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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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성”을 완독 했다.

독후느낌을 쓰기전에 먼저 “아니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하는 얘기로 시작하겠다.
말하자면 필자의 꿈은 “느긋이 글자나 좀 끄적이는 한량”이 되는것인데 최근에 취직을 해버렸다.(가뭄에 콩나듯 책을 읽게 되었다는 이야기다.)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정보를 강제주입하는 이유는 “성”의 주인공 K도 성으로 새롭게 파견된 측량사로 왠지 필자와 처지가 비슷해서 여느때보다 참을수 없이 몰입을 해버렸다는것이다.낯선 환경에 홀로 내던져진 K나 필자나...(이부분에서 눈물 찍고).그래서 예전에도 객관적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더더욱 객관적이지 않은 감상을 써보겠다.

K는 성의 부름을 받고 마을에 측량사로 취임하기 위해 먼길을 걸어 늦은시간에 마을에 도착하는데,호텔과 마을사람들의 심한 경계(와 호기심)를 받게 된다.게다가 성에서 왔다는 (말단)집사와 다투기도하고 (K가 온다는것을 보고받지 못했다는것이다)나중에는 그럭저럭 K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K는 여전히 마을사람들에겐 이방인이며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존재였다.또한 마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K의 입장을 이해하지못하고 (호텔여주인은 K가 어떻게 그런 명확한것을 모르는지 알수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K를 비난하고 무시한다.처음엔 K는 도통 마을의 분위기를 종잡을수 없어 몸부림치며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지만(성의 관리의 애인이라 자칭하는 호텔직원-프리다를 손에 넣는다) 점차 마을의 “규칙”들을 알아가면서 무기력해진다.자신이 과연 벗어날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에 점점 지쳐가는것이다.처음에 직접 성으로 걸어가려 시도 했던데로부터 관리가 호텔에서 나올때 그와 얘기를 하기위해서 마차 옆에서 죙일 기다리다가 나중에는 다만 편지심부름꾼,성과 연줄이 있다고 일컫는 자들에게나 매달렸다.

이야기의 전개로 보면,“소송”이나 “성”이나 굉장히 닮아 있다.부당하다 생각되는것들에 대한 분개로부터 지쳐 나가 떨어지는 과정.그래도 “소송”과 “성”이 다르다고 생각되는것은,“성”의 K는 점점 마을사람들을 자신도 모르게 닮아가는 반면 “소송”의 요제프K는 자기의 입장을 굽히지 않아 부러졌다는것이다.(물론 “성”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영원히 카프카 혼자만 알게됐지만.)그래서 어떤의미로는 요제프K는 이상적인 캐릭터이고 K는 현실적인 캐릭터이다.

이야기중 종종 K의 행동에 대해 호텔 여주인의 호된 비난이나 두사람의 치열한 공방전을 볼수있는데.그 주요원인은 항상 여주인이 K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데서 시작했다.예를 들자면 프리다를 손에 넣은일,성에 가려고 하는일,관리를 만나려고 하는일,만나려고 마차에서 기다린일,또한 관리의 수석비서의 부름에 그를 만나 심문을 받고 신속히(복도에 좀 남아있었다)사라지지 않은일...그외에도 K가 여주인의 말에 토를 달아서 더 화를 돋운일도 있겠다.읽는 내내 필자는 여주인의 분노를 이해할수 없었는데 하도 얘기를 빙빙돌려서 강력하게 주장하는바람에 내가 잘못되었는지 의심하게 되는지경에 이르렀다.대충 여주인이 성과 성에서 일하는 관리들을 얼마나 존중하고 극진히 대하는지 알겠고 그녀가 말하려는 느낌적인 느낌쓰~는 알듯하나 모든것이 왜 무조건적인 비난이 되어서 K한테 쏟아지는지를 이해하는건 힘들었다.그래서 필자는 K보다 더 갑갑해졌으며 여태껏 살아오면서 느꼇던 비슷한 감정들의 과거를 떠올리게 되었으며 더욱이 어린시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비오는날 흙탕물에 참방참방,물가에서 놀다가 옷을 입은채 물에 들어간것 등등)에 부모님이 굉장히 화를 내셔서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던 먼~옛날의 일까지 떠올라버렸다.(그런 의미에서 카프카는 굉장한 작가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K의 마인드는 점점 여주인을 닮아간다.단순 필자의 착각일수도 있지만 후반쯤에 K에게 자신의 안타까운 처지를 호소하는자들에게 (심부름꾼의 누나,호텔의 다른 여직원)거의 호텔 여주인스러운 말을 한다.물론 K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기때문에 부드럽고 우회적으로,또한 회유적인 말까지 추가하지만 주요의미는 “니들은 부정적인 생각만하고 남탓만하는것이여,사실은 그렇지 않아.”라는것이다.뭐가 같으냐고?K는 자신이 측량사로서 마을에 왔는데 아무것도 배정된것이 없음에 성으로 가려고하며 자신의 일을 담당하는 관리만 찾으면 다 해결이 될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보고 호텔 여주인이 “너는 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못을 저지르고 미안해 하지도 않는 뻔뻔한 인간이구나.”라고 말한다.하여 읽다가 데자뷰를 느꼈던것이다.

데자뷰는 마지막쯤에 또 한번 나타난다.새로운 등장인물이 갑자기 K에게 찾아와 그에게 일자리와 숙식을 제공하겠다고 그를 데려가려 하는데.그때 K는 그자에게 “나를 통해서 성과 연줄이 닿으려고 그러냐?”고 묻는다.그리고 그자는 그게 아니라면 왜 K를 데려가겠냐는 말을 한다.앞서 언급했던 K와 호텔직원-프리다의 관계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야기는 거의 이쯤에서 끊어지는데 아쉽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다만 K를 찾아온 남자의 어머니가 K가 집에 들어서자 했던말이 궁금한데.그것은 전적으로 이야기가“그녀가 한말은.”이라고 끝나버렸기 때문이다.평생 처음으로 “To be continue...”보다 더 잔혹한 상황을 맞이한격이다.

그래서 “성”은 어땠냐고?
“성”은 현재에도 적용이 되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쓸데없는 감상:
“변신·시골의사”로 카프카를 접하고 “소송”으로 조금 익숙해지고 “꿈”으로 멘붕하고 드디어 “성”은 약간의 면역체를 갖고 읽었는데,와중에 독특했던 체험을 슬쩍 얘기해보자면,읽는중에 정신이 혼미해져버린 순간이 있었는데,그때 뭔가 책에서 얘기한 느낌을 알것같은 기분이 잠깐 스쳐지나갔다는 것이다.그 기분이 느껴지는 동시에 또 다시 혼란속으로 빠져버리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됐다.(그러니까 카프카가 이렇게 위험합니다.여러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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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05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에 공감합니다. 카프카의 장편소설은 다시 읽고 싶지 않습니다. ^^
 
관객모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6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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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니게임˝이라는 영화가 있다.(1997/2007 두가지 버전이있지만 모두 동일 감독이 찍은거라 어느쪽을 보든 크게 다르지 않을것이다.)휴가를 간 가족이 별장에서 침입자한테 묶여 괴롭힘당하면서 죽음을 예고받는다.줄거리는 식상 한데 웃기는것이 침입자들이 관객과 소통을 한다는것이다.심지어 가족에게 폭력을 가하면서 관객한테 보기 거북하면 리모콘으로 빨리감기를 하라고 한다.영화를 보는내내 불편하고 불쾌하다.대체 이런 영화를 왜 찍었는지 씩씩- 거리며 영화관련 글들을 검색해보니 ˝관객에게 불쾌감을 주는게 감독의 의도˝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그때의 기분이란 명치를 쎄게 한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관객모독이라는 책을 처음 소개받았을때 바로 퍼니게임이 떠올랐다.그땐 아직 퍼니게임을 ˝용서˝하지 않았던때라 `어쭈구리,이것(?)들이 관객을 호구로 아나,내가 두번은 당할소냐...`하는 마음으로 구매를 했다(그러니까 내가 호구가 맞는것 같다).

연극을 본적도 없고 희곡은 중,고딩때 수업에서 접했던 ˝베니스의 상인˝외 기타등등과 ˝파우스트(1)˝밖에 없었지만 우선 관객모독은 희극이지만 희극의 맥락으로 쓰여진것은 아니라는걸 알수있었다.무대위의 캐릭터는 캐릭터라고 하기보다는 연설자같았고 무대아래의 관객들이 더 캐릭터 같았다.말하자면 1)관객이 개입 되어야만 완성되는 연극. 2)연극은 현실에서 오기 때문에 현실(관객의 반응)만큼 생생한 연극은 없다는것 3)내(작가)가 틀을 깨주겠다! 4)관객모독이라서 관객모독을 했을뿐 이라는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회오리쳤다.

심지어 책속의 연기자는 순환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라고 쓰고 연설이라고 읽는다)를 계속 반복해서 주입했다.˝이 곳에선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습니다.이 곳에선 아무것도 다 발생합니다.이 곳에선 여러분이 기대하는것은 일어나지 않습니다.....˝같은 얘기를 말이다(쓰고 보니 세뇌과정같다).그러다가 관객한데 욕도하고 어르고 달래기도하고 물도 뿌리고...읽다보니 작가(페트 한트케)가 감독보다 더 악취미라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만약 둘이 서로 알고지내는 사이 였다면 세기적인 역작이 탄생할수도 있었을것같기도하고...

여하튼 얇고 반복되는 내용의 책이다 보니 휘리릭-하고 읽어버리고 ˝또 당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감독한테 농락당하고 작가한테 모독 당하고...근데 중요한건 기분 나쁘진 않았다는것이다.소통을 했다는 생각도 들거니와 잠시나마 그 상황(책의 내용)에 속해있었다는 착각도 들었다.요즘 한창 떠오르는 가상현실체험이라는 기술보다 이런 문학적으로 전해주는 불친절하고 거친 간접체험이 더 기발하고 정감넘치는 기분을 줬다.더불어 책을 읽고나서 나 혼자 영화를 되새김질하며 극적으로(?) 감독과 화해(?)도 했다는것이다.또한 문학의 무한 가능성을 다시한번 확인하며 즐거운 틀을 깨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도 했다.

그리고 행복한 호구(?)가 되었다는 후문이다...(주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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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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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본 미셸의 작품이 ˝소립자˝였다.(그것도 불과 몇달 전에)이렇게 선정적이고 적나라한 묘사로 삶의 방황을 이끌어가는 작품은 처음이다.그럼에도 소립자는 선명하고 뚜렷하게 다가왔다.
인상적인 작가를 찾았을때 의례그러하듯이 미셸의 다른 작품도 찾아본다.˝복종˝의 표지가 끌린다.그래서 선택했다.

책 줄거리엔 ˝이슬람,유럽˝이라는 단어가 난무한다.어림짐작으로 요즘 다에시의 테러나 난민의 유입으로 이슬람과 유럽의 관계를 다시 훑는것인갑다 라고 생각했다.아니나 다를까 변두리 지역에서의 폭동,이슬람정당의 정권 탈취...(이 대목에서 이슬람과 유럽에 대한 이해관계 정보가 아예 없는 필자는 읽는게 몹시 힘들었다.)대체적으로 그런 이야기들로 시작한다.주인공은 대학 교수다.위스망스(책을 통해 처음 알게된 작가다)를 연구해왔고 연구의 원인과 목적은 그를 이해하기 위함과 동시에 그를 통해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것 같다.그러니까 책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위스망스 얘기를 한다.표지에 왜 히잡을 쓴 모습이 그려졌는지 망각할 정도였다.그러니까 이쯤되면 책의 홍보문구를 원망어린 눈으로 노려보게된다(물론 표지도).

이제 감정적인것은 살짝 거두어 들이고 조리있게 설명을 시도해보겠다.우선 필자는 무슬림과 이슬람의 차이를 모른다(구태여 알고 싶지도 않다).하여 책에서 무슬림과 이슬람정당은 어떤부분에선 굉장히 대립관계이며 이슬람은 오히려 포용하는 정신을 지닌다는 뜻을 고대로 옮겨쓰겠다.즉 책은 이슬람을 배척하지 않는 설정을 적용했다(˝배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것은 요즘 다에시때문에 격화된 이슬람전체에대한 증오현상을 암시하고싶어서이다).또한 유럽전체의 침체,무기력함,삶의 본질(?)에 대한 회의감에 빗대어 유럽 기존의 정당들의 쇠퇴를 당연시하면서 이슬람정당의 집권에 힘을 실어준다.이렇게 책의 사회분위기가 완성된다.

이런 배경 하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제 풀어보겠다.주인공은 (미셸의 일관된 설정으로) 성적 활동을 매우 무감하게 진행한다.이런저런 시도를 해본끝에 자신과 맞는 여자를 찾게된다(같은 학교 교수).그럼에도 그 여자에대해 호감은 있을뿐 사랑하지 않는다.(여기까지 읽다가 잠시 책을 내려놓고 생각하게 된다.대체 작가는 어떤 충격이나 상처를 받았기에 ˝성˝에 이토록 집착하며 ˝성˝에 집착하는것은 그나마 그것이 고통스럽지는 않다는 결론에 이를수 있을까...)무튼 소립자에서 부터 이어져온 미셸의 ˝성˝집착은 복종에서도 여전했다(그래도 소립자보다는 많이 얌전해 졌다.다시 책을 집어든다).주인공은 여자들이 교육을 받으면 생각이 많아지며 그럴경우 온전히 남편에 몰두할수 없어서 인류의 번식,발전에 영향준다고 생각한다(...).음...므튼 그런 이유로 결혼을 안정적이고 편안한것 보다는 권태와 불안정의 요소로 여기게 되고 고독과 외로움에 허덕이면서도 그 여자와는 어영부영 끝내고말았던것이다.주인공은 쭉 혼자였다.친구를 만나면서도 혼자였고 파티에서도 혼자였고 그 여자와 있을때도 혼자였다.그래서 주인공은 지긋한 고독을 벗어나고자 위스망스를 파고든것같았다.위스망스는 가정적인 여자를 삶에 필요한 요소로 꼽았는데 이것은 주인공의 생각과 매우 비슷했다.헌데 말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신자가 됐다는것이다.우리의 주인공은 개종전의 위스망스를 찬양할뿐 개종후에는 영 문학적으로 전보다 못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다가 이슬람정당의 집권이 기정사실로 되고 유럽은 전에없던 큰 변화가생긴다.이슬람교가 아닌 사람은 대학교교수로부터 퇴직해야 되며 여자교수도 더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주인공은 퇴직후 여행을 떠나면서 위스망스가 말년에 머물던 성당으로 간다.이제 주인공은 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여행후 돌아와 초대된 파티에 참가하면서 주인공은 교수인 동료가 부인을 분배받고 (전보다)멀끔히 살아가는것을 보게 된다.기분이 오묘했을것이다.아마도 저런것이 진정한 구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을것이다.무시무시한 고통과 고독의 삶에서 구원해주는것.아마 그것을 생각했을것이다.하여 주인공은 이슬람으로 개종한다.이렇게 위스망스와 주인공의 평행이론이 끝나게된다.

이제 제목을 다시 본다.복종.
여자의 복종?
이슬람으로의 복종?
고독에대한 복종?
변화에대한 복종?
역사의 흐름에 대한 복종?

소립자보다는 시시하고 재미없는 책임에 틀림없지만 주인공의 무기력함이 마침 요즘 시들시들해지는 필자의 상태와 비슷하여 생각할꺼리를 짜낼수있었다.-끝-

길고 지루한 독서평보시랴 수고한 그대에게 (사실상 마지막 구절에 감정을 제일 많이 담았다)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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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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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본지는 좀 됐지만 책을 모티브로 제작한 영화는 며칠전에 봤다.

책을 읽을때 상상했던 풍경과 영화는 매우 다르다.(책을 읽으면서 상상했 모습과 영화가 만들어낸 모습을 비교하는 재미로 영화도 가끔 찾아본다.)그도 그럴것이 책은 아프리카대륙에 대한 약탈을 배경으로 하는 반면 영화는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한다.말하자면 책은 지극히도 원초적인 땅에서 일어난 일인데 영화는 그래도 그나마 근대적인 땅에서 일어난일이라고 할수있다.그래서 책에서 묘사한 ˝커츠와 야만인˝이라는 설정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대신 영화에서는 뭔가 뜬금없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한마디로 필자는 원작의 설정을 더 편애한다.고로 지극히 주관적인 결론으로:˝영화는 순수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려는 원작의 의도와는 차이가 있다.˝가 되겠다.
하여 이 책을 논하면서 영화는 접어두는걸로 하겠다.

암흑의 핵심은 고요하고 지루하고 삭막한,감정이 결여된 소설이다.행복도 슬픔도 없이 다만 주인공의 공허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주인공이 먼길떠나 도착한 아프리카땅에서 이루어지는일은 ˝야만인˝들에 대한 착취뿐이었다.유럽땅에서 권태를 느껴 아프리카로 흘러들어온 주인공에겐 1차적으로 일종의 희망을 상실하는 부분이기도 한것같다.물론 주인공 자신도 큰 기대를 했다거나 명예와 부를 얻으려 했다거나하는 ˝상투적인˝목적이나 그외 ˝더 고상한˝ 그어떤 목적도 없었지만,그래도 혹여나 무엇이든지 명확해질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졌었는데,대체적이로 실망적이였을것이다.그러다가 주인공이 커츠라는 사람에대한 소문을 접하면서 어찌어찌 데려오라는 임무까지 받고 그에 대해 알면알수록 어쩌면 이미 자신이 원하는바를 얻은 사람일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부풀게 되고 그를 만나러가는 멀고도 긴 여정을 ˝교화된˝ 현지인과 몇몇 동료들과 함께 떠나게 된다.

주인공은 아마 커츠라는 본적도 없는 인물의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 동질감 같은것이나 자신도 추구 했었던것들을 느꼈을것이다.인간이란 원체 혼자인지라(필자 혼자만의 생각이다)살아가는 동안은 고립되고 외롭다.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미 구축된 인간관계속에서도 온전히 스스로에게만 속하는 자아가 있으며 그런 스스로의 자아는 생활속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하여 얼핏 중요하지 않은것같이 느껴지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본인에게는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것은 없을것이다.왜냐면 필자는 그것이 한 인간의 본질이나 성질을 결정하는 요소같은것이라 생각하기때문이다.그래서 인간은 그 ˝중요한˝자아의 외로움을 채우려 평생 안간힘을 쓰게 되는데 그런 행위들이 대체적으로 결혼을 한다거나 취미를 만든다거나 어떤것의 의미를 찾아간다거나...므튼 온전히 몰두할수 있는 어떤것을 찾아가게되는것으로 표현된다.아마 필자의 생각으로는 주인공은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 했던것같다.현대화에 물들어가는 거짓으로 가려진 본질이 아닌,순수한 인간자체의 본질.그리고 커츠도 그것을 찾는다거나 이미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주인공이 그렇게나 열성적으로 길을 떠났을것이다.그렇게 열대림 깊이 더 깊이 들어간곳엔 다만 원주민들의 ˝신˝이 되어버린 커츠가 말라비틀어진채 죽어가고 있었을뿐이었다.원주민들은 커츠를 누구보다도 믿으면서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다.말하자면 커츠는 삶의 탐구자인 동시에 폭군이 되었던것이다.본질에 대한 갈망과 절대적인 권력,그 사이에서 미쳐버렸다.그래서 우리의 주인공은 어떤 반응이었냐고?글쎄...커츠의 거점으로 가까워 지면 질수록 조급해지고 그외의 모든일에 무심해지던 주인공은 커츠를 만나고 나서 무서우리만치 더욱더 무심해졌다.주인공은 여느때보다 차분했다.실망도 아니고 희망도 아닌.....필자는 그것이 아마도 암흑이었을꺼라 추측한다.여러가지 의미로:희망의 상실,인간본질에 대한 깨달음,혹은 커츠속에 침식된 어둠...어떤것인지는 알수가 없다.그러다가 얼마 못가 커츠는 숨을 거둔다.어둠으로 가득찬 눈을 크게 뜨고 ˝무서워라...˝를 되뇌이다 언제 숨을거뒀는지 모르게 죽어있었다.

책속의 세계는 누가 더 암흑인지 모를정도로 어둠으로 가득 차있다.아프리카땅의 침략자들인지,원주민들의 신이 된 미치광이인지,그 모든것을 무심히 바라보는 ˝싸이코패스˝인지.
아니면...이 책을 읽으면서 평가와 분류로 자신을 분리시키는 필자인지.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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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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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추천을 받고 보게 되었다.
˝다 읽고 나면 `아...소설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돼.˝라는 서평(?)을 듣고 구매해서 책장에 삭혀 두다 이제야 정독을 완료했다.

책장을 넘겨 목차를 보면 네명의 서로 다른 신분의 인물들로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하려는게 보인다.

작가,편집자,비평가,독자.

책과 출판과 출판업계와 연관되는 사람들이다.

굳이 너저분하게 나열하는것은 필자에게 ˝책˝이라는 명사는 ˝순수문학˝이라는 이미지를 안기는 반면 ˝출판˝이라는 명사는 ˝자본경제시장˝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기때문이다.(그래서 책을 넘기면서 예술과 자본사이의 딜레마에 대해 얘기를 하려나 하는 기대를 했다.)

실제로 책의 인물들을 보면
˝시장수요에 부합되는 베스트셀러 작가˝,
˝출판업계에서 인정받는 대단한 편집자˝,
˝소설보다는 문학비평서가 잘 팔리는 비평가˝,
˝잘 읽히는 책을 선호하는 독자˝
로 정의를 내릴수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 2장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책이 출판되기까지의 우예곡절이 다루어져 있어서 ˝나도 글쓰기 참 좋아하는데요,제가 한번...˝하는 생각을 가졌던 필자에게 ˝책이란건 번뜩이는 소재만 갖고 쓸수있는것이 아니고 굉장한 열의와 끈기와 수많은 수정을 거쳐 탄생시키는 제품이지요.˝라고 면박을 주는것 같은 기분이 들게했다.실제 편집자이야기중에 나오는 ˝똑똑하고 열정넘치고 강인하지만 게으르고 자기 변명만 늘어놓는˝ 편집자 남자친구(작가가 되려한다)에 대한 묘사에서 필자는 굉장히 많이 찔리고 안절부절 못했었다.

그러다가 전개는 3장에서 새로운 길로 접어든다.틀에 박히고 아무의미도 없는 시장형 작품을 혐오하고 진정한 문학과 예술을 하려하는 비평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비평가는 옛 소설가들에 대한 재평가를 시작하면서 비평가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하게되지만 자신의 열의를 다해 써낸 소설이 참혹히 매도를 당하게 된다.독자들이 그의 책을 이해할수 없기 때문이다.현실에서의 타격을 받은 비평가는 자신이 작가가 될수 없음을 깨닫는다.그러면서 은연중에 이웃으로 지내는 ˝진부한 베스트셀러˝작가를 시기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소설이라는 작품이 필자가 은연중에 기대했던 ˝예술성이냐 아니면 쉽게 읽히는 가독성이냐˝하는 논쟁으로 전면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갈줄 알았지만 잔뜩 기대에 부푼 필자를 실망하게 한것은 ˝예술을 하는 괴짜˝가 되어야하는 비평가가 ˝말 안 듣던 탕아가 따뜻한 이웃사촌들에게 감화되어 뉘우치˝는 사람으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순간 흥이 픽- 죽어버렸다.

허나 흥이란건 항상 잇달아 죽게 되는법(?)이다.독자의 이야기를 펼치는 장에서 갑자기 주목받는 신예 천재작가가 살해당하는 전개가 나타나더니 그 사건에 충격을 받은 ˝진부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각성을 하는것이다.˝난 이제 케케묵은 옛 이야기를 쓰지 않고 현재 상황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쓸꺼야.˝하면서 새로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은 젊은 작가들의 신선한 글들에 높은 평가를 하지만 그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문장들이 깊지 않기에 그 두가지를 다 겸비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끝이 났다.

한동안 눈만 껌뻑거리다가 책을 덮고
˝아,제임스 미치너가 소설은 상업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춰야한다는 정의를 내린것인가?˝...
˝아,제임스 미치너가 비평가라는 캐릭터를 개인적으로 싫어하는가?˝...
˝아,제임스 미치너가 3,4장을 쓰면서 귀찮았나?˝...
˝아,제임스 미치너가 소설은 이런것이라는것을 돌려 돌려 풍자하는것인가?˝...
˝아,제임스 미치너가...˝...
라는 오만가지 추측만 난무했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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