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품절


자발적이면서도 강제적인 신체 만들기. 이는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현상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제 몸을 기업의 요구에 맞게 뜯어고친다. 언뜻 자발적인 것으로 보이나, 이 '존재미학'은 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강요한 '생존미학'일 뿐이다.
...국가 주도의 경제가 민간 주도로 넘어가면서, 온르날에는 국가를 대신하여 시장이 인간의 신체를 개조하는 역할을 넘겨받았다. 요즘 신문 지면에서 '맞춤형 인재'라는 말을 종종 본다. 이 말은 주로 대학에서 기업의 요구에 맞는 인간을 생산해주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이제 인간도 양복처럼 맞춰진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산학협동만이 아니다. 기업의 요구대로 맞추어진 인재는 지식이나 관심사뿐 아니라 세계관 자체도 기업의 코드에 맞추어질 수바껭 없기 때문이다. -41쪽

삶이 예술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 예술의 재료가 신체일 때는 상당히 착잡해진다. 신체를 재료로 한 북한의 매스게임은 보는이에게 근사한 작품일지 모르나, 정작 그 스펙터클 안에 들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이다. 남한의 신체 예술은 어떨까? 시선은 권력이다. 시선의 '주체'와 시선의 '대상'은 처지가 다르다. 작품이 된 신체는 '보는 남자'에게는 미적 쾌감을 줄지 모르나, '전시된 신체'에게는 커다란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75쪽

신체의 자본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막혀 있는 곳에서 혼인은 신분 상승의 유일한 길이 된다. 직장에 들어가도 한국의 여성은 능력보다 '용모'로 평가 받는다. 게다가 일상생활에서도 남성들은 여성의 외모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평을 한다. 이런 터무니없는 무례가 버젓이 공중파를 타기도 한다. TV를 켜면 개그맨들이 방청석에 앉은 여성들의 외모를 놓고 농을 지껄인다. 이런 사회의 다이어트는 특히 처절하고 필사적일 수바께 없다. 성형수술이 한국만큼 흔한 곳도 찾아보기 힘들다.
언젠가 이 문제를 놓고 야한 여자 밝히는 마광수 교수와 tv토론을 한 적이 있다. '얼굴 예쁜 여학생이 공부도 잘하고 일도 잘한다'고 믿는 그는 '성형을 안 하는 여자는 게으른 여자'라 단언한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아예 못생긴 걸 죄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극성스런 마초 사회에서는 당연히 실력보다 미모에 투자하는 게 경제적으로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여기서 여성은 자신의 신체를 본격적으로 자본화하게 된다.
-75쪽

엄청난 비용이 드는 성형은 글자 그대로 '투자'다. 물론 상류층 여성에게는 이 투자의 비용이 큰 부담이 안 될 게다. 하지만 이들과 더불어 미모의 경쟁을 벌여야 할 서민층 여성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피하여 비용을 무리하게 낮추다 보면, 불법 시술에 따른 온갖 부작용의 흉터를 평생 몸에 낙인처럼 새기고 살아야 한다. 신문에서 흔하게 접하는 소식이지만, 사실 이건 정말 비극적인 이야기다. -76쪽

시선의 권력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이 열렸을 때, 남한 남성들은 경기보다 북에서 온 응원단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미녀 응원단에게서 남한 여성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태적 매력을 보았다.'자본주의 물을 먹지 않아 순박'하고 '성형을 하지 않은 천연미인'이라는 것이다. 응원단은 남한 사회에 '북녀 열풍'을 불러일으키면서 폐쇄적인 북한 사회에 대한 부더적 인상을 누그러 뜨리는 효과를 냈다. 공산 체제가 경기장에 미녀의 얼굴로 나타난 게 <조선일보>는 영 불편했던 모양이다.

-78쪽

왜 남자는 없이 모두 여성들만 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배우처럼 활짝 웃는 얼굴 사이로 인공기를 흔드는 모습에 도취될 수도 있겠다 싶다.'아름다운 것이 선한 것'이라고 홀리게 될 때 미인계는 적중한다. -조선일보 2002/10/01

노동자, 농민의 국가에서 기계를 돌리는 튼튼한 여성노동자나 뜨락또르 모는 씩씩한 여성 농민이 아니라, 얼굴 예쁜 예술대생들만 골라서 보냈을 때에는 물론 체제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인계'운운하면서 그걸 무슨 대단한 적화 야욕이나 되는 양 부풀리는 <조선일보>의 우스꽝스러운 태도는 북한의 체재만큼 경직되어 보인다. -78쪽

<조선일보>의 태도에 반공주의적 공격성이 있다면, 남한 관중들의 태도에는 남성주의적 공격성이 있다. 북한에서도 이 시선의 폭력이 불편했던지, 그 다음에 왰을 때에는 남한 언론에 '미녀 응원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한국 자본의 눈에 북한이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시장으로 보이듯이, 한국 남성의 눈에 북하느이 여성들은 앞으로 시각적으로 정복해야 할 무공해의 처녀지로 보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선한 것'이라는 관념은 미를 최고의 가치로 보는 유미주의의 강령이다.<조선일보>의 우려대로 과연 유미주의는 반공주의를 압도해버렸다. 유전자처럼 뿌리깊은 레드 콤플렉스도 '미'라는 가치앞에선 무력했다. 여기에는 어떤 통쾌함이 있다. 하지만 그 통쾌함 이면에는 극성스러우 반공주의조차 압도해버리는 막강한 남성주의적 시선의 권력이 있다. 바로 이것이 한국 여성의 성형 수술과 다이어트가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 더 처절하고 필사적인 이유일 것이다.-79쪽

남 보기에

루리아라는 학자가 러시아 혁명 직후 아직 구술문화 단계에 있는 촌락공동체에서 필드 워크를 했다. "당신의 성격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 물음에 한 농미능 이렇게 대답했다. "그걸 왜 저한테 묻지요 ?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는 '반성'의 습속은 구술문화엔 낯선 것이다. 다른 이는 화를 버럭 내며 말하기를, "우리는 잘 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들이 우리를 이렇게 대접해주겠어요?" 구술문화는 이렇게 평가의 기준을 다른 이들의 반응에서 찾는다.

우리가 자라면서 부모에게 늘 들었던 말이 바로 '남 보기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소리. 학교에서도 '누가 뭐라 하더라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며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에서는 삶의 목표마저 남의 눈에 맞춰지고, 사람들은 남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하든 올바로 사는 것, 혹은 누가 뭐라 하든 내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남 부럽지 않게' 사는 것, 혹은 '여봐란 듯이 '사는 것이 된다. -174쪽

이런 문화에서 윤리를 형성하는 감정은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다. 신 앞에 떳떳하지 않은 이도 사람들 앞에선 떳떳하고, 신 앞에 떳떳한 이도 사람들 앞에선 부끄러울 수 있다. 여기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이렇게 윤리가 타인의 눈에 맞춰져 형성된 사회에서는 죄도 드러나지 않는 한 떳떳하고, 죄가 아닌 것도 드러나는 한 부끄러운 것이 된다. -174쪽

극성스런 사교육 열풍의 바탕에 깔린 것도 실은 생조느이 공포감이다. 아이를 일등 만들려는 상류층의 공격적 사교육과 달리, 서민층의 사교육은 아이를 생존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게 하려는 방어적 성격을 띤다. "왜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부모가 "남들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안 시킬 수 없어서"라고 대답한다.
...공포는 판단을 마비시킨다. ...과거에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한 것이 '전쟁'의 공포였다면, 오느날 한국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시장'의 공포다. -180쪽

생산의 비물질화

사회가 정부사회로 진입하면서 노동력의 상당수는 공장에서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렇게 사무노동 종사자 수가 대폭 늘어나면, 사무직 노동자들이 과거에 누렸던 특권적 지위도 당연히 약화될수밖에 없다. 이로써 화이트 칼라의 블루칼라화가 진행된다. 반면 대다수가 몰락할 때 살아남은 소수의 농민이 농업 경영인이 되듯이 대다수의 몰락 속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산업노동자는 기계의 관리인과 같은 전문적 지위를 누릴 것이다. -224쪽

몇 년 전 경주의 천마총에 갔을 때의 일이다. 천년의 역사를 묻고 침묵하는 고분 주위를 산책하고 싶어 들어갔는데, 입구부터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10m간격으로 산책로 전체를 스피커로 도배ㅐ놨기에 가도가도 음악이 끊기지 않는다. 흘러나오는 것은 서양의 왈츠와 중국의 경음악.관광객을 위한 배려란다. 이런 발상을 낸 게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이박사 테이프를 듣고 싶어할 사람일 게다. -257쪽

"신부입장!"이라는 말과 함께 신부가 예식홀로 들어오자, 바닥에 갑자기 안개가 깔리기 시작한다. 결혼이라고 하면 그래도 인생에서 꽤 의미가 있는 행사일 텐데, 그렇게 중요한 행사를 굳이 눈 뜨고 봐주기 민망한 키치로 연출할 필요가 있을까? -264쪽

"나는 명품이 좋아요"라고 까놓고 얘기하거나, 남자가 주었다는 카드를 자랑하는 것 역시 많은 여성들이 가진 욕망의 솔직한 표현이다. 여자에게 교통카드밖에 줄 게 없는 고추장남들은 낸시가 연출하는 여성상을 아마 '된장녀'라 부를 것이다. 하지만 낸시는 된장녀의 속성과 욕망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남들이라면 극구 부정하거나 애써 감추려 하는 것을 그는 '시대정신'으로 주장해버린다. 거기에 그의 도발성이 있다.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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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7-09-0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예요 ^^ 잘지냈어요? 으흐 진중권씨 좋아하는데, 이 책 어때요? 멋진 리뷰 올려주시면, 읽어보고 저도 지를께요! ㅋㅋ

LAYLA 2007-09-04 00:44   좋아요 0 | URL
멋진 리뷰는 약속 못드리지만 좋은 책인건 보증(?)할게요 ^,^ 가시장미님 아이들 논술 가르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히히 웃기기도 하구요 (마지막 밑줄긋기 2개는 순전히 웃겨서 쓴거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춤추는인생. 2007-09-04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님 춤인생왔어요^^
저도 이책 읽었는데. 와 참 미워할수 없는 사람이구나 싶었어요 미학오디세이는 읽다 말다 읽다 말다 하지만.
올겨울까지는 꼭 독파하려구요!! 라일라님 잘 지내세요?^^

LAYLA 2007-09-04 00:46   좋아요 0 | URL
네 전 진중권씨 빠순이 끼도 약간 보이는데 이 분이라면 정색하고서 그런 맹목적인 애정은 옳지 않다고 말할거 같아요 ㅋㅋㅋㅋ^,^ 저 역시 미학 오디세이는 다 읽지 못했답니다 OTL 우리 같이 올 겨울까진 다 독파해요...호호호호 (전 잘지내고 있어요, 오늘 개강했답니다. 춤인생님은요? 요즘 뜸하셔서 궁금해요~^^)

미즈행복 2007-09-07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분 엄청 좋아하는데 -소싯적엔 한겨레 문화센터로 인사동으로 이 분 강의 들으러 다녔었지요. 2000년인가? 2001년인가에. 집은 서울이지만 그해 겨울에 청주에 가 있을 일이 있었는데 청주에서도 강의 들으러 그 요일에 고속버스 타고 인사동에 올라오곤 했었지요. 근데 이 책은 읽어보니 예전의 그 날카롭던 비판이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많이 유해진 것 같아서 아, 나이 드셨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던걸요?

LAYLA 2007-09-07 23:13   좋아요 0 | URL
와 정말 좋아하셨군요! 미즈행복님의 소싯적^^ 이 궁금해집니다. 소싯적 이야기 좀 많이 해주셔요 호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