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위의 여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2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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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읽어내는데에는 적잖은 인내가 필요하다. 아무리 존 파울스의 지성미 넘치는 글이라 할지라도 600페이지는 쉬운 분량이 아니다. 학부생 때 김영하가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 책을 언급한 것을 보고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하숙방에서 졸린 눈으로 부득부득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몇 페이지를 볼 때 잠이 확 깨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도. 그 기억 하나로 다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사실 열린책들에서 페이퍼백 절판시킬 때 서점을 돌며 사둔 1권짜리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집에 있었거든...(지금은 2권으로 분권되었다) 저걸 사뒀으니 한번은 읽는게 책에 대한 도리가 아니겠냐며. 


대략 7-8년 전과는 세상이 달라졌고, 나 역시 달라졌기 때문에 그런지 소설을 생각보다는 덜 지루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한량 귀족 찰스와 동네의 창녀 쯤으로 업신여김 받는 사라의 사랑은(빅토리아 시대에는 고상하게 그런 여자를 '동정'한다고 말한다) 지금 보니 꽤나 도발적이고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다. (*이하는 스포일러가 너무 많습니다) 원래 이 소설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긴 했지만 다시 보니 충격적인 클리셰 파괴가 더 눈에 잘 보인달까? 원래 부잣집 도련님과 가난한 여자의 사랑이란 모름지기 남자가 여자의 미모에 눈이 멀어 매달리고 구애하고 처녀성을 빼앗고 그래서 여자를 신데렐라로 만들거나 아니면 여자 인생 말아먹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 소설은 두 남녀가 첫눈에 호기심을 느꼈다는 암시는 있지만 어쨌든 계속 들이대는 건 여자 주인공 '사라'이다. 이미 약혼녀가 있고 체면을 중시하는 남자 주인공 찰스는 어떻게든 이 여자를 떼내려고 하지만 사라는 집요하고 치밀하게, 연기까지 해 가며 찰스를 궁지로 몰고 자신에게 오도록 꼬신다. 가장 압권은, 사라가 눈물을 머금으며 자신이 사실 프랑스 중위와 사랑에 빠졌었고 그와 동침했지만 그는 결혼 약속을 저버리고 달아난 사기꾼이었다고, 자신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도와달라고 애처로운 사연을 털어놓는데 그런 그녀를 믿고 도와주다 사랑에 빠진 찰스가 순간의 정욕(?)을 참지 못해 동침을 하고 보니 사라는 사실 처녀였던 것. 여기서부터 소름이 돋는다. 빅토리안 시대의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목적, 그것도 돈 같은 세속적 목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정복감 성취감 등을 위해 서슴치 않고 자신의 순결에 대해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는다는 건 내가 지금껏 목도한 작가의 상상력 중 가장 대단한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첫날밤으로 완전히 사라에게 홀린 찰스는 자신의 모든 인생을 버리고 그녀와 함께 하겠다 다짐하지만 그녀는 종적을 감추어 버린다. 빅토리안 시대의 곤 걸이라는 건 내가 붙인 은유적 제목이 아니다. 정말로 소설 속의 그녀는 사라져 버린다. ... 그런 사라를 못 잊어 마음의 병을 얻은 찰스는 파혼하고 숙부의 유산도 받지 못하게 되고 넋이 나간 사람이 되어 유럽을 몇 년이나 유랑하는데 (빅토리안 시대에 귀족의 브로큰 허트란 무엇인가...) 런던에서 사라와 비슷한 여자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어 부리나케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녀가 혹시 달아날까 조바심 내며 조심조심 찾아간 곳에서 드디어 그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나를 유혹하고 왜 나를 버린 것일까. 


수년만에 만나 이제라도 함께 하자고 말하는 찰스에게 그녀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 이유는 첫째...제 과거 때문이에요. 전 고독에 길들여졌어요.저는 늘 제가 고독을 혐오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고독을 너무나 쉽게 피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자 제가 고독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전 누구하고도 인생을 같이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 이대로 있고 싶어요. 아무리 친절한 남편, 아무리 너그러운 남편이라도 남편은 결혼 생활에서 제가 다른 여자, 아내로서 적당한 여자가 되기를 기대할 거예요. 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존 파울스의 소설은 기존 전통소설의 전형적인 플롯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큰 인정을 받는다는데 이 대사 하나하나도 정말 너무 예쁘지 않나요? 지금까지 사라 이 미친년이라고 욕하던 나도 이 순간에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감동해서 거의 울 지경이 된다. 존 파울즈는 신내림이라도 받은걸까. 어찌 20년대에 태어난 남성이 여성의 타자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런 대사를 써낼 수 있는걸까. 나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자 주인공 찰스는 빅토리안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을 맡고 있기 때문에 사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당신은 여성이 창조된 목적을 거부할 수는 없소. 당신 말대로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자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단 말이오?" 그리자 사라는 답한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그건 물론 당신 잘못이 아니죠. 당신은 정말 친절한 분이세요. 하지만 저를 이해할 수는 없어요."(You do not understand. It is not your fault. You are very kind. But I am not to be understood.)


최근의 페미니즘 열풍 덕택에 이 책을 보는 나의 감상이 더욱 풍부해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라의 주체성에 대해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사라는 여자에게 꼭 남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라는 귀족 남자의 돈이나 작위에 큰 관심이 없다. 사라는 찰스와 결혼해 팔자 고치기 보다는 그냥 혼자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대로 살고자 한다. 이것은 이 소설 전체의 커다란 덫이고 이 사회에 던지는 큰 물음이다. 우리는 이런 중세시대의 여성상에 대해 '상상'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600페이지 내내 줄곧 물어왔던 것이다.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걸까 하고...마지막에 가서 그녀는 한 마디로 정리한다 "난 원래 그런 여자야. 나를 이해할 생각은 하지마"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라라는 캐릭터의 급진성에 유쾌한 충격을 받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된다. 사라 같은 여성은 상상하지 못하는 '내'가 바로 사라가 존재하기 힘든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찰스는 어찌 되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최소한 사라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정도의 지적인 직관을 가지고 있었음은 감안할때 가슴은 상처받았다 하더라도 조금은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을까 싶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사라" 쯤이랄까. 사라는 자신의 마음은 결코 그에게 주지 않았지만 인간이 존재하는 데에는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위함보다 더 큰 목적이 있음을 -내 인생 내 멋대로 살기 위해-, 그리고 여자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님을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찰스가 비관에 빠지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존 파울즈의 마지막 서술로 짐작할 수 있다. '인생이란 결코 하나의 상징이 아니며, 수수께끼 놀이는 한 번 틀렸다고 해서 끝장이 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은 하나의 얼굴로만 사는 것도 아니며, 주사위를 한 번 던져서 원하는 눈이 나오지 않았다 해도 체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다. 이런 소설은 널리 읽혀야 한다. 600페이지를 견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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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2-08 0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한 십년쯤 전이었나, 이거 엄청 재미없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다시 읽으면 확 다르게 다가오겠네요. 이 책은 아마도 팔지 않은 것 같으니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LAYLA 2016-12-08 20:4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락방님
엄청 재미없게 읽은 기억->백푸로 정확하실 겁니다 껄껄
사실 다시 봐도 인내심이 필요하긴 했어요
그렇지만 번역자 분이 고생하며 열심히 하신거 같다는...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흑흑 락방님에게도 새로운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재독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

자강 2016-12-0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시작하기가 두려워지는걸요~
 
프랑스 중위의 여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2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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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의 태도는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계급을 모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와 샘의 관계는 일종의 애정이나 인간적인 유대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풍요로움 속에 잠겨 있던 당시의 신흥 부자들 대다수가 자신과 하인들 사이에 차가운 장벽을 세워 놓은 것에 비하면 훨씬 좋은 것이었다.

찰스는 대대로 하인을 거느린 집안 출신이었다. 반면에 당시의 신흥 부자들은 하인을 부려 본 경험이 업슨 집안 출신이었다. 아니, 실제로는 그들 자신이 하인의 자식인 경우가 허다하였다. 찰스는 하인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흥 부자들은 달랐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훨씬 혹독하게 하인을 다루었다. 그들은 하인을 기계로 만들려고 애썼다. 반면에 찰스는 하인이 어떤 면에서는 친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요컨대 그가 샘을 데리고 있는 까닭은 더 좋은 기계를 찾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샘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높은 지성과 부드러운 감성, 그리고 유쾌한 냉담함을 보았다.

촌사람들은 도시의 노예들보다 진정으로 갗 있는 것과 훨씬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

아내보다 못난 여자들도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아내보다 잘난 여자들도 있다는 생각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남자도 있다. 찰스는 이제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한 남자인지를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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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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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는 도약대다. 이것은 비밀도 무엇도 아니다. 하지만 좋은 것들이 늘 그렇듯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해서 쉽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를 향한 길에는 가끔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향배를 좌우하는 건 선택이나 욕망, 노력 등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순전한 우연이다.

독자들은 저자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해 일할 뿐이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라는 건 알지만, 바로 여기에 독서의 풍부함이 있다.

당신이 보기에 그녀는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처음 만난 지 반평생이 넘었으니 정말로 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에 새겨진 그녀의 이미지가 겉모습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세 계약은 인생이라는 다람쥐 쳇바퀴의 휴게소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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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엔 실연당한 친구의 집으로 갔다. 갑자기 밥 먹으러 오라기에 누군가 옆에 있어주길 바라는구나 싶어 찬바람을 뚫고 친구의 한옥집으로. 등유곤로를 놓고 그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은 친구의 집은 손님이 온다며 바닥도 절절 끓게 보일러를 돌려두어서 무척이나 훈훈했다. 전구가 하나 나갔다며, 은은한 노란 빛으로 감싸인 서촌의 작은 한옥집. 이런 안락함을 느낄 수 있다면 겨울도 나쁘지 않구나 싶을 정도로. 친구가 해준 밥을 먹고 친구가 일본에서 사온 고급 양갱을 디저트로 먹고 친구가 새로 산 몇달치 월급의 오디오로 김추자의 레코드를 들으며 바닥에 뒹굴거리니 귀가 녹고 엉덩이는 바닥에 붙어버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더 엉덩이를 떼기가 어려웠다. 친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뭐 견뎌야지 어쩌겠어." 나이가 있어서 지난 상처들이 있어서 상대가 너무 소중해서 얼마나 그는 얼마나 소중하게 그녀를 대했던가. 소중했던 만큼 깨어진 그 날이 더 날카로울 거 같아서 내 마음도 아팠지만 그는 정말로 꾸욱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썸 한 달만 타다가 깨어진 애들도 죽겠다고 그래요. 나 아파 죽겠다고 난리를 친다구요. 그런데..." 그런데 얼마나 아프시겠어요. 란 말이었는데 그래도 아무말이 없다. 그렇다면... 그래서 우리는 아무 이야기를 했다.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 살림 이야기(무선 청소기를 일렉트로룩스 신상으로 살 것인가 다이슨으로 살 것인가), 비수기 우리의 시간을 어찌 보낼 것인가,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밥벌이 방편, 85년 신촌 그랜드 백화점 꼭대기에서 했던 들국화 투어 콘서트, 야 이 엘피판은 너보다 나이가 더 많잖아... 


집으로 돌아와서는 보고 싶은 사람과 오랜 전화 통화를 하였다. 그 사이 마음이 변한건가 나 혼자 초조하였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그대로인거 같아 마음이 놓였다. 5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나 함께 갔던 찻집에 들렀다 하였다. 이제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 곳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 주었다. 별로 기억나는 대화의 내용은 없다. 그런데도 새벽 4시 반까지 끊어지는 전화를 몇 번이나 다시 연결하여 붙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내 마음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별볼일 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이나 이어가게 하는 맹목적인 애정의 힘. 전화를 끊을 즈음에 그 사람의 농담섞인 냉소에 내가 "넌 못됐어. 그런데 나한텐 잘해줘."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넌 착한데 나한테만 못되게 굴잖아." 라고 답했다. 우리는 조심스럽다. 아주 조심스럽다. 잘 웃지 않고 말도 잘 하지 않는 그 사람의 마음을 나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확인한다. 실망스런 디저트를 아무렇지 않은 척 조용히 먹는 나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 즐거워 보이지 않잖아." 라고 할 때라던지. 


오늘 물건 대금을 파운드로 송금하러 갔더니 트럼프 덕분에 환율이 올라 은행 직원이 내 계좌에서 돈을 빼며 "파운드가 이리 비쌌나요?" 라고 하였다. 더 일찍 송금하지 못한 나의 탓이지 싶어 얼마나 손해를 보았나는 두드려 보지도 않았다. 나는 트럼프의 승리에 분노하고 힐러리가 여성이라서 진 것이라고 씩씩거리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트럼프는 미국이니 힐러리와 경합이라도 한 것이지 한국이었음 지지율 60-70%로 당선될 사람 아닌가? 한국에서 자칭 진보니 노빠니 페미니스트니 하는 사람들 중 외노자를 혐오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페미니스트라고 나서는 젊은 여성들이 매매혼이나 성매매, 성폭행 등의 이슈를 근거로 동남 아시아 출신 외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적개심을 품고 있는지 보면 클린턴 저리가라 수준이다. 남의 일이니 이성이 작동하지 내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외노자 척결하겠다 외치는 후보에게 큰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자기안의 혐오는 보지 못하고 다른 나라 정치에 선비질 하는 걸 보면 참 어이가 없다. 힐러리의 승리를 여성의 패배라고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도 별로 와닿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는 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창으로만 세상을 본다며 그것역시 또 하나의 도그마 아닐까. 힐러리의 패배에는 수많은 요인이 있고 그녀의 성별은 하나의 이유일 뿐이다. 힐러리에게 좆만 달렸어도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란 말...그건 힐러리에게도 모욕일거 같은데 또 남의 일이니 사람들은 참 말을 쉽게 한다. 너에게 좆이 달렸으면 니 인생이 180도 달라졌을거 같아?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내일은 집안 대청소를 하고 커버레터를 업데이트 하고 저녁은 친구의 아이 돌잔치에 갈 것이다. 부지런해야 하는 하루. 추위 때문에 몸이 힘들지만 하루하루 견뎌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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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6-11-1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님의 글을 10년도 더 전에, 그러니까 라일라님 고딩때부터 봐 왔는데요. 글도 사람도 매년 매년 gorgeous 해진다고 느껴요.(페루였던가요? 나쁜 녀석 엉덩이 걷어차 준 페이퍼는 프린트해서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이런 글 모아서 책 내세요!)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어디 휩쓸리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을 갖추고, 삶을 즐기고 그런 모습들이 보기 좋습니다. 마치 성장소설을 읽는 듯한 즐거움도 있고요. 멋져요!


LAYLA 2016-11-13 00:52   좋아요 0 | URL
제가 알라딘을 떠나지 못하는 건 이렇게 늘 부둥부둥 해주시는 고슴도치 이웃님 때문이에요. 말미잘님이 그려주신 제 모습에 너무도 부족한 저이지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미잘님의 애정에 부응하여~~~~♥
 

요즘 왜 이렇게 갖고 싶은게 많은지 모르겠다.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오면 돈의 흐름이 예상되니 할부라도 긁겠지만 장사하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으니 함부로 돈을 쓸 수 없다는 정신적인 압박감이 물욕을 더더욱 부추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딱히 사치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기본적인 삶을 돌보는 부분이라 생각하는데도 돈이 엄청나게 든다. 


우선 지멋대로 재부팅을 반복하는 저 휴대폰부터 바꿔야 한다. 그리고 입주할때부터 아파트에 달려있는 오랑캐 같은, 근본없이 못생긴 저 주방 식탁등도 갈고 싶다. 이젠 흔하고 흔하다지만 루이스 풀센의 등으로 달고 싶은데 직구를 해서 단다고 해도 등값이며 인건비며 돈백은 쉽게 깨지겠지. 한남동 가면 인테리어 편집샵 여기저기 색깔색깔 달린 그 흔하디 흔한 루이스 풀센을 부엌에 걸고 싶어서 나는 2016년 신년 목표로까지 부엌등 갈기를 내걸었었다. 물론 돈뿐 아니라 그걸 해치울 의지와 노력과 패기 그 모든 것을 포함한 목표였지만 돈에 쪼들리며 2016년이 막바지로 치닫는 지금 생각해보니 - 사실 돈이 아주 넉넉했더라면 의지와 노력과 패기 그 모든게 다 뭐 필요있었을까 650유로 주고 직구할 필요도 없이 관세내느라 우체국 갈 필요도 없이 ph5의 긴 전깃줄을 한국식 낮은 아파트 천장에 맞게 자를 줄 아는 솜씨좋은 기술자 찾느라 품 팔일 없이 그냥 한남동에서 190만원인가 250만원인가 카드 긁으면 그만인 것을.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커튼. 입주한지 어언 몇년인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미니멀리스트와 레이지니스트의 경계 어딘가에서 방황하며 커튼과 블라인드 없이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이 아파트에 살아왔다. 그리고 오늘 우연히 지나가다 눈에 들어온 커튼 가게에 들어가 견적을 받으니 거실 빼고 방4개 커튼 견적이 156만원인가 그렇다. 내가 원하는 암막으로 하려면 지금 선택한 고급원단 뒤에 암막원단을 붙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건 방 하나당 14만원이 더 든단다. 그래서 커튼 값으로 최소 150만원의 지출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 갖고 싶어 몇 달이나 눈 앞에 아른거리는 발렌시아가의 가방이 150-200만원 또 역시나 눈 앞에 아른거리는 귀걸이는 50만원... 이것들은 언제나 가장 후순위로 밀려있지만 가장 또 강렬하게 바라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내년 아빠의 환갑을 맞이해 무얼할까 생각하다 가족 초상화를 작가에게 의뢰해 그림으로 남기고 싶단 생각을 하였는데 보통 작가들의 그림 사이즈에 따른 가격만 생각해도 최소 300은-500이니 거기에 우리 가족을 그려달라고 의뢰하고 이리 해달라 저리 해달라 구는 값까지 치면 돈은 더 많이 필요하겠지. 정말 이렇게나 창의적이고 예술적으로 돈쓸생각을 하는 나란 인간! 


10월에 친구들과 홍콩에 가자고 티케팅을 한 것이 8월이었는데 여자친구들과 같이 가는 여행이라고 하니 티켓을 끊는 순간부터 돈 쓸 생각부터 했다. 비싼 애프터눈 티를 마셔야 하고 비싼 음식점에 가야 하고 제일 전망이 좋다는 호텔에 묵으며 수영도 해야 하며...그리고 그렇게 돈 쓸 궁리를 하자 갑자기 장사에 더 열성적으로 매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기세로 물건을 팔았고 이번달에는 장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 매출도 올렸다. 그런데 왜 내 주머니에 남는 돈은 없는 것인가? 장사의 세상이여...(장사가 커지고 물건 굴리는 규모가 늘어나니 번만큼 재고를 더 들여야 했다) 아빠가 사업을 해서 이십년을 그리 견뎠다. 지금도 엄마는 당시를 돌이키며 직원들 월급날이며 각종 거래처 결제날 다가오면 통장이 빵꾸나는거 아닌가 마음이 졸여 힘들었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말인지 이제 알겠다. 절절이 알겠다. 직원 월급도 없이 나 하나 장사 굴리는 것도 이리 숨이 콱콱 막히는데 엄마는 그걸 20년 했으니...  나는 돈만 잘 벌면 세상만사 복세편살하며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품위유지 느긋히 하면서. 근데 벌어도 그리 행복하지 않다. 번 것보다 더 바라고 그렇게 돈돈 바라는 마음으로 복세편살 품위유지는 불가능하다. 내 장사라 신경이 예민해 잠을 못 자고 견디다 잠병이 나기도 하였다. 어디서나 널부러져 자기로 유명했던 나 같은 인간이 잠을 못자 병이 나다니! 그래서 어제도 예민한 신경으로 잠들지 못해 괴로워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건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다. 직장 생활도 싫지만 이것 역시 내가 바라던 그런 삶은 아니다. 이렇게 가봐야 정말 뻔한 인생일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물론 장사를 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학교나 직장에서 배우지 못했던 많은 것을 몸으로 배워서 너무나 신비롭고 경이롭기까지 했던 경험이었다. 하지만 어떤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이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홍콩 여행가서 실컷 웃고 오면 좀 리프레쉬가 될까? 내가 장사를 하며 뿌듯하게 생각하는 건 내가 직접 돈이 오가는 '남의 돈 먹는' 일을 하면서도 다툼을 벌인 적이 없고 인간에 대한 냉소치가 더 심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회사 생활하면서 인간을 뭣같이 보게 되어 내 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고 그것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가슴이 욱씬하기도 하였다. 왜 우리는 그렇게 일당 십만원되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며 서로를 미워해야 했을까요. 그런 일이 싫어서 직장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일이 싫어서 장사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늘 최선의 태도와 진심과 예의로 대했다. 그리고 정말로 다행히 나는 내 예의에 똑같이 예의로 답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파는 물건이 고가라 대부분의 고객이 30대 이상 고수입의 여성이라는 점도 있으리라. 그렇다 하여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며 장사를 해왔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다. 이것이 이 일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였다. 내 선에서 인간관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 이 장점을 지키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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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4 2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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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4 2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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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6 07: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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