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엄마와 동생이 도착했다. 나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내 모든 짐, 28인치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취리히의 장점을 하나 꼽으라면 공항이 시내와 아주 가깝다는 점이다. 얼마나 가까우냐면 취리히 센트럴 스테이션에서 기차를 타면 12분이면 공항에 닿는다. 너무 가까워서 공항이든 센트럴 스테이션이든 도착하면 반가운 게 아니라 얼떨떨할 지경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엄마와 동생의 여독을 생각해 우선 취리히의 호텔에서 하루를 묵을 예정이었지만 공항이 그리 가깝고 닿기에 편하다 보니 호텔이 아니라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가족들을 만난 다음엔 바로 렌터카 카운터로 가서 차를 빌렸다. 살짝 벌어진 앞니에 온 팔뚝에는 문신을 새긴 금발의 여직원이 디파짓을 걸 카드 두 개를 달라고 했다. “너희들이 빌리는 건 럭셔리 카라서 카드 하나 당 3000프랑씩 2개 카드, 총 6000프랑을 디파짓으로 걸어야 해.” 예약은 모두 남동생이 한 것이라서 나는 무슨 차를 며칠이나 빌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럭셔리한 차인지 궁금하네.” 내 말에 여직원이 웃었다. 어쨌든 디파짓을 걸어야 하는데 한국의 인터넷 은행에서 발행한 내 카드 플레이트에는 카드번호가 적혀 있지 않았다. 아마도 보안 등의 이유 때문이리라 추측하는데, 모바일 앱으로 들어가야 카드번호와 유효기간의 정보가 뜨는 식이다. 나는 내 카드 실물과 카드번호가 뜬 스마트폰 액정을 같이 내밀었지만 스위스 사람들은 그 새로운 기술을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런저런 카드를 모두 들이밀고 승인을 걸어보며 한참의 시간을 보낸 뒤에 하나의 카드에만 디파짓을 걸기로 했다. “여행하러 와서 하루종일 신용카드만 찾고 있을 순 없잖아.” 직원은 자신의 재량으로 예외를 두기로 했다고 했는데, 그 순간 떠오른 단어는 유도리였다. 스위스에서 유도리를 경험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럭셔리 카에 가입된 보험의 자기 부담금이 8000프랑이라는 사실이었다. 요즘 환율로 치면 약 1100만원인데 나는 자기부담금이 그렇게 큰 보험이 굳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차는 럭셔리 카라서 자기 부담금이 낮은 보험은 가입할 수 없어. 그리고 스위스에는 자기부담금이 없는 풀 커버리지 보험 상품이 아예 존재하지 않아.” 아 스위스란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결국 렌터카 회사에서 가진 보험 상품 중 가장 비싼 걸 추가로 가입하여 자기부담금을 2500프랑으로 낮추고 차를 수령했다. 이리저리 따지니 지불한 총 금액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 보험료였다. 럭셔리 카의 정체는 폭스바겐의 투아렉이었고 벤츠와 BMW가 길가에 깔린 나라에서 도대체 이 차를 왜 럭셔리 카라고 부르는 건지, 일반적인 보험은 가입도 할 수 없게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애초에 세상에는 이해할 필요도 없는 일이 많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4일만 조심해서 사고 내지 말고 스위스 차량보험상품의 구조나 부당함(?)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자. 혹시 유럽에서 차를 렌트하신다면 필히 스위스 밖에서 빌리시는 걸 추천합니다.
호텔에서 짐을 풀고 잠시 숨을 돌린 뒤에는 친구들이 그리 외치던 사랑의 불시착 촬영장소로 나가 보았다. 날씨가 좋고 풍경이 아름다워 가족들과 사진을 찍으니 마치 합성한 사진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풍경이 좋아도 현빈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야? 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너무도 작은 올드타운을 걸어서 돌아본 뒤에는 저녁을 먹으러 스위스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내가 인스타그램으로 팔로우하는 유명한 갤러리스트가 취리히를 방문하면서 태그한 레스토랑이라 점찍어 두었던 곳이다. 스위스 음식이나 독일 음식에 과연 ‘고급’이란게 존재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지라 그녀의 인스타그램 태그가 아니었다면 아마 절대로 찾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게 변한 세상과 변한 여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요즘은 호텔에서 자신의 주소만 알려줄 뿐 어떻게 호텔을 찾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면 몇 분이 걸린다던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무엇을 타고 어디서 내려서 어느 거리에서 좌회전을 하거나 우회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는다. 그냥 주소만 걸어두면 손님들이 알아서 스마트폰으로 찾아오니까. 마찬가지로, 요즘의 여행자들은 가이드북을 보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고 선망하는 누군가의 여행을 인터넷으로 구경하고 그들의 경로에서 마음에 드는 것과 부러운 것을 스크랩하듯 조합하여 자신의 여행을 만든다. 지난 시대의 여행이 가이드북 속을 돌아다니는 여행이었다면 요즘의 여행은 셀레브리티들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이어붙여 조금씩은 다르지만 결국 큰 그림은 비슷한 대중적인 여행을 경험해보는 것에 가깝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내가 동경하던 뉴욕의 어느 갤러리스트를 흉내내어 그 음식점을 찾았다.
스위스에서 고급 음식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에어컨이 있다는 뜻입니다. 스위스는 웬만한 곳에는 에어컨이 없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이 스위스의 기후에 맞춘 나름의 ‘친환경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작 며칠을 지내면서 알게 된 당연한 사실은 ‘좋은 곳’에는 에어컨이 있다는 것이다. 고급 음식점엔 에어컨이 있습니다. 미술관에도 에어컨이 있지요. (미술관에 고급과 저급이 있는건 아니지만 국가적 자부심이 걸린 곳이니 고급으로 칩시다) 그리고 기차를 타도 1등석은 에어컨을 틀어주고 2등석은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한국인들이 유럽을 무척 부러워한다지만 한국 사회 곳곳엔 유럽보다 더한 사회주의적 면모가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KTX 특석만 에어컨을 틀어주고 일반석은 찜통으로 놔둔다는 건 정말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다. 여하튼, 우리는 늦은 오후의 열기에 지쳐 그 고급 음식점에 도착했고 우선 바로 가서 음료를 주문했다. 새하얀 정장을 입은 웨이터가 콜라와 칵테일을 서빙했다. 말로만 듣던 만원이 넘는 콜라를 부어주는 손길이 무척 화려했다.
요즘의 스위스는 해가 10시가 되어야 지기 때문에 레스토랑은 7시쯤부터 본격적으로 손님이 들어온다. 우리는 일부러 조용히 식사를 하고 싶어 조금 일찍 찾아갔기 때문에 손님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우리 옆자리에는 미국인 관광객 서너명이 둘러 앉아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무척 유쾌했고 시종일관 밝은 웃음을 터트렸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사이즈의 병에 담긴 콜라를 보고 세상에 이렇게 작은 콜라도 있냐며 어이없음반 짜증반을 코멘트 했던 엄마는 그들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저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인생은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나는 학생 때 이후로 저렇게 웃은 적이 없는 거 같다.” 아마 미국인들에게도 인생의 고난과 슬픔과 억울함 그런 것들이 있겠지. 누구의 집에나 더러운 빨래가 있다는 말을 내가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서 배웠으니.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어차피 저 사람들은 우리 말 못알아 들으니까 우리도 행복한 척 하자.” 그러고 양 팔을 벌려 의자에 크게 기댄 다음 깔깔깔 웃었다.
그 음식점에 대해 말하자면, 가장 만족스러웠던 건 얼음을 달라고 했을 때 은식기에 담아 서빙해주었던 것. 음식은 스위스와 어울리는 아주 자연스럽고 건강한 맛이었다. 나는 스위스 전통음식으로 가장 유명한 송아지 고기에 버섯크림 소스를 붓고 사이드로는 감자를 썰어 바삭하게 구워낸 음식을 먹었는데, 그냥 상상이 되는 맛이었고 사실 이마트에서 3000원이나 4000원에 파는 레토르트 식품들에 비해 1.3배 이상으로 더 맛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가 사는 건 음식 그 자체가 아니라 시원하고 쾌적한 공기, 테이블 위의 생화와 서버의 티 없이 깔끔한 하얀 유니폼과 내 무릎위에 펼쳐진 빳빳한 하얀 린넨 냅킨이 손가락 끝을 스치는 감촉 등 모든 총체적인 것의 합이니 그 곳을 찾은 것이 후회스럽진 않았다. 다만, 그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스위스 대표 음식을 조금이라도 더 고급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전체 포션을 한 번에 서빙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은식기에 담아와 절반만 먼저 서빙하고 내가 요청하면 나머지 포션을 더 갖다주는 것이 우스웠다. 서버는 그것에 ‘전통적’인 스위스 방식이라고 했지만 굳이...? 한그릇 음식을 두 번에 나눠서요...? 먼저 서빙된 절반만 먹어도 배가 불러서 두 번째 포션은 요청하지도 않았다. 손님들은 대부분 미국인들이었고 7시가 지나자 미국식 영어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인스타그램으로 구경하였던 그 갤러리스트도 그런 영어로 이 가게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그녀는 뉴요커니까.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치자 엄마와 동생이 시차로 인한 급격한 피곤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나도 괜히 피곤함에 전염이 된 듯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영수증에 찍힌 금액은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은 금액이었는데 인상적이었던 건 탭워터에도 4프랑을 차지한 것이었다. 원래 고급 레스토랑은 탭 워터도 차징을 하나요? 진짜 몰라서 물어봐요.
음식점을 나온 우리는 슈퍼마켓으로 가서 스위스산 화이트 와인을 한 병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스위스산 와인도 있답니다. 한국에선 마실 수가 없으니 스위스에 있는 동안은 마셔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