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제목이 시리즈임이 분명해서 끌렸는데 장기이식과 관련한 추리소설으로 꽤 괜찮게 읽었던 <살인마 잭의 고백>의 작가인 걸 보고 빌려왔다.
빌려온 지는 꽤 되었지만 나름 연말이라고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방치되었다가 졸지에 올해의 마지막 책이 되어버렸다.
사이타마 현의 우라와 대학 법의학 교실을 배경으로 부검을 통해 사건 해결을 꾀하는 추리 소설이다.
1권에서는 기본적인 배경 설명과 인물 소개를 시작으로 서서히 법의학에 적응해가도록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신입인 마코토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독자와 마찬가지로 법의학에 문외한인 마코토와 함께 점차 부검과 법의학에 천천히 빠져들도록 만들어준다.
제목인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꾸준히 언급되는데 법의학을 의학보다 낮게 보는 인식에 대해 책은 의사의 기본 윤리인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들어 산 자와 죽은 자가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것과 부검과 법의학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내과 연수의였던 마코토가 내과 과장인 쓰쿠바의 요청으로 가게 된 법의학 교실에서 법의학 최고의 권위자인 미쓰자키 교수와 시신 애호가처럼 느껴질 만큼 부검을 좋아하는 캐시 부교수를 만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미 죽은 자를 부검하는 일보다는 산 자의 치료를 우선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하던 마코토는 카데바 이외에는 한 번도 접한 적 없던 시신 해부를 경험하고 그와 관련해 사이타마 현경인 고테가와를 통해 실제 사건을 접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서서히 생각을 바꿔나간다.
강가에서 발견되어 음주 후 동사로 보였던 50대 남성의 죽음, 교통사고로 오해받았던 결혼 예정의 20대 여성의 죽음, TV로 생중계된 경정 시합 중 사고로 인한 30대 남성의 죽음, 마코토의 친구이자 내과 쓰쿠바 교수의 환자였던 20대 여성의 죽음, 마코토의 첫 환자였던 10살 아이의 죽음까지 5개의 죽음과 그 부검을 토대로 묻혀질 뻔한 죽음의 비밀이 파헤쳐진다.
기저 질환을 가지고 있던 환자의 죽음들에 대해 비밀리에 재조사를 요청한 미쓰자키 교수의 말과 각 사건의 공통점들을 통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며 1권이 마무리된다.
마코토가 몇 개월 후 법의학 교실에서 조교로 부임하며 시작되는 2권 <히포크라테스 우울> 역시 1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모종의 인물이 등장하며 약간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모든 죽음에 부검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건 나에게 잘된 일이다. 앞으로 현에서 발생한 자연사, 사고사에 모종의 음모가 있는지 의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라는 말로 경찰과 법의학계의 사법해부 관행에 의문을 던지며 자신의 이름을 커렉터, 교정자라 칭하는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경찰과 법의학 교실 모두 엄청난 과로에 시달리게 된다.
콘서트장에서 추락하며 사망한 인기 아이돌인 10대 여성의 죽음, 한 여름 열사병으로 사망한 3살 아이의 죽음, 사이비 종교의 교주였던 40대 남성의 죽음, 치매 부인을 간병하며 학대 피해자로 보여졌던 70대 남성의 죽음, 횡령 혐의를 받고 자살로 마무리되었던 은행원 20대 여성의 죽음, 고테가와의 동기이자 교통 경찰관이었던 20대 여성의 죽음까지 경찰과 법의학 교실은 커렉터의 말에 휘둘리면서도 모든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커렉터의 정체가 드러나며 마무리되었지만 아직 남은 이야기들이 충분해 보이고 최종 보스처럼 느껴지는 미쓰자키 교수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도 없었기에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읽으면서 이야기가 드라마의 에피소드처럼 진행된다 생각했는데 역시 작년에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일본은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영상화 제작이 참 활발한 것 같다.
그리고 전작인 <살인마 잭의 고백>도 그렇고 작가의 글이 드라마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왠지 모든 이야기가 드라마로 제작되어도 좋을 것 같다.
소설로 볼 때는 어쩌면 밋밋한 범인들에 뻔한 추리 과정으로 보여지지만 드라마에서 좋은 연출이 더해지면 미묘한 러브라인이나 각 에피소드들이 돋보일 수 있을 듯하다.
산 자와 죽은 자, 가해자와 피해자, 감찰의와 법의학자, 어머니와 딸, 위약과 서약 이라는 차례로 각 에피소드를 진행했던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떨어뜨리다, 달구다, 태우다, 멈추다, 매달다, 폭로하다 의 차례로 진행되는 <히포크라테스 우울>에서 각 목차들이 이야기를 간결하게 드러내면서도 또 너무 잘 맞아서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살인마 잭의 고백>에서는 장기이식과 관련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허점을 집어낸 것이 기억에 남는데 이번 시리즈에서는 경찰과 법의학계의 사법해부와 관련해 예산과 의사의 수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지속해서 물고 늘어진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기 보다 더 대중적인 이야기를 쓴다는 작가의 말이 언급되는데 이야기의 재미와 함께 사회적인 메시지를 하나씩이라도 포함하는 책이라 더 좋고 기억하기도 쉬운 것 같다.
올해의 마지막이라고 하면 조금 느낌이 이상해지고 괜히 더 까다롭게 보게 되는데 그래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역시 많은 책을 읽은 건 아니어도 올해 읽은 책 중 꽤 좋은 책들이 많았던 것 같아 다행이다.
내년에도 더 좋은 책들 많이 만날 수 있길, 그리고 혹시 바빠지더라도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