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의 생일이 지나갔다. 올 해는 가만히 있으면 내 생일을 축하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친한 친구들에게 내 생일에 만나자고 먼저 요청을 했다. 내 생일도 내가 알아서 챙기고 내가 알아서 즐겁게 지내야 한다. 벌써 든 나이를 생각하면 징그럽지만 이 정도 지혜는 득한 세월이었다.
사회생활을 할 적엔 너르고 얕은 관계들로부터 습자지 같은 축하를 받기도 했었다. 그런 축하라 해서 굳이 의미가 없다고 냉소한 적은 없다. 생일이란건 정말 신기한 것으로 모든 것에는 댓가가 있고 그러니 우리 서로 주고받지 말고 적정한 선을 지킵시다,란 암묵의 룰로서 기능하는 관계 사이에라도 축하인사를 받으면 순수히 기쁜 것이다. 결혼이나 출산에 대한 축하는 안 받아봐서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기쁠거 같지는 않다. 어쨌든 최근 그런 관계는 거의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올해는 좁고 깊은 인간관계의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고 그들의 축하메시지에 우리들의 관계의 짙음이랄까 깊음이랄까. 오랜 기간 공들여 아끼고 키워와서 이제는 크고 무성한 나무가 된 것 같은 우리들의 관계가 그대로 담겨 있어서 무척 감격스러웠다. 기나긴 정성스런 편지는 당연히 좋았고 또 의외로 좋았던 것이 카피라이터 친구의 축하카드. '카드 100자로는 모자란 내 마움' 마움이란 단어를 쓴 것도 좋고 한 붓에 쓴 듯 한 문장이 마치 하이쿠 같아서 그냥 너무너무 좋았다.
생일날에는 일전에 한 번 들러본 음식점을 내가 미리 예약했고, 마실 와인도 직접 골라서 가져갔다. 바쁜 시간을 내어 친구들이 나오는 것이니 모든 것이 근사했으면 했다. 음식은 정말 맛이 있었고 와인도 반응이 좋았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의 대화도 즐거웠다. 그리고 친구들은 선물로 샤넬 코스메틱의 박스를 내밀었다. "니가 니 샤넬은 한 번도 사본적 없다고 해서." 지난 달에 퇴사하는 직원의 선물을 사러 백화점 샤넬 매장에 친구와 함께 갔던 적이 있었다. 스치는 말로, 내 돈으로 샤넬 사서 남 주기만 했지 내 껀 한 번도 사본적이 없다 했던거 같은데 친구가 그것이 맴이 애렸던지(?) 샤넬 제품을 여럿 사서 선물로 준 것이었다. 나는 정말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정말로 가끔은 내 삶을 동정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뭐든지 잘하고 뭐든지 어쨌든 해내며 사는 삶이 너무 힘드니까. 그렇다고 아무나의 싸구려 동정이 필요한건 아니고, 나에게 샤넬을 주면서, 한 번도 내 돈으로 나는 챙겨본적이 없다는 그 맥락을 살펴 나를 동정해주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워낙 예민해서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또 에너지가 소진되는 느낌인 나는 향이 있는 제품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바디로션의 향이 어떤 향인지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이런 평이 나왔다. '이 향을 바르면 하얀 아기고양이를 안고 있는 가련한 여인이 된 것 같아요. 정말 샤넬스러운 향.' 가련한 여인이 된 것 같은 향, 샤넬스러운 향...그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다음 날 바로 샤워를 하고 발라봤는데 놀랍게도 나는 그 향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에서 부릴 수 있는 사치의 목록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은 법이다.
생일 이후로 일주일 정도, 원래의 내가 아닌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마감할 일이 있기도 했고 생일선물로 날아온 택배가 쌓여서 집 안과 밖에 번잡스러웠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식욕이 돌아 계속 음식을 먹고 술도 적지 않게 마셨다. 늙고 못생긴 남자와 섹스하는 꿈도 꿔서 다음날 아침 눈을 뜨며 충격에 사로잡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젊고 잘생긴 남자가 말했다. "자기 전엔 잘생긴 남자를 생각해." 기쁘기도 했지만 왠지 붕 뜬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생일주간이었다. 가련한 여인이 된 것 같은 향... 가련한 여인이란 19세기 말 러시아에나 존재했던 것이라 생각하기에 21세기 대한민국의 가련한 여인이란 어떤 것일까. 속이 열불 터져서 무조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고 차를 타면 4세대 아이돌의 존나 쎈 노래만 최고 볼륨으로 듣는 내가 가련한 여인일리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생일을 흘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