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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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열일곱 소녀를 사랑한다는 설정이 징그럽다 느껴져 책은 보지 않고, 박해일이 좋아서 영화를 먼저 보았다. 후에 우연히 책을 보게 되었는데 놓을 수가 없었다. 작가의 연륜에 걸맞게 품위와 흡입력을 모두 갖춘 문장이라 소설 읽기가 즐거웠다. 지인분이 젊은 소설가와 비교해 '체급이 다르다'는 표현을 썼는데 딱 맞는 말인듯 하다. 

 

이 소설이 매력적인 점은  독자가 이적요.서지우.한은교의 캐릭터를 읽으며 제 각각의 해석을 할 여지가 풍부하다는 점이다. 작가가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의 이야기인듯 실감나고 설득력 있게 써 놓았으니, 이제 독자들이 거기에 걸려드는 것인데 소재가 소재인 만큼 나이와 성별에 따라 제각각의 감상평이 쏟아지는 게 무척 재미있다.

 

내가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누가 제일 불쌍해?" 혹은 "누가 제일 못됐어?"

대체로 남자들은 은교가 불쌍하다 하고, 여자들은 서지우나 이적요가 불쌍하다 한다. 일반화의 위험을 안고 감히 말하자면, 남성독자들이 은교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마치 이적요의 마음을 그대로 비추는 듯 하다. 순진하고 어린 그 아이가 잘못한게 무엇이냔 반응이다. 이적요와 서지우의 싸움에 죄도 없이 휘말려 든 것 아니냐는 이야기. 여자들은 스승의 사랑을 갈구하다 자멸하는 서지우를 보며 마치 자기 자식을 보듯 연민하고, 이적요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부분에서 자신의 사랑이 이어지지 못한 듯 안타까워한다.  

 

나의 주관적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영화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은교가 나쁜년이네'. 책을 읽고 나니 심증이 확증으로 굳어진다. '은교 나쁜년 맞네' 노인 이적요가 이야기하는 나이듦에 대한 사유도 볼만 했지만 한권의 책을 읽은 감상을 굳이 한 줄로 정리하라면 은교는 나쁜년, 으로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짐승으로 세상에 태어나 열일곱 해를 살았는데, 수컷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본능과 같은 것이니까. 열일곱의 여자가 짧은 바지를 입고 걸레질을 하고 노인의 잠자리로 파고 들어간다는 건 그녀가 아이처럼 순진무구하다는 게 아니라, 그녀가 순진무구함을 가장하여  성적인 긴장감으로 가득찬 주변의 공기를 한껏 즐기고 있다는 이야기라 보았다.

 

은교에게 이렇게나 박하게 구는건, 나도 언젠가 어릴적에 나이든 남자들에게서 이적요의 눈빛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 모른단 말이야? 다만 현실이 소설처럼 극적이지 않았던 관계로 내 십대는 평탄히 지나갔다. 아무일도 없는 척 그 분들을 깍듯이 대했다. 나는 짧은 바지를 입기보단 늘 단정한 교복을 입었고, 침대로 파고들기보단 늘 우수한 성적을 받는 티없는 모범생인 척 했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잘 먹혔다. 그분들이 바라는 정결한 여학생의 모습에 부합하였고, 나는 어린 존재로서 그들에게 이쁨받고 보호받는다는 심리적 만족감을 누렸다. 나의 그 속 보이는 영악함이 떠올라서 은교가 그렇게나 미운지도 모른다.

 

책이 이야기하는 나이듦의 서글픔이란 건 그래서, 굳이 이적요의 나이를 떠올려 볼 것도 없었다. 먼 70살을 상상하기 보단, 내 열일곱과 스물일곱을 대조시켜 보는 것이 더 분명하고 확실히 다가왔다. 스물일곱도 충분히 젊다 하겠지만, 순진하단 말이 욕처럼 들리는 스물일곱에 순진함을 무기로 내세웠던 내 열일곱을 떠올려 보는 것 만으로도 이적요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다는 이야기.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까지 모두 작가의 재능이고 글이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무참한 주관으로 읽어내고 누구를 가장 불쌍히 여기는지 생각해보며,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짚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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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2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12-07-23 00:27   좋아요 0 | URL
부족하고 모자란 리뷰를 채워주는 이런 멋진 댓글은 공개글로 좀 달아주세요

춤추는인생. 2012-07-2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교가 나쁜년이라는 제목을보고. 누가썼지 싶어 보니. 라일라였어요 ㅎ 라일라짱!!!!. 전 되게 불편한 영화였고 소설였어요. 누구나 마음속에. 그런마음을 품을수있지만. 그게. 어떻게든 드러내질때. 되게. 불편해요. 라일라님덕분에. 속이 시원해지네요 ㅎ

LAYLA 2012-07-23 00:29   좋아요 0 | URL
춤인생님 댓글을 보고 생각해보니 알라딘에선 보기 드문 과격한 제목이긴 하네요 하지만 저것 말고 다른 제목은 붙일 수 없단걸 춤인생님은 이해해 주시겠지요..!

글샘 2012-07-22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쉽게 욕할 수 없는... 그런 게 인생엔 있을 수 있잖을까요?
술집 여자들을 나쁜년이라고 부르기 힘든...
사고뭉치 중고생을 나쁜 것들이라고 부르기 힘든...
그럼... 뭐, 이적요는 나쁜 새끼 아니고, 서지우는 짐승같은 새끼 아닌가요?
전 작가가 나쁜 넘 같던데... 예술이라니 할 말도 없고... --;

LAYLA 2012-07-23 00:31   좋아요 0 | URL
누가 누굴 욕할 수 있겠어요? 내 세상에서 당신은 신이고 당신은 쓰레기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글샘님에겐 서지우가 제일 못된 캐릭터였군요. 그리고 작가가 가장 나쁘다는 부분은 재미있어요 ㅎㅎㅎㅎ 넘쳐나는 인터뷰를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싶네요.

마태우스 2012-07-23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정말 솔직한 리뷰군요. 역시 읽기에 재밌는-재미를 넘어 충격까지 주는...-리뷰는 솔직한 리뷰라는 생각입니다. 처음엔 은교가 뭐가 나빠,라고 읽기 시작했는데 님한테 동화되어 버렸읍니다. 짱이십니다.

LAYLA 2012-07-23 00:41   좋아요 0 | URL
마태님에게 어느 부분이 충격적이었는지 궁금해지네요.ㅎㅎ 제가 어릴적 이적요의 눈빛을 보았단 부분이라면 제가 희귀하거나 드문 케이스는 아니라 생각해요.

라주미힌 2012-07-23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제목이 재미있어요. 은교라는 이름처럼 저는 그녀를 상징으로 보고 있어요. 작가의 욕정이 좀 스며든 느낌이랄까나.. ㅎ 너무 야해서 보는 내내 도둑질하는 기분이었습니다.

LAYLA 2012-07-23 23:57   좋아요 0 | URL
작가가 열일곱으로 설정한 것은 극적 재미를 위해서일 뿐, 은교는 스물일곱도 되고 서른일곱도 된다 인터뷰 햇더라구요. 그의 말대로 상징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라주미힌님 표현에 따르자면)욕정어린 글을 보면 암만해도 상징 운운은 무리수 드립인거 같기도 하구요? ㅋㅋㅋㅋ

프레이야 2012-07-24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한 제목과 내용, 역시 라일라님.^^
은교는 충분히 그 시선을 아는 것 맞다고 저도 생각했어요. 그 나이면 충분하고도 남지요.
이적요의 포옹을 뒤로 하고 집을 나가는 척(아니 진짜 나가려고 했는지도) 하고 돌아와
서지우가 있는 지하 서재로 내려간 은교. 그 애가 벗어놓은 때묻은 컨버스화 기억 나나요?
이상한 기척에 눈을 뜬 이적요가 현관에 있는 그 더럽고 구겨진 신발을 물끄러미 한참
내려다보던 장면이요. 저는 그게 잊히지 않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