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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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고전부 시리즈 중 가장 중요한 여섯 번째 시리즈.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 어감이 좋아서 곱씹게 된다.
<멀리 돌아가는 히나>가 번외편이라면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는 완벽한 본편이다.

자신과는 전혀 관계 없는 학생회장 선거에서 표가 전교생 수보다 많이 나온 일을 파헤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역시 크게 관계 없는 일임에도 정의를 내세우는 사토시의 성격도 재차 드러나고 호타로는 말할 것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 답을 내놓는다.
그리고 드디어 거울 이야기가 실렸다.
이바라를 포함해 호타로가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들에게 미움받은 계기인 중학교 졸업 기념 작품인 대형 거울에 관한 이야기다.
미술로 상도 몇 번 탄 다카스 아미가 디자인한 대형 거울틀을 각 반마다 분배해서 조별로 각자 조각을 해와서 다 같이 거울을 완성한다는 의미의 졸업 작품이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호타로는 혼자서 조각 하나를 맡아서 수정도 할 수 없게 가장 늦게 제출했고 심지어 디자인을 무시한 채 대충 조각하는 바람에 원성을 샀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디자인을 담당한 아미가 전체 조각이 맞춰지고 난 모습을 보고 하얗게 질려버렸고 호타로의 조각을 가리키며 눈물을 터트렸던 것이었다.
그 탓에 심지어 같은 조였던 친구들 마저 호타로를 질책했고 결국 졸업한 후 지금까지도 호타로는 모두에게 나쁜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1년 간 호타로를 보며 편견을 버리게 된 이바라가 거울의 비밀을 파헤치게 되고 모든 내막을 알게 되는 이야기다.
중학생 때 영어 선생님이 수업 중 헬기가 좋다고 했던 일, 호타로의 긴 휴일, 호타로가 중학생 때 쓴 달려라 메로스 독후감과 이바라의 만화연구회 동아리에서 일어난 일이 이어지고 마지막에 치탄다의 이야기인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가 나오게 된다.

얼마 전 소시민 시리즈 가을 이야기를 읽으며 고전부가 짐짓 밋밋하다고 표현했었다.
그 말을 정정해야 한 만큼 확실히 뚜렷하고 강한 이야기들이 있는 책이다.
거울 이야기는 너무 좋아서 일찍이 실린 미스테리아 8호를 구입할 정도였다.
그런 거울 이야기와 함께 마치 테마처럼 과거에 살짝 기댄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영어 선생님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건지 본 기억이 난다.
앞서 학교 축제에서 발생해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만화 연구회 내부의 분열을 두고 이바라의 선택은 묘하게도 평온함을 준다.
주로 이바라가 회자일 때 해당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따금 보여지는 동요나 다급함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안도감으로 바뀌는 순간, 역시 고전부다 싶다.
한편 치탄다의 이야기는 과연 ‘멀리 돌아가는 히나’의 속편이라 할 만큼 정확히 이어진다.
꾸준히 설명되었던 치탄다 가의 위압감과 치탄다가 짊어지고 온 짐, 그리고 합창대회 날 갑자기 사라진 치탄다, 닫히지 않고 끝나버려 묘하게 긴장감을 남긴다.
개인적으로 좋은 편은 긴 휴일이고 호타로의 이야기이니 당연히 중요하지만 아마도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마지막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가 클 거다.
호타로의 긴 휴일은 마침표를 찍어 줄 사람을 찾은 듯한데 치탄다는 어떨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다음 권은 또 기약이 없다.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두 시리즈를 이렇게까지 팽팽하게 유지하는 작가에게 다시 한 번 놀란다.
재밌어서 좋고, 좋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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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히어로즈
기타가와 에미, 추지나 / 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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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사람이라면 누구나 히어로가 될 수 있게 도와주는 회사, <주식회사 히어로즈>다.
주인공 다나카 슈지는 성실하지만 소심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물로 모종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다.
편찮으신 외할아버지의 병문안을 다녀오느라 근무를 조정하게 되어 같은 알바생인 다쿠에게 신세를 지게 되고, 그런 다쿠가 건넨 일주일 간의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슈지는 한 허름한 건물에서 주식회사 히어로즈의 사장과 대면하게 되고 직원인 미치노베를 따라간 호텔에서 자신이 이제껏 좋아하던 만화가 도조 하야토를 만나 포효하는 그가 진정되는 걸 돕게 된다.
그렇게 일주일 간 스트레스를 절규로 풀어내는 도조 하야토의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마지막 선물로 슈지 자신의 캐리커쳐가 그려진 명함을 받으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렇게 히어로즈의 존재를 알게 된 얼마 후 삼각김밥을 떨어뜨린 손님에게 새것으로 교환해주며 다쿠와 시시덕거린 날, 슈지는 히어로즈에서 정직원이 될 마음이 있다면 면접을 보러오라는 전화를 받는다.
편한 차림으로 오라는 말에 정말 편하게 입고 간 면접장에서 일주일 간 얻은 것을 내어놓으라는 질문에 명함과 뒷면의 캐리커쳐를 꺼내 대답한 면접을 마치고 슈지는 어리둥절하게도 히어로즈에 입사하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히어로 프로듀싱, 정작 하는 일은 매니저에 가까운 히어로즈라는 회사에 대해 슈지는 조금씩 알아가면서 애정을 쌓아간다.
입장까지 3시간이 걸리는 인기 있는 파이가게 역시 히어로즈의 작품인 걸 알게 되고, 자신과 전혀 다른 미야비라는 존재를 통해 시야가 넓어지고, 모든 것을 잘 해낼 듯 유능해보이는 미치노베도 재능의 신이 자신에게 온 적 없다고 생각한다는 걸 알게 되며 슈지는 점차 변해간다.
첫 의뢰였던 인기 여배우 다사키 마이가 작품을 위해 평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며 누구보다 평범한 자신의 위치와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트라우마와 미야비의 아픔, 도조 하야토의 절망 등 모든 시간을 통해 성장하며 다시 외할아버지를 찾아간다.
자신의 말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 두려웠던, 여전히 겁쟁이인 슈지에게 되찾은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은 맨 손으로 매미를 잡아주던 외할아버지가 자신의 첫 번째 히어로였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외할아버지의 말 끝에는 그러나 행복했다는 말이 있었고 모든 걸 그만둔다는 말 끝에는 또 다른 시작이 있다.
몇 달 전 목격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한 초등학생의 사고와 최근 보게 된 손수건을 찾는다는 전단의 실체를 알게 되고, 슈지는 무감했던 과거와 상처를 벗고 다시 새로운 히어로를 위해 한 발 더 나아간다.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 같았던 슈지에게 만화처럼 선이 굵어지고 색이 입혀진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 작가는 자신에게 라이트 노벨이란 ‘아무튼 재미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만화를 글자로 만든 것처럼 재미에 특화된 소설, 내가 느낀 라이트 노벨 감상과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전형적인 라이트 노벨이다.
유쾌하면서도 감동이 있는, 마치 코미디가 섞인 휴머니즘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내 인생의 히어로나 일상의 히어로는 그리 특별한 소재는 아닌 것 같지만 캐릭터나 메인 소재는 눈에 띈다.
인물들의 사연이 어떤 터닝 포인트나 역전되는 순간 없이 너무나도 짧게 지나가버리는 것과 다소 적은 에피소드, 이야기의 분배 면에서 내용이 잘 이어지지 않고 흐름이 끊기는 점이 아쉽긴 하다.
얼마 전 개봉되었던 영화 중 뭐 저런 제목이 있나 생각했던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가 작가의 전작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현청 접대과>와 <세 마리 아저씨>의 아리카와 히로가 연상되었다.
밝고 유쾌한 이야기 좋으니까 전작도 찾아보고 싶어졌다.
재밌으니까 딱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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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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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미국의 역사적인 흑인 노예 해방조직 지하철도, 즉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 얽히게 되는 한 흑인 소녀 코라의 이야기다.

코라의 할머니인 아자리가 노예로서 여러 번 팔리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마지막까지 머무르게 된 조지아의 랜들 가에서 코라의 엄마인 메이블이 태어났고, 대를 이어 코라가 태어났다.
아자리가 겨우 물려준 반 평도 안 되는 밭이 모녀의 전부였고 메이블이 코라를 두고 떠난 날 이후 코라는 모두에게서 스스로 그 땅을 지켜내야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 지내는 호브로 쫓겨나며 자신의 땅을 뺏으려는 사람들에게 들개처럼 달려들어 외톨이가 된 코라에게 어느 날 시저는 함께 떠나자는 말을 건넨다.
하지만 끔찍한 고문과 벌이 기다릴 것을 알기에 코라는 제안을 거절한다.
제임스, 테런스 형제가 반반 나누어 관리하던 목화 밭에서 어느 날 코라가 아끼던 체스터가 체벌을 당하고, 나서서 그를 보호하는 바람에 코라는 테런스에게 찍혀버린다.
설상가상 제임스가 갑작스레 사망하고 전부 테런스의 소유가 되어버린 뒤 도망자를 심지어 불에 태우기까지 하는 등 그의 잔인함이 극에 달하자 그제야 코라는 시저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예상치 않게 자신을 쫓아온 친구 러비까지 끼어 셋은 몰래 그리고 신속하게 도망치기 시작했고 곧 사냥꾼들에게 잡혀 러비는 도로 끌려가고 코라는 졸지에 살인자가 된다.
시저에게 믿음을 주었던 플레처를 찾아가 겨우 지하철도의 역장 럼블리와 만난 그들은 생전 처음 기차를 타고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향한다.
베시라는 새 신분으로 살게 된 코라와 시저는 그곳의 역장인 샘과 친해지고 흑인과 백인이 자연스레 어울리고 함께 생활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적응하며 기차를 타고 다시 떠나는 것을 계속해서 미룬다.
몇 달 뒤 바텐더인 샘을 통해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흑인을 위한 병원을 열고 피임을 강요하는 것이 흑인 인구 감소를 꾀하고 그들에게 매독의 반응을 실험하는 프로젝트이며 도시 전체가 공범임을 알게 된 그들 앞에 잊혀졌던 노예 사냥꾼이라는 존재가 다시 나타난다.

리지웨이는 가장 악명 높은 노예 사냥꾼으로 수많은 노예를 잡아 현상금을 챙겼지만 단 하나 찾지 못한 메이블의 존재가 계속해서 그의 주변을 맴돌았고 이번에는 그 딸이 타겟임을 알고 코라를 무섭게 쫓아왔다.
겨우 겨우 지하철도로 숨어들어 혼자 도망친 코라는 이미 들켜버려 끊겨버린 기차를 한없이 기다리고 우연히 지나가는 기차를 얻어타 노스 캐롤라이나로 이동한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와는 정반대로 노스 캐롤라이나에서는 흑인을 배척하고 그 증거로 자유의 길 앞에는 무수히 많은 흑인의 시체가 줄지어 걸려있었다.
흑인은 물론 그를 숨겨주는 것만으로도 죽임을 당하기에 이곳의 역장인 마틴과 부인 에설 역시 코라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갈 곳 없는 코라를 위해 겨우 다락의 좁은 공간을 내어주고 절대 들키지 않게 소리내지 말고 나오지 말라 한다.
창문으로 흑인을 증오하고 배척하는 연설을 들으며 코라는 점점 말라가고 아프기까지 하는데 마침 하녀의 고발로 불시에 방문한 순찰대에 의해 코라의 존재가 들키며 마틴 부부와 코라는 처형대에 오른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리지웨이는 코라의 소유권을 주인에게 돌려주겠다며 코라에게 사슬을 채우고 다시 조지아로 향한다.

리지웨이는 코라를 데리고 조지아로 곧장 가지 않고 다른 노예들을 또 잡아들이며 여정을 이어가고 흑인 소년인 마부 호머와 보스먼과 함께 테네시에 머무른다.
이제껏 리지웨이 일행과 익숙해진 코라는 그곳에서 새옷과 새신을 받게 되고 또한 자유인을 보게 된다.
수없이 도망치기를 시도했지만 늘 잡히면서 맞는 바람에 리지웨이에게 공포를 품게 된 코라는 그럼에도 여지없이 탈출을 시도하고, 잡힐 뻔한 순간 생각지도 못한 세 남자의 도움으로 코라는 어쩌다 보니 탈출에 성공한다.
자신들의 이름을 로열, 레드, 저스틴이라 밝힌 셋은 코라를 지하철도에 태워 인디애나의 밸런타인 농장으로 이끈다.
밸런타인 부부가 자신의 재산으로 흑인을 위해 마련한 공간인 그곳에서 코라는 자리잡고 생활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구해준 로열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품으며 코라는 책을 읽고 만찬을 즐기면서 매일을 꿈처럼 살아간다.
어느덧 너무나도 커져버린 흑인들의 천국을 아니꼬워 한 백인들은 어느 날 농장을 향해 총탄을 날리고, 로열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 그곳에서 코라는 마치 악몽처럼 리지웨이와 대면한다.
자신이 안내한 유령철도를 통해 지하철도가 드러나게 될 위기에 처한 코라는 몸을 던져 리지웨이를 누르고 터널을 향해 홀로 나아간다.

너무나도 다양한 인물들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곡절들이 그리 많지 않은 페이지 속에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다.
할 말은 줄이고 그저 마음에 새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이 책은 소설이지만 실증이고, 그렇기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글 전체가 소리친다.
겪어보지 못한 일에 감히 뭐라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안타까움 하나, 그마저도 주제 넘을까봐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내용 자체를 떠나서 번역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
인물이 워낙 많이 등장하는 탓도 물론 있을 테지만 가장 문제는 한 인물을 자기 마음대로 섞어 부르다 보니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앞부분에서 아자리가 코라의 할머니와 동일인물이라는 걸 꼭 그렇게 어렵게 써야 했는지, 왜 자꾸 헷갈리게 호칭을 통일하지 않는 건지 그런 면에서는 너무나도 불친절한 책이다.
내용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다른 것들이 너무 발목을 붙잡고 늘어져서 넘어가지가 않는다.
문장만 좋았으면 더 내용이 잘 들어왔을 텐데 정말 아쉽다.

전설처럼 딸을 버리고 홀로 떠나 자취를 감춘 메이블은 새로운 땅에서 꾸준히 행방을 묻는 코라 앞에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캐나다로 떠났다더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코라를 행운의 부적처럼 만들어 결국 탈출을 이끈 엄마 메이블이 밉고 이해할 수 없어 코라는 당장이라도 찾아가 따지고 싶다.
에설과 시저의 이야기도 먹먹하고 물론 필수적인 요소지만 엄마인 메이블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부분은 생소한 지점에서 맥이 풀리게 만든다.
그로 인해 이야기는 공허함을 남기는 반면 살아남은 코라를 더욱 부각시키고 결국 모두의 삶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코라의 이야기로 모두가 같을 수 없음을 의미하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음을, 그것이 현실이었음을 안다.

길고 긴 여정 끝 결말은 열려있다.
코라가 어떻게 될 지, 때론 알지 못하는 게 최선일 때가 있다.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하지 않고 마치려 한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조직을 처음 접한 작가가 상상한 지하철도와 기차 이미지, 그러나 이름만 레일로드였단 걸 알게 되고 실제 기차가 있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며 쓴 이야기다.
정말 모든 게 상상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차가 내달릴 때 바깥을 보면, 미국의 진짜 얼굴을 알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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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목이 시리즈임이 분명해서 끌렸는데 장기이식과 관련한 추리소설으로 꽤 괜찮게 읽었던 <살인마 잭의 고백>의 작가인 걸 보고 빌려왔다.
빌려온 지는 꽤 되었지만 나름 연말이라고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방치되었다가 졸지에 올해의 마지막 책이 되어버렸다.

사이타마 현의 우라와 대학 법의학 교실을 배경으로 부검을 통해 사건 해결을 꾀하는 추리 소설이다.
1권에서는 기본적인 배경 설명과 인물 소개를 시작으로 서서히 법의학에 적응해가도록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신입인 마코토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독자와 마찬가지로 법의학에 문외한인 마코토와 함께 점차 부검과 법의학에 천천히 빠져들도록 만들어준다.
제목인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꾸준히 언급되는데 법의학을 의학보다 낮게 보는 인식에 대해 책은 의사의 기본 윤리인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들어 산 자와 죽은 자가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것과 부검과 법의학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내과 연수의였던 마코토가 내과 과장인 쓰쿠바의 요청으로 가게 된 법의학 교실에서 법의학 최고의 권위자인 미쓰자키 교수와 시신 애호가처럼 느껴질 만큼 부검을 좋아하는 캐시 부교수를 만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미 죽은 자를 부검하는 일보다는 산 자의 치료를 우선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하던 마코토는 카데바 이외에는 한 번도 접한 적 없던 시신 해부를 경험하고 그와 관련해 사이타마 현경인 고테가와를 통해 실제 사건을 접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서서히 생각을 바꿔나간다.
강가에서 발견되어 음주 후 동사로 보였던 50대 남성의 죽음, 교통사고로 오해받았던 결혼 예정의 20대 여성의 죽음, TV로 생중계된 경정 시합 중 사고로 인한 30대 남성의 죽음, 마코토의 친구이자 내과 쓰쿠바 교수의 환자였던 20대 여성의 죽음, 마코토의 첫 환자였던 10살 아이의 죽음까지 5개의 죽음과 그 부검을 토대로 묻혀질 뻔한 죽음의 비밀이 파헤쳐진다.
기저 질환을 가지고 있던 환자의 죽음들에 대해 비밀리에 재조사를 요청한 미쓰자키 교수의 말과 각 사건의 공통점들을 통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며 1권이 마무리된다.

마코토가 몇 개월 후 법의학 교실에서 조교로 부임하며 시작되는 2권 <히포크라테스 우울> 역시 1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모종의 인물이 등장하며 약간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모든 죽음에 부검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건 나에게 잘된 일이다. 앞으로 현에서 발생한 자연사, 사고사에 모종의 음모가 있는지 의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라는 말로 경찰과 법의학계의 사법해부 관행에 의문을 던지며 자신의 이름을 커렉터, 교정자라 칭하는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경찰과 법의학 교실 모두 엄청난 과로에 시달리게 된다.
콘서트장에서 추락하며 사망한 인기 아이돌인 10대 여성의 죽음, 한 여름 열사병으로 사망한 3살 아이의 죽음, 사이비 종교의 교주였던 40대 남성의 죽음, 치매 부인을 간병하며 학대 피해자로 보여졌던 70대 남성의 죽음, 횡령 혐의를 받고 자살로 마무리되었던 은행원 20대 여성의 죽음, 고테가와의 동기이자 교통 경찰관이었던 20대 여성의 죽음까지 경찰과 법의학 교실은 커렉터의 말에 휘둘리면서도 모든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커렉터의 정체가 드러나며 마무리되었지만 아직 남은 이야기들이 충분해 보이고 최종 보스처럼 느껴지는 미쓰자키 교수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도 없었기에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읽으면서 이야기가 드라마의 에피소드처럼 진행된다 생각했는데 역시 작년에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일본은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영상화 제작이 참 활발한 것 같다.
그리고 전작인 <살인마 잭의 고백>도 그렇고 작가의 글이 드라마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왠지 모든 이야기가 드라마로 제작되어도 좋을 것 같다.
소설로 볼 때는 어쩌면 밋밋한 범인들에 뻔한 추리 과정으로 보여지지만 드라마에서 좋은 연출이 더해지면 미묘한 러브라인이나 각 에피소드들이 돋보일 수 있을 듯하다.
산 자와 죽은 자, 가해자와 피해자, 감찰의와 법의학자, 어머니와 딸, 위약과 서약 이라는 차례로 각 에피소드를 진행했던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떨어뜨리다, 달구다, 태우다, 멈추다, 매달다, 폭로하다 의 차례로 진행되는 <히포크라테스 우울>에서 각 목차들이 이야기를 간결하게 드러내면서도 또 너무 잘 맞아서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살인마 잭의 고백>에서는 장기이식과 관련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허점을 집어낸 것이 기억에 남는데 이번 시리즈에서는 경찰과 법의학계의 사법해부와 관련해 예산과 의사의 수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지속해서 물고 늘어진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기 보다 더 대중적인 이야기를 쓴다는 작가의 말이 언급되는데 이야기의 재미와 함께 사회적인 메시지를 하나씩이라도 포함하는 책이라 더 좋고 기억하기도 쉬운 것 같다.
올해의 마지막이라고 하면 조금 느낌이 이상해지고 괜히 더 까다롭게 보게 되는데 그래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역시 많은 책을 읽은 건 아니어도 올해 읽은 책 중 꽤 좋은 책들이 많았던 것 같아 다행이다.
내년에도 더 좋은 책들 많이 만날 수 있길, 그리고 혹시 바빠지더라도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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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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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4.7
10년 전 영어 학원 동료들과 함께 갔던 구라마 진화제에서 하세가와가 실종되었다.
이후 각자의 삶을 살던 5명은 오하시의 제안으로 10년 만에 구라마 진화제에 다시 오게 된다.
하세가와처럼 보이는 여성을 쫓다가 발견한 야나기 화랑에서 오하시는 기시다 미치오의 동판화 시리즈인 야행을 접하게 된다.
숙소로 돌아와 모두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자 하나 둘 기시다의 그림 야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기시다 미치오의 ‘야행’이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각자의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여행 한 번 없이 각 도시의 그림을 그려낸 화가 기시다는 10년 전 야행 시리즈를 구상했고 해가 뜨면 잠에 들어 해가 지면 깨는 생활을 지속하며 2년 반 만에 48개의 작품을 완성하고 7년 전 의문의 죽음을 맞이 했다.
공통적으로 밤 속에 얼굴 없는 여성이 그려져있는 야행과 반대로 한 번 뿐인 아침을 그려냈다는 서광 시리즈가 존재한다고 알려졌지만 누구도 그 그림을 본 적 없다.
5년 전 오노미치에 가출한 아내를 찾으러 갔다가 야행-오노미치를 보았던 나카이는 아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여자를 마주하고 기묘한 일을 겪은 채 아내와 함께 돌아온다.
다케다는 4년 전 직장 동료 마스다와 그의 여자친구 미야, 미야의 동생 루리와 함께 여행을 갔다 야행-오쿠히다를 보고 그려진 여자가 미야를 닮았다 생각한다.
우연히 자신들의 차에 타게 된 미시마라는 여성에게 네 명 중 두 명에게 죽을 운명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며칠 뒤 숙소에서 두 명이 사라진다.
3년 전 후지무라는 남편과 후배 고지마와 함께 아오모리로 향하는 침대 열차를 타고 야행을 하게 되고 일전에 보았던 야행-쓰지마 그림과 똑같은 집을 발견한다.
고지마는 그 집에서 사라졌고 남편과 둘만 남게 된 후지무라에게 불에 탄 집과 오래 전 자신의 친구였던 가나 짱이 고지마와 함께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기시다 미치오와 친분이 있던 다나베는 2년 전 우연히 탄 열차에서 한 스님과 여고생을 만난다.
야행-덴류쿄 그림을 가지고 있던 스님은 알고 보니 기시다의 집에서 알게 되었던 사에키였고 사이가 좋지 않던 둘에게 여고생은 기시다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나베는 기시다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들어 둔 암실에서 자신은 벗어나지 못했고 여고생은 기시다의 그림 속 귀신임을 깨닫는다.
각자의 이야기가 끝나고 모두가 함께 구라마 진화제를 보러 나가게 되고 오하시는 불쑥 혼자 남겨진다.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다들 어디에 있는지 묻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오하시라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같이 10년 전 실종사건 이후 구라마 진화제를 보러 모인 적이 없다 말한다.
가까이 있던 나카이가 오하시를 불러 둘은 만나게 되고 나카이는 오하시에게 10년 전 실종된 것이 다름 아닌 오하시였다며 지금껏 뭘했느냐 묻는다.
오하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말하며 방금 전까지 모두가 함께 있었다 주장하고, 믿지 않는 나카이에게 그가 들려 준 오노미치 이야기를 꺼내며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기시다의 그림을 보러 야나기 화랑으로 가자 한다.
야나기 화랑에 걸려 있는 그림은 이전 자신이 보았던 야행-구라마가 아닌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서광’이었다.
7년 전 죽었다는 기시다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어 야나기에게 부탁해 기시다를 만나러 간 오하시와 나카이는 뜻밖에 기시다의 부인이 된 하세가와를 만나게 되고 오하시의 이야기를 기시다 부부에게 털어놓는다.
모든 이야기를 끝낸 오하시는 서광-구라마 그림이 변하면서 자신이 그 공간에서 벗어남을 홀로 눈치채게 되고 단 하루 뿐인 아침이라는 서광과 야행의 비밀을 알게 된다.

<꿀벌과 천둥>과 함께 참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서관에 들어와 기뻤는데 계속해서 빌려가버리는 바람에 몇 달째 구경도 하지 못했었다.
책을 사는 게 빠르겠다 싶어 포기하려던 때에 겨우 만나서 정말 좋았다.
비록 누군가가 험하게 보는 바람에 책장을 울게 만들고 자국을 남겨서 화가 났지만 내용만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간 모리미 도미히코의 기담 중 단연 정점을 찍은 책인 것 같다.
<추상오단장>이 생각나기도 하는 각자의 이야기들이 야행이라는 그림으로 묶여 점차 비밀을 토해내고 마침내 이름만 나오던 서광이 등장하며 모든 것이 밝혀지는 이야기.
완전한 맺음은 아니지만 성급하지 않도록 마무리를 짓는 게 오히려 단단히 이야기를 틀어 막아준다.
밤의 어둠 속에서 야행하고 있는 이들에게 아침의 존재를 상기시키면서도 아침이 올리 없다는 듯 더 깊은 밤으로 이끌어간다.
밤은 너무도 깜깜해서 무엇이 다가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고 밤 아래서만 수놓아지는 불빛들이 낮과는 전혀 다른 기이한 황홀경을 선사해 어디로든 데려간다.
어둠의 장막 속에서 조금씩 적응해가며 실컷 떠돌아다니도록 두고선 사실은 두 세계는 종이의 양면처럼 같지만 전혀 다르고 뒤집히지 않는 이상 결코 만날 수 없음을 알린다.
그리하여 밤은 곧 세계이고 세계는 언제나 밤이라는 말을 남긴다.

생각보다 길지 않은 이야기라 아쉬웠지만 딱 적당한 곳에서 마무리되어 깔끔하게 느껴진다.
이제까지의 모리미 도미히코의 작품 중 대중적인 작품이라면 <펭귄 하이웨이>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꼽았을 텐데 미스터리 분야에서만은 이 책이 가장 대중적이다.
기담이라는 면에서 갈릴 수는 있겠지만 특유의 문체 같은 걸림돌이 전혀 없어 작가의 이름을 떠나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이야기다.
책을 읽는 도중 빛을 따라가던 이가 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밤 속으로 영영 떠나버린 사람이 사무치는 밤이었고 그 모든 걸 담게 된 책이 <야행>이었다.
어두운 밤 속에서 아름다운 빛만 따라가며 부디 모든 걸 잊고 행복하길 감히 바라본다.
세계는 언제나 밤이니까 그 밤길에 편히 머무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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