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다, 내 인생 - 이 시대 최고 명사 30人과 함께 하는 한 끼 식사
신정선 지음 / 예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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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냉면 맛을 알기 어렵듯이, 이십대가 그런 사랑을 이해하기 어렵겠지. 맛을 아는 사람이 최고로 꼽는 맛이 있듯이, 살아본 사람 눈에 보이는 감정의 물결이 있는 법이니까.

-이순재, 비빔냉면-22쪽

최근에 문 연 이태원 식당 '더 믹스드 원' 메뉴 짤 때는 사흘 밤을 꼬박 새웠어요. 미친 거죠. 입에서 냄새 나죠, 몸에서도 땀내 풍기죠. 하지만 완성됐을 때의 성취감! 제가 저를 쓰다듬으면서 "아, 역시 또 한 건 했다. 야, 에드, 잘했다." 하는 거죠. 속된 말로 '자뻑'인데 뭔가를 창조하는 사람은 자뻑이 있어야 해요. 후배들한테도 꼭 이야기해줘요. 네 음식에 네가 감탄하지 못하면 남들이 감탄 해주지 않는다고요. 내가 뭔가 하나 해냈구나, 라는 그 순간의 느낌 때문에 미친 듯이 일할 수 있는 거죠.

-에드워드 권-46쪽

주로 일했던 게 일식당이었어요. 스물여덟 살쯤이었는데, 어떤 스시집에서 일하다가 또 일하기가 싫은 거예요. 일도 너무 많고 엄했어요. 그때만 해도 일본 사람들에게는 아르바이트란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한번 취직하면 거기서 평생을 보내는 거죠. 장어구이 집에 취직하면, 쌀 씻는 것만도 2년을 해요. 장어 만지려면 7년이 걸리고, 장어 구우려면 10년은 걸렸죠. 그런 곳에서 한두 달 일하고 그만두겠다고 말한다는 건 도무지 인간으로 취급해주기가 힘든 수준이었죠. 하지만 저는 허접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그만두려고 했어요.
... 밤늦게 영업이 다 끝나고 나서려는데 사장이 "팁통을 열어라"그러시는 거예요. 전부 놀랐어요. 팁을 모아두는 그 통은 매월 말에야 열어서 나눠 갖는 거였거든요. 그런데도 사장은 팁통을 열더니 정확하게 사람수대로 나눈 몫만큼 저에게 줬어요. 주위 직원들 반응이야 설명드릴 필요 없겠죠. 어색하게 돈을 받아들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나왔죠. 30미터쯤 갔을까, 사장이 나오더니 절 불러요. 잠깐 와보라고 하는데 속으로 '참고 참았던 화가 폭발했구나'했어요.-55쪽

어쨌든 다시 들어갔죠. 몇 대 맞는 것쯤 겁 안 나던 나이였으니까요.
사장이 들어온 저를 보고 스시 카운터에 앉으라더니 "너 우리 집 초밥 먹어본 적 없지?" 묻더라고요. 사실 전 그때까지 초밥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어요. 가게에 남는 거야 물론 있었지만 괜한 자존심에 먹기가 싫더라고요. 사장이 "오늘 네 생일이니까 초밥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한 점씩 만들어서 카운터에 올렸어요. 그냥 올리는 게 아니고 하나씩 올릴 때마다 "농어!" "장어!" "도미!' 하는 식으로 엄숙하고 힘찬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면서요. 허투루 만든 게 아니고 사장이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는 뜻인 거죠. 아, 그런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진짜 상상도 못할 맛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음식이 있지' 하면서 정신없이 입으로 집어넣었어요.-56쪽

다 먹고 나니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했더니 사장이 그랬어요. "나는 못난 집에서 자랐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지만, 사람 볼 줄은 안다. 너는 언젠가는 꼭 세상에서 제일 비싼 초밥을 먹을 사람이다. 나쁜 마음먹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김대우-57쪽

...그러면서 차츰차츰 친해진 거야. 데이트를 시작했는데, 김 시인이 치질에 걸렸어.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 돈이 없으니까 치료를 제대로 받기 어려웠어. 내 용돈을 치료비로 썼지. 그걸로도 모자라서 우리 집 다락에 있던 피륙을 한 필 두 필 몰래 빼다 팔아서 보탰어. 그러다 우리 아버지한테 들켰잖아. 난리가 났지. 절대로 만나면 안된다고 강제로 떼놓는 바람에 몇 달 동안 못 만난 거야. 그동안에 김 시인은 몸이 어지간히 회복돼서 서울대학교 부속 간호학교에 영어 교사로 취직했어. 우리 집에 몇 번 찾아왔지만, 아버지가 문전박대했다.
어느 날 외출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익숙한 손이 내 팔뚝을 붙잡아. 첫마디가 아, 아직도 생생해 "마이 소울 이즈 다크" 그 소리 들으니까 눈물이 콱 쏟아지대. 그날부터 집에 안들어갔어. 결국 시어머니가 방을 하나 얻어주셨지. 그게 1949년. 살림을 시작한 거지. 아버지 몰래 내 물건을 하나씩 살살 옮겨왔어. 오늘은 옷가지, 내일은 책, 하는 식으로. 어머니가 명주 이불 해주시고 시어머니가 금반지 해주시고 그래서 우리는 부부가 됐어. -96쪽

시 한편에 300원 하던 시절이었지. 내가 양계하고 바느질감 얻어서 한 달 생활비 2600원을 벌었어.

지금도 김 시인의 작품을 꺼내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받아. 시는 그림 같고, 산문은 조각 같아. 정말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역시 최고다, 싶지.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안기고 싶어.

-김현경 (고 김수영 시인의 아내)-97쪽

음식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게 과하게 익히는 거예요. 차라리 덜 익은게 맛있어요. 덜 구우면 물이 약간 배어 있어서 보드랍잖아요. 그런데 과하게 익히면 뻣뻣해지죠. 연출자도 요리사와 같아요. 재료, 즉 배우나 대본이 무엇이냐가 매우 중요하고, 재료가 지나치게 익지 않도록 잘 조절해야 하죠. 사람이 지나치게 성공해서 어느 수준을 넘어가 버리면 음식과 마찬가지로 질겨져요. 원재료 안에 있던 수분기가 없어지면 음식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매력이 없어지더라고요. 배우에게는 순수함과 인간적인 매력과 풋풋한 연기가 원래의 수분이겠죠. 그걸 잘 지키도록 요리사인 연출자가 도와주는 거고요.

- 이지나-156쪽

"내가 업어서라도 통학시켜주마. 그 학교 가라.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필요한 돈인데 어떻게든 못 구해주겠냐"라고 했겠죠. 저희 어머니는 딱 한마디 하셨어요. "버스비 없다." 결국 저는 집에서 가까운 다른 중학교에 가게 됐죠. 1등으로 입학하게 돼서 입학식 때 선배들 환영사에 답사를 맡게 됐어요.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좋아하시더라고요. 입학식 전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멀건 죽을 저녁으로 먹었어요. 두 살 아래 동생도 배고프다고 투정부리다가 같이 잠들었죠. 다음 날 일어나서 세수하고 방에 들어왔더니 밥상 위에 물을 가득 담은 대접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인절미가 세 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무런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이게 웬 떡이야" 했죠. 바로 그때 ‘떡’이라는 소리에 자던 동생이 번쩍 눈을 뜨더니 순식간에 하나를 집었어요. 그런데 동생만큼이나 빨랐던 게 어머니였죠. 동생이 떡을 집기가 무섭게 어머니가 손등을 야멸치게 내려치신 거예요. 원래 때리는 분이 아니셨거든요. 그런 어머니한테 한 대 맞은 동생은 아파서가 아니라 놀라서 멍해졌죠.
-164쪽

어머니는 "형이 1등으로 들어가서 오늘 답사해야 되니까 이걸 먹고 가야 해. 배가 고프면 말이 나오겠니" 하셨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울먹이시는 거예요. 저는 떡 하나를 입에 집어넣고 허둥지둥 방을 나섰어요.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는데 그날은 가도 가도 학교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어요. 눈물 젖은 어머니 모습도 떠오르고 철없는 동생도 생각났지요.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 쌀이 점점 떨어지고 먹을 게 없다고만 생각했지, 생계나 생존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했어요. 하지만 그날, 인절미 하나를 먹고 학교 가던 날, 아, 이제는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구나 하는 선명한 자각이 저를 두드렸어요.
어머니가 준비한 인절미,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걸 구하셨을까 싶게 작고 볼품없었어요. 손가락 마디 두 개 정도 됐을까. 차지고 쫄깃하지도 않았고 약간 꾸덕한 채로 콩고물을 살짝 덮고 있었죠. 그 인절미가 저를 소년에서 청년으로 만든 거지요. 열세 살 소년으로 집을 나섰던 저는 열세 살 청년이 돼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64 쪽

지금이야 아파트에 많이 사니까 층별로 다니면서 신문 돌리면 속도가 꽤 나지요. 하지만 그때는 걸어 다니기도 힘든 단독주택이었어요. 비가 오면 특히 난감했어요. 지금처럼 신문을 비닐로 싸는 기계도 없었고, 초인종을 눌러서 반드시 사람에게 전달해야 했죠. 비오는 새벽에 사람을 깨워 나오게 하려면 시간은 오죽 걸렸겠으며 마음은 좀 초조했겠어요. 개 있는 집도 얼마나 골치가 아프던지요. 대문 너머로 던져 넣은 신문을 개가 물어뜯기도 하니까요. 학교에 가면 보급소에서 연락이 와요. 어느 집에서 항의가 들어왔으니 다시 갖다 주라고요. 모든 정보가 신문에서만 나오던 때이니 하루 배달이 안 되면 정말로 큰일이었죠.
고생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상 위에 놓여있던 인절미가 생각났어요. 다시는 울면서 인절미를 먹지 말자, 엄마를 울게 하지 말자, 동생을 배고프게 하지 말자. 그때의 결심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제가 약속에 철저해진 바탕이 거기서 온 거죠. 개가 있는 집은 철저하게 표시를 해뒀다가 대문 옆에 끼워둔다든지 따로 꾀를 썼거든요. 약속을 못 지키면 불편한 건 나다, 아무리 불편한 약속도 일단 했으면 지켜야 한다. -배한성-167쪽

건축은 삶을 짓는 것이지요. 하이데거가 그랬던가요. 우리는 거주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거주는 건축을 통해서 이뤄진다고요. 건축이라는 건 삶의 존재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삶이 스며든 건축에는 기억도 깃들겠고요. -252쪽

건축하는 후배들은 물론이고, 요리사, 화가 등 창조하는 고통을 선택한 젊은이들에게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 얘기를 해주고 싶네요. 브랑쿠시는 무척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 고향을 떠나서 천신만고 끝에 파리에 갔지요. 간신히 친구의 도움으로 작은 아틀리에를 얻었는데, 거기 들어간 첫날, 벽에 선언하듯 써 붙인 글귀가 압권입니다.
"너는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아, 이 말 너무너무 근사하지 않습니까. 제 가슴에 선연한 빛줄기처럼 와서 꽂힌 말입니다. 자신의 창조적 재능에 관해서 믿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존감을 잃지 말고 왕처럼 절대 굴하지 말라는 것이며, 작업을 할 때는 노예처럼 성실하게 하라는 것이죠.
일단 자기 재능을 믿어야 합니다. 재능이 있다는 걸 믿어야 신처럼 창조도 하게 되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건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일 겁니다. 저는 건축이 우리 삶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건축을 통해서 삶을 바꿀 수 있고, 나아가 삶을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처럼 위대한 직능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가요. 그렇게 믿으니 이 일 자체가 저의 의지를 북돋워주고, -259쪽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단단히 서게 하는 거죠.

-승효상-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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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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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들이 일반적 연구의 목적이라고 생각되는 것, 즉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상태를 본질적으로 영구히 개선시키려고 하는 방법에 대해서 진실로 성의를 가졌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활 상태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어야 한다. 노동력의 공급을 제한하는 것만이 그 가격을 실제로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그들 자신이 이러한 상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오직 그들만이 이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시장에서 노동력이 오히려 부족해지는 사태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이 대안의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어느 정도 노동력 부족 현상이 생기는 것은 틀림없겠지만, 한 나라의 부와 번영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우려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력 부족을 초래한다는 문제를 가장 불리한 관점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부자들이 언제나 입으로는 실현되기를 희망한다고 공언하던 것이 실제 이루어진다는데, 여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사소한 불편을 참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공언에 대해서 진정으로 충실한 태도를 취했다고 할 수 없다. -89쪽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선은 철없는 어린애 같은 장난이 아니면 위선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 인구론 하 160쪽-89쪽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힘든 날들을 참고 견뎌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

-푸시킨-93쪽

측은지심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함께 느끼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맹자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에게는 이것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 선왕은 도살장으로 글려가 제물이 될 소를 보고 불쌍하게 생각한 나머지 소를 살려주고 대신 양을 잡으라고 한 일이 있었다. 이 일 때문에 인색하다는 비난과 함께 소는 불쌍하고 양은 불쌍하지 않냐는 비웃음을 샀다. 그런데 맹자는 제 선왕이 눈에 보이는 소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보였기에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될 자질이 있다고 칭찬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백성을 어지 긍휼히 여기겠느냐는 것이다. -126쪽

귀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귀함을 지니고 있건만 생각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다.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진정 귀한 것이 아니다. 조맹이 귀하게 해준 것은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다.

-맹자, 고자 상,17
-131쪽

천하라는 넓은 집인 인仁을 거처로 삼고, 천하의 바른 자리인 예禮에 서며, 천하의 대도인 의義를 실천하며, 뜻을 얻엇을 때는 백성과 함께 그 길을 가고, 그렇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간다. 부귀도 나를 흔들 수 없고, 빈천도 나를 바꿀 수 없으며, 위세와 무력도 나를 꺾을 수 없어야, 비로소 대장부라고 하는 것이다.

-맹자, 등문공 하, 12-133쪽

미개인 사회에서 몸이나 마음이 허약한 사람은 곧 제거된다. 그리고 생존하는 사람의 건강 상태는 일반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명화한 우리들은 몸이나 마음이 허약한 사람이 제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대하느이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는 저능한 바보나 병든 사람을 위해 보호시설을 세우구 빈민구제법을 제정한다. 의료인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최대한의 기술을 발휘한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도움은 주로 본능적인 동정심의 부수적인 결과다... 확실한 이유가 있을 때에도, 우리 본성의 고결한 부분이 악화되지 않는 한 동정심은 저하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면 어느 정도의 이익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극도의 죄악도 함께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약한 사람들이 생존하고 자신과 똑같은 후손을 퍼뜨리는 것이 틀림없이 나쁜 효과를 미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용이 계속해서 일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즉 약하고 열등한 사회구성원이 건강한 사람처럼 자유롭게 결혼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다윈-218쪽

유한계급에게는 가치가 가격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가격이 가치를 결정한다.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 목적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용을 얻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지출을 통해 부를 과시하는 것이다. 아름답고 품질은 좋지만 값이 싼 보석은 아무 효용도 주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값이 비싼 것이, 품질과 무관하게, 오로지 비싸다는 이유 때문에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값이 비쌀수록 수요도 늘어난다. 이것이 소위 '명품의 경제학'이다. 곤란에 빠진 경제학자들은 베블런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하나의 드문 에외로 치부하여 논리적 파산을 모면했다. 베블런의 이론이 적용되는 상품에는 베블런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Veblen-goods)-235쪽

문명이 발전하는 가운데 다수의 대중이 겪고 있는 빈곤은, 현인이 추구하고 철인이 찬양했던 혼란과 유혹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의지할 곳 없는 절망적인 빈곤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짐승 같은 노예로 만들며 고상한 천성을 얽어매고 섬세한 감성을 무디게 하며, 그 고통 때문에 짐승도 마다할 짓을 하게 만든다. 빈곤은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파괴하고 분쇄하며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함을 박탈하고 노동계급을 저항할 수 없는 무자비한 기계와 같은 힘으로 억누른다. 시간당 2센트를 주고 여자아이들을 고용하는 보스턴의 공장주는 그 아이들을 가련하게 여기겠지만 임금을 더 주지는 못한다.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그도 경쟁의 법칙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래가 감정의 지배를 받으면 사업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다. 그리하여 위로는 노동이 창출한 소득을 아무 대가도 주지 않고 지대로 수취하는 계층에 이르기까지, 중간의 모든 단계를 공급과 수요의 법칙이 지배함으로써, 하층계급을 궁핍의 노예로 억압하는 그 힘에 대해, 마치 바람이나 조수에 대해 그런 것처럼 누구도 대항하거나 항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노예제도를 초래했-263쪽

고 또 초래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것, 만인을 위해 베풀어진 자연의 일부인 토지 독점이다. ...토지 사유는 커다란 맷돌의 아랫돌이다. 물질적 진보는 맷돌의 윗돌이다. 노동 게층은 증가하는 압력을 받으면서 둘 사이에서 갈리고 있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264쪽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과거 여러 세대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자기의 잠재 능력을 발전시켜나가는 데 있다. 현대인도 5000년 전의 조상보다 더 큰 두뇌를 가진 것이 아니며 더뛰어난 선천적 사고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인은 여러 세대의 경험에서 배우고 그것을 자기의 경험과 결부시킴으로써 사고의 효율성을 몇 배로 확대하였다. 생물학자들이 부정하는 획득형질의 유전이야말로 사회 진보의 토대인것이다. 역사는 획득된 기술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진보다.

-E.H.카, 역사란 무엇인가, 163-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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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술꾼 - 임범 에세이
임범 지음 / 자음과모음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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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 종교에서 물로 세례를 준다고 하지만, 애에서 어른으로 될 때는 술로 세례를 받는 게 아닌가 싶어요. ...술과의 최초의 접촉이랄까? 그때의 느낌은 대부분 중독성이 있는 것과 처음 접촉할 때 다 그렇듯이 굉장히 어지럽고 황홀하고, 제정신이 아니고, 뭐랄까, 연애를 한다고 할까, 그런 기분...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와 누우면 빙빙 도는 세계, 천장만 도는 게 아니라 우주 전체가 도는 것 같으 는낌이, 이것이 어른들의 삶이구나, 나도 이제 어른이 됐구나..."
-성석제-24쪽

몇 해 전 한겨례신문에 연재된 임재경 회고록에 조건영 이야기가 나온다. 1980년 5월 민주인사들이 붙잡혀가고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 조건영이 광주 사진을 외신에 전해주기 위해 뛰어다녔다는....(조건영은 그 직후에 공안기관에 잡혀가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왜 안 그랬겠나. 당대의 싸움을 피한 이와 마주한 이는 나이 들어 웃는 표정에 온유함의 크기가 다르다. -32쪽

"20대에 연극을 할 때는 연극이 (사람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생각했고, 그 뒤에 상업영화를 할 때는 영화가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술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사색의 여유를 주는) 차와 같은 것을 하고 싶다."

그는 20대 때 연극판에서 술값도 못 벌면서 술은 끊임없이 마셨다고 한다. "한국은 술 인심이 참 좋아!" 제 돈 내고 술 마시기 시작한 게 30대 중반 영화 <약속>에 출연한 이후였단다.

- 정진영-39쪽

1990년대 초중반, 술집 심야영업을 금지할 때였다. 카페 소설 주인 염기정이 자정 넘어 영업하다가 걸렸다. 경찰이 영업 허가증을 들고 갔다. 파출소로 오라고 했다. 그 직후에 차승재가 왔다. 염기정 왈, "허가증 뺏겨서 장사 못 해." 차승재가 앞장섰다. 염기정에게 라면 한 박스를 사라고 했다. 그걸 들고 둘이 함께 파출소로 향했다. 경찰관에게 차승재가 말했다. "제 집사람인데요, 제가 무능해서 술 팔게 하고 있는데..." 차승재는 염기정의 남편이 아니다. 단골손님일 뿐이었다. 차승재와 경찰관 사이에 몇 마디 말이 더 오갔고 경찰관이 딱하다는 듯 허가증을 돌려줬다. 이후 심야영업 단속 나갈 때 염기정의 카페에 미리 연락해 주기까지 했단다. -43쪽

하지만 무슨 일에 앞장서는 건 그의 체질과 거리가 멀다. 배후에서 활약하는 음모가 스타일도 아니다.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하고 군대 갈 때까지 공자에 위장취업도 했음에도 그는 느긋함과 한량스러움이 몸에 배어 있었다. 5공 때인 1984년 가을, 대학 4학년일 때다. 이런저런 걱정이 많을 시기인데, 그는 졸업 전까지 할 일 세 개를 정했다. 당구, 바둑, 기타. 학생회 사무실에서 바둑 두고 기타 치고... 운동권 후배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은데 그는 태연히 벽에 낙서를 했다. '마지막 가는 이 가을을 저질러버리자!' 그 무렵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경찰이 학생회관을 수색햇다. 그 장면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면서 그가 쓴 '....저질러버리자!'라는 글씨를 길게 비추었다. 내 눈에도 과격하게 보였다. 그 저질러버리자는게 당구, 바둑, 기타였음을 알 길이 없는 시청자들에겐 더했을 것이다.
-박덕건-190쪽

내 다른 친구들에 비해 김성수는 확실히 특벽한 데가 있다. 나와 친한 친구 중에 유일하게 이과 출신이다. 난 이게 많은 걸 설명하는 것 같다. 문과 출신들은 대체로, 그중에서도 언론이나 문화 계통에 종사하는 이들은 더욱더 자기 견해, 세계관, 자아 같은 것들에 아집이 있다. 예민한 만큼 자폐적이거나 공격적이기 쉽고, 논쟁적인 만큼 관념적이기도 하다. 아울러 남들과의 차이나 거리를 잘 인정하지 못해서 동지 아니면 적으로 만들고 마는 경향이 있다.
김성수는 그렇지가 않다. 차이나 다름을 잘 인정할 줄 안다. 음식,스피커 등 구체적인 사물에 대해선 까다로울 때가 있지만 생각이나 취향 등 관념적인 것들에 대해선 너그럽다. 언어나 사고도 구체적이고 담백해서, 김성수라면 '고독하다'는 말 대신 '심심하다'라고 말하고, 영혼이 아프네 어쩌네 하는 식의 엄살과도 거리가 먼 스타일이다.-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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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책방 - 잠 못 드는 밤을 위한 독서 처방전
조안나 지음 / 나무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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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49쪽

신이시여,
제게 은총을 내려주시어 몇 줄의 아름다운 시를 쓰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내가 못난 자,
멸시해 마지 않는 자들보다도 더 못난 인간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게 해주소서.
- 파리의 우울, 보들레르-83쪽

...
내가 가진 거라곤 출렁이는 자유
소금처럼 짭짤한 외로움
이거면 시인의 식사로는 풍족하다.
사랑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
할머니와 어머니-나의 보수주의, 문영미-117쪽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 밀매상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최고의 행복은 개성의 발휘가 아니라 상실 속에 있는 것이다.

-전혜린-123쪽

가령 당신이 앞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삼류화가로 그친다면, 그래도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정말 당신은 지독한 바보로군. 나는 그리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고 하지 않았소. 이 마음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거요. 물에 빠진 사람이 빠졌을 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가 되겠소? 어떻게 해서든지 물 속에서 빠져 나와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이 아니겠소?

-달과 6펜스, 서머싯 몸-128쪽

추억이란 그것이 슬픈 것이든지 기쁜 것이든지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의기양양하게 한다. 슬픈 추억일 때는 고즈넉이 의기양양해지고, 기쁜 추억일 때는 소란스럽게 의기양양해진다. -김승옥-136쪽

태양은 단지 아침에 뜨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168쪽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지하인간, 장정일-227쪽

세상의 다른 모든 일들은 나이든 사람들이 잘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만은 모험을 겁내지 않는 젊은이들의 전공 분야다. 젊은이들은 아직 자기가 어던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잇는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238쪽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련과 고난을 '선택 받은 자의 몫'으로 여길 줄 알는 기개가 있어야 한다.
-작가, 박상우-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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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의 사내 필립 K. 딕 걸작선 4
필립 K. 딕 지음, 남명성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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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귀한 책인데 어쩌다 구하게 됐습니다. 나다니엘 웨스트 작품이죠. 제목은 '미스 론리하츠'입니다. ... 고통에 관해 독특한 관점을 보여줍니다. 아주 근본적인 고통부터 아무 이유 없는 고통까지 꿰뚫어보고 있죠. 종교라면 모두 다루는 문제입니다. 기독교 같은 종교에서는 고통을 죄악과 연결해 설명하곤 합니다. 웨스트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관념보다 훨씬 흥미로운 견해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그가 유태인이기 때문에 아무 이유 없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독일과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면, 유태인들이 세상을 장악했을 겁니다. 모스크바에서 월스트리트까지 말입니다."-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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