. "미친거 아니야?"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약간 불길한 의미로(?) 의미심장하기까지 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인생에는 3번의 기회가 있다는 그런...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데 평생의 3대 대운같은걸 가져다 쓴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이 피어올랐다. 잃어버린 가방을 다시 찾은 건 물론 기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인생의 운 중 하나를 쓸 정도로 귀한 가방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예감은 어느정도는 맞았던 걸로 뒤에 판명된다.
그러니까 이탈리아의 문제는.
잃어버린 가방을 누군가가 찾는 것까지 가능하다고 해도 그 가방을 가진 역무원과 만나는 것이 다시 또 엄청난 난관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대한 테르미니 역에서 캐리어를 끌며 역무원이 머무는 휴게실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었지만 도무지 그런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가방을 찾으러 오라는 연락부터가 공식적인 철도청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나는 기차 운전수인데 당신의 가방을 가지고 있소 밀라노 역에서 쉴 때 만나서 가방을 주리라'정도였기에 (우리가 먼저 가방을 찾고자 철도청에 연락을 한 다음에 받은 연락이 아니었다면 필시 사기꾼이라 여겨 답장도 하지 않았을 정도의 수상스런 문자...!) 옆에 있는 역무원을 만나 물어본들 그들은 두 손을 들어올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몰라~ 모른다구~ 식의 응대를 할 뿐이었다. 결국, 남동생은 혼자 기차역을 더 돌아보기로 하고 나와 엄마는 우리의 캐리어(총 3명의 캐리어 3개)를 끌고 먼저 호텔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 돈이 있는데, 그것도 현금과 신용카드가 있는데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렵겠는가? 재수가 없어 사기꾼을 만난다 해도 고작 몇십유로 정도 삥을 뜯기는 귀여운 수준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어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들어가 피곤하고 지친 몸을 누이려 하였는데... 택시 스탠드가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한 풍경이긴 했지만 택시를 기다리는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었으므로 택시가 부족한가보네~~~ 정도로 생각하고 우리도 그 줄 뒤에 가서 줄을 섰다. 기다렸다. 시간이 갔다. 택시는 오지 않았다. 단 한 대도 오지 않았다. 이건 무언가 이상하다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자 옆으로 지나가던 한 이탈리안 아저씨가 외쳤다.
"노 타악시 노 타악시 뚜데이"
그는 두 팔을 들어올려 거대한 엑스자를 그려보였다. 줄을 서 있던 외국인 관광객들은 낙담한 표정이 되어 바로 자리를 뜨기도 했고 우왕좌왕하기도 했는데 나는 나름의 고생짬바가 있어서 그런지 담담하게 똑같이 큰 소리로 물었다.
"와이? 와이 노 탁시 뚜데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스뜰ㄹㄹㄹ롸이크!"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이탈리아다운 대답에 나는 바로 호텔로 전화를 해서 호텔차량이라도 보내달라고 했지만... 제 아무리 고급 호텔이라도 이탈리아 호텔이기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으니까 지하철 타고 오세요. ㅠㅠ
여행용 캐리어로 리모와를 끌지는 못할망정 샘소나이트 고급형 정도는 끌고 다니는데 나는 이번 여행을 위해 신형 캐리어를 장만한 참이었고 정말로 그건 예전에 쓰던 낡은 캐리어에 비하면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다. 자체 쿠셔닝 스프링이 들어있어서 굴곡진 길을 끌어도 훨씬 적은 힘으로 끌 수 있고 잘 미끄러졌다. 하지만, 그런 좋은 캐리어라 하여도 사람으로 넘쳐나는(택시 파업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넘쳐나는) 밀라노 중앙역에서 대형 캐리어 3개를 2명의 여자가 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단을 쓸 수도 없으니 엘리베이터를 찾아 다니는 것도 일, 표를 끊는 것도 일...!! 지하철을 탈 에정이었다면 미리 네이버 블로그로 학습을 했겠지만 택시를 탈 예정이었기 때문에 사전학습이 전혀 없었고 새로 개편되었다는 밀라노의 존 시스템은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지하철을 타기도 전에 지쳐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드디어 플랫폼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우리와 함께 몇몇의 여인들이 함께 탔는데 우리가 부피가 큰 캐리어를 3개나 들고 탔으므로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리저리 자리낭비가 적도록 캐리어를 끼워넣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그들이 물었다.
"업? 다운?"
"We are going to take a metro"
어차피 지하철역 엘리베이터가 위로 가거나 아래로 가거나 둘 중 하나인데 그들은 또 물었다.
"업? 다운?"
"메트로 플리즈."
그리고 순간, 나는 내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내 캐리어 위에 얹어둔 가방 속으로 슬며시 손을 넣으려는 것을 발견해 거의 본능에 가깝게 탁, 쳐냈고 동시에 옆에 있던 엄마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마야! 야들이 내 가방 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엄마가 몸 앞으로 매고 있던 크로스백이 반쯤 이미 열려 있었다.
아아
드디어 이것은...
이것이 그렇게나 많이 들어왔던 악명높은 유럽의 단체 소매치기로구나...!
나는 그제서야 왜 그 여자들이 임신을 하고 있고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고 내 영어를 못 알아 듣는척 했는지 모두 이해할 수 있었고, 이 밀실공간에서 이 냔들을 어떻게 물리쳐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손으로 싸움을 벌이기에는 그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이기에 싸우는 틈에 또 내 가방을 열어 뭔가를 훔쳐가면 곤란했다. 돈도 돈이지만 여권이나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정말로 남은 여행이 너무 괴로워진다. 그래서 일단 두 손으로는 내 가방의 입구를 꽉 쥐어야 했고, 발은 캐리어들 사이에 묶여 있으니 결국 남은 건 입 뿐이었다. 나는 상체를 들어 엄마의 가방을 향해 손을 뻗는 여자애의 팔뚝을 콱 물었다.
"아아아아아아아!!!!"
내가 개처럼 달려들자 소매치기 집시 여자들 중 물린 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나머지 여자들도 당황해서 나를 뜯어내려고 달려들었다. 정말 힘을 꽉 주어 물면 살점이 날아갈 수도 있을테니 적당히 물었는데도 그 나약한 집시들은 쌩 난리를 쳤다. 그들은 가해자인 주제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You are not stolen anything!!!!!!!!"
걔들이 뭘 가져갔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그 사이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것은 정말 영화같기도 했고 드라마 같기도 했다.
개처럼 집시를 물어뜯는 나와 그런 나를 뜯어내려는 집시들,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수십명의 이탈리아인들. 엄마와 나는 일단 캐리어를 끌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끝까지 소리를 질렀다.
"이년들! 도둑년들! 폴리스! 폴리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이 또한 무척 이탈리아스러운 풍경으로, 그 수많은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냥 계단으로 가야겠군'의 표정으로 자리를 떴고 소수의 정의로운(?) 이탈리아 사람이 소리쳐서 역무원을 불렀다. 그리고 역무원 또한 '지긋지긋한 일이 또 생겼군'이란 표정으로 걸어오기 시작했고.... 그 사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소매치기 무리들은 눈치를 보다 빠르게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리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가방에서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력하게 다가온 역무원이 갑자기 기력이 돌아온 눈으로 몇 번이나 재차 물었다. "진짜? 정말로? 리얼? 잃어버린게 없다고? 다시 확인해봐."
그렇게 고생 끝에 도착한 호텔은 또 다시 이탈리아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환영했고-방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서 무려 3개의 방을 전전해서 돌아다니며 체크인 노동을 함- 겨우 저녁식사를 할 때 즈음에 어느 노천 식당의 테라스에서 나는 마치 선언하듯 가족들에게 말했다.
"난, 내 주변 반경 3미터에서 가장 미친 년이야."
후식은 당연히 젤라또로, 구글 맵에서 찾은 맛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이 나타나기 수백미터 전부터 사람들이 아이스크림 콘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핥으며 거리를 지나고 있었기에 그 가게가 정말 맛있는 젤라또를 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줄을 서서 고심해서 맛을 고르고 그 달콤한 젤라또를 맛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런데도 이탈리아가 좋다니 참 대단한 일이군!' 그리고 나는 또 막연한 불길함을 느꼈다. 언젠가 나는 이 곳에 살러 올 것이고 이탈리아어를 배우게 될 것이라는... 그 비효율적인 일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될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