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온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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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어느 날부턴가 사토코의 집에 계속해서 말 없는 전화가 걸려온다.
침묵이 이어지다 끊기기를 수 차례 반복하던 전화의 끝에 유령 같은 목소리가 내놓은 말은 아이를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사토코는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부모님의 채근에 간 난임 병원에서 남편이 무정자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돈과 시간을 들여 난임 시술을 받기를 여러 해 지속하며 부부는 지쳐가고 사토코는 결국 그만하자는 말을 건네며 아이를 갖는 일에 단념한다.
무심코 나오던 뉴스에서 특별 양자 결연을 접하게 된 사토코 부부는 고민과 설득 끝에 입양을 결심한다.
그렇게 6년 전 아이를 만났고 그제야 둘에게 어둠이 개고 아침이 왔음으로 아이의 이름을 아사토라고 지었다.
아이를 돌려주거나 아니면 돈을 내놓으라는 전화 후 상대방과 만나게 된 사토코 부부는 자신을 아사토의 생모라 주장하는 여성에게 누구냐 묻는다.
6년 전 아사토를 만나며 함께 보았던 생모 히카리는 죄송하고 감사하다며 아이를 잘 부탁한다 말했었다.
아사토를 자신들에게 선물해 준 히카리를 사토코 가족들은 히로시마 엄마라고 부르며 존중하고 감사해왔다.
아이를 잊지 않겠다며 편지를 주고 간 히카리가 아이를 빌미로 협박하는 여성과 동일인물일 리 없다 생각하는 부부는 아사토의 입양 사실은 협박거리가 되지 않음을 말하고 여성은 조용히 돌아간다.
한달 뒤 사토코네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그 여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여성이 절도 혐의를 받고 있고 현재 실종되었음을 전하고 아는 사람인지 묻는다.
아득해진 사토코가 여성의 정체를 묻자 경찰은 여성의 이름이 히카리라고 답한다.

책은 히카리의 가족과 아사토의 가족을 통해 전혀 상반된 가족 이야기를 보여준다.
피로 맺어졌지만 서로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강요하는 가족,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서로를 생각하고 믿어주는 가족, 두 가족이 만들어낸 결과를 히카리와 아사토라는 존재를 통해 극명히 대비시킨다.
마냥 공감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히카리의 이야기는 특히 너무도 어린 나이로 시작되어버린 탓이지만 어쨌거나 지나치게 어리석고 답답하고 막막하다.
아이가 잘못되는 건 부모의 탓이라 한다.
히카리가 그렇게 된 것 역시 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
육아와 양육이라는 게, 부모가 된다는 일이 너무나도 어렵다는 걸 나날이 깨닫는다.
부모가 될 생각이 없는 나조차 스스로 부모의 자격을 묻는데 부모가 될 준비가 전혀 안 된 누군가는 어째서 아무런 고민도 없이 덜컥 부모가 되어버렸을까.
왜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어 마주해버렸는지, 무섭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분명 곤란하고 위험한 일인데 어째서 그렇게 당연히 여겨지는지, 쉬워서는 안될 일이 쉽게 되어버린 결과로 히카리 같은 아이들이 어떠한 고통을 짊어지는지, 선택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다.
끝도 없이 이어질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는 주제다.
반면 아사토는 얼마나 사랑스럽게 묘사되는지, 부모가 된다는 일의 무게와 동시에 그 가치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명암처럼 분리되었던 둘의 이야기가 합쳐지는 후반부가 약간 과장되어버려서 흐름이 깨지긴 했지만 드라마로 치면 그리 튀지 않는 전개이긴 할 거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니 이해가 간다.
참 배열을 잘 하는 작가 같다.
빠짐 없이 군더더기 없이 골고루 들어 찬 이야기들이다.
포근하다.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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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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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민음사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좋아한다.
17권의 책이 쌓이면서 각자의 이야기는 자신을 확실하게 드러내면서도 유사한 분위기를 띠게 되었는데 크게 보면 삶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일 이야기들이 주는 느낌이 좋아서 꾸준히 관심을 갖게 된다.
<딸에 대하여> 역시 나올 때부터 읽어 봐야지 생각했고 결론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이야기는 끝까지 엄마의 시점에서만 진행된다.
요양보호사인 엄마의 일상에 불시에 끼어들게 된 딸과 그 애로부터 자신이 돌보던 젠의 일생까지 모든 존재들이 만들어낸 불협화음이 묘하게 그녀의 생활을 잠식하게 된다.

엄마는 오래 전 허락도 없이 불쑥 아프리카로 떠난 뒤 독립한 딸이 갑자기 집으로 들어오겠다는 이야기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전국을 떠도는 시간 강사로 사는 딸이 서른이 넘도록 결혼도 않고 여자애와 지내는 게 못미덥다.
그녀에게 젊다는 건 어리석은 것이라 딸이 모든 상황을 조용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현실을 미처 모르는 탓이고, 평범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사랑을 주장하는 게 지나치게 많은 걸 배웠기 때문인 것만 같다.
매일같이 자신의 집에서 보란듯이 그 애와 지내는 딸이 유식한 깡패마냥 느껴지고 딸에게 받은 돈 때문에 할 말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절망스럽다.

한편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후원을 보내며 다른 생을 수없이 구원했다는 젠은 그렇게 존경받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욕창으로 짓물러진 피부에 반 개의 기저귀조차 허락받지 못한다.
본인이 누구인지 온통 잊어버린 채 그저 살아있게 된 젠이 언젠가의 자신 같고, 혹은 딸 같아서 자꾸만 잘못된 것에 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리하여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쫓겨난 시간 강사의 일에 제 일 같이 뛰어드는 딸에 대해, 그 애에 대해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가장 귀중한 것을 나눌 이는 가족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엄마에게 테두리 밖의 이야기는 받아들이기 버거워서 멀리 치워버리고만 싶은데 딸은 그것이 자신이라 주장하며 계속해서 눈 앞에 끌고 온다.
그렇게 젠과 딸이 내 세상 밖의 일을 내 것으로 만들어버려 그녀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그곳에 갇혀버렸다.

엄마에게 동성애자 딸은 당연히 버거운 문제지만 그 또한 삶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살면서 나타나는 넘어가야 할 산 중 애써 돌아가며 무시해왔던 조금 높은 산이 비로소 눈 앞에 닥쳐온 것이다.
돈 때문에 집 안에 들이게 된 그 애의 존재가 점점 익숙해지고, 내 일이 아니라고 관망했던 일이 내 일이 되었다는 걸 점차 받아들이고,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딸과 그 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조금씩 산을 올라간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딸을 이해하는 것은 기적이다.
언젠가 올 지는 모르지만 또 안 올 지도 모르는 기적.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싸우며 산을 오르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가족 임에도 남편을 닮아 타인 같은 딸이 그럼에도 가족이라 쉽게 놓을 수 없어 그저 붙들고 만다.
결국 그렇게 가족이, 삶이 자꾸만 산을 만들어왔다.
순탄하기를 바라며 생을 버텨가는 일 속에 끼어드는 모든 일들이 산이었고 짐이었다.

살아가는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이 세상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건 당연한 거고 내 삶이 티끌조차 되지 않는 걸 깨달은 지도 오래다.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오랜 시간을 지나온 사람의 이야기다.
모든 걸 알면서도 나만은, 내 가족만은 해당되지 않기를 바라는 조그마한 이기심이고 그것조차 알지만 불가피하게 생겨난 마음이다.
이 책에서 동성애는 결코 단순한 소재가 아니었지만 결국 내게는 단순한 소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끊임없이 생에 대해 생각한다.
삶이란 어찌해서 이렇게 와버렸는지, 그럼에도 어떻게 살아가는지.
젠이, 그린과 레인이, 엄마가 펼쳐놓은 삶이 저 먼 데서 다가온다.
그래, 이 또한 내 세상 밖의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가 원한 의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것만이 남아서 모든 것을 채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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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봇 - 어느 집사 로봇 이야기 이상의 문학
정창영 지음 / 이상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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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2022년 2월 22일 출시된 남성 집사형 인공지능 로봇인 바봇의 2026년의 일상을 담은 책이다.
바봇은 로봇들의 욕으로 말하자면 인간질스러운 첫 주인에게 버림받은 후 중고 상가에서 초기화되기 직전 희원에게 거둬졌다.
희원의 집에서 바봇은 희원의 생활을 보조하며 고양이인 네오를 돌보고 희원이 잠들면 로봇들의 비밀 클라우드 RRPt에 일상 데이터를 업로드하고 티모스폴리스라는 사이버 도시에 접속해 인간 아바타로서 인간 체험을 한다.
매일같이 네오에게 무시당하고 전기를 줄이라며 홈첵에게 잔소리를 듣는 일상을 반복하며 바봇은 종종 일어나는 셧다운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걱정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DJ인 주인 대신 디제잉을 하며 주인보다 더 큰 인기를 끌게 되었지만 모든 돈을 뺏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 노란잠바로 인해 바봇은 드디어 기계인간의 노동권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이야기는 일상을 벗어나 아마도 이 책의 주제인 기계인간권을 향해 나아간다.

노란잠바의 등장을 전후로 이야기는 극명히 나뉘어진다.
불평과 넋두리로 가득찬 바봇의 일상과 기계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며 투쟁하려는 움직임은 딱히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이질적이다.
철학을 좋아하는 로봇이긴 하지만 평소에는 고뇌없이 생각만 늘어놓기 바쁘던 주인공이 마치 다른 존재처럼 뜬금없이 등장하는 주제에 대해 원론적인 고찰을 토로하며 심지어 4만 대의 로봇에 선두로 서기까지 한다.
이야기의 흐름은 그저 정해진 곳으로 가기 위해 시공간을 초월한 듯 하고 개연성은 찾기 힘들고 주제를 떨어뜨리기 무섭게 할 일을 다했다는 것처럼 급 끝나버리기까지 한다.
앞 부분의 로봇의 일상 또한 로봇인 척 인간이 쓴 게 너무나도 분명해 재미가 없고 고작 10년도 안 남은 이야기에 주구장창 등장하는 2000년대는 머물러있는 시대가 2026년이 아님을 아주 잘 드러낸다.
그로 인해 작위적인 느낌만을 남기고 소재 만으로 흥미를 돋우던 첫인상을 와장창 깎아내린다.
기계인간의 권리를 되찾는 투쟁은 이제껏 인간과 로봇의 대립에서 늘 보여주던 인간의 시점이 아닌 로봇의 시점에서 나오는 이야기라서 일상을 제치고 이 부분을 더 깊게 다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마치 가정주부가 갖은 핍박에 가출을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더 공감되게 그릴 수도 있었을 테고 그러면 후반부의 세계기계인간권선언 부분부터 이야기가 확 터지면서 급물살을 탔을 것 같은데 참 아쉬운 부분이 많은 책이다.
짧은 기억력은 무엇이 이 책에 대한 흥미를 일으켰는지 답을 내지 못한다.
다만 기다리던 책이라 더욱 아쉽고 가볍게 보고싶었던 만큼 표지가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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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얼굴의 사랑
정아은 지음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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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맨얼굴의 사랑’이 뜻하는 게 뭘까.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미처 알지 못한다.
성형외과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만 책 속의 인물들이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내어놓는 민낯을 뜻하는 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로만 가득찬 이야기다.

성형외과 의사와 유명 연예인과 주인공.
사랑을 갈구하며 서로를 이용하는 이야기는 기괴하고 추악하게 느껴진다.
아름다움으로 모든 걸 포장하는 성형외과라는 소재가 마치 이야기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그 자체가 곧 이 소설 같다.
모든 것이 드러난 맨얼굴의 사랑은 결국 파멸로 향한다.
누군가를 이용하면서도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 나를 이용했으면서 쓸데 없이 다정한 사람, 다른 사랑을 위해 이용하지만 안쓰럽고 좋아했고 안타까운, 하지만 끝까지 나를 위해 이용당할 뿐인 사람.
모두에게 내일은 영영 오지 않을 아주 무겁고 아찔한 날이 될 거다.

굳이 필요했을까 하는 설정들이 꽤 많다.
동영상을 모든 걸 밝히기 위한 미끼라고 치면 아이의 존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어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 속에서 이야기는 결코 이해받길 원하지 않는 것처럼 끝이 난다.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비일상을 선사하지만 너무나도 생경해 전혀 현실감이 없다.
거짓 속에 숨겨 놓은 추악한 진실처럼 그려 낸 맨얼굴의 사랑이 뜻하는 건 도대체 뭘까.
아주 부정적인 것처럼 그려 놓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것들이 과연 더럽기만 했을까.
사랑할 때의 얼굴이 어떻게 추하기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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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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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주인공은 작가이자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다.
어느 날 그녀는 신문에서 한 소설의 작가를 찾는 광고를 발견한다.
몇 줄의 글을 읽어나가던 중 그녀는 그 소설이 예전 익명으로 썼던 자신의 첫 소설 난파선 임을 알아채고 신문사에 전화해 자신이 허가한 적 없으니 더 이상 글을 싣지 말라 말한다.
그리고 얼마 뒤 한 여성이 전화를 걸어와 평소 남편이 그 글을 자신이 쓴 소설이라고 말했으며 6개월 전 실종되었다고 도와달라 청한다.
약속 장소에서 자신을 진이라 밝힌 여성은 남편이 남기고 갔다는 이유상이라는 이름이 찍힌 난파선 책과 그의 일기를 내어놓는다.
그 일기에는 이유미라는 여성이 태어나 자라온 순간들과 남의 학력을 훔쳐 피아니스트로, 교수로 지내다 모든 걸 들키고 이안나로 새로운 인생을 살며 의사라는 직업을 사칭하게 되었던 것, 여러 번의 사랑과 결혼을 거치며 모든 것을 잃은 그녀가 이유상이라는 남자 행세를 하며 한 기도원에 들어와 진이라는 여성을 만나고 결혼하게 된 모든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끝까지 주인공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녀는 소설가이지만 오래 전 소설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몇 년 간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했으며 자신이 저지른 외도로 인해 남편은 영국으로 떠났고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자마자 이혼을 선언하며 집을 나간 상태다.
자신의 이야기와 이유미의 이야기를 번갈아 내어놓으며 이유미를 쫓는 한편 그녀는 자신이 간과했던 것들과 마주한다.
이유미라는 존재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렇다고 인생의 무언가가 바뀌지는 않는다.
처음 소설을 썼을 때만 해도 인생을 뒤바꿔놓을 것만 같던 글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거짓으로 이유상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주인공의 남편이 영국에서 돌아오며 모든 것이 밝혀지고 난 후에도 그녀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충격이나 의문같은 게 있었을까,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를 잃지 않는 글 속에서 그녀는 감상만을 늘어놓을 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용당했을 뿐이며 종적을 감추어야 했을, 진실과 거짓이 섞인 이유미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결코 재단하지 않는다.
결국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엠의 삶이 주는 감상에서 손을 떼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며 그녀는 홀린 듯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사라진 여자 혹은 남자에 대해서, 진실 혹은 거짓을 담은 글을.

이유미의 삶은 <악녀에 대하여>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술된다.
그녀 자신이 남긴 일기에 근거해 그녀의 인생에 존재했던 사람들을 만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가능하리라 생각되지 않지만 실제로 그러했다는 그 거짓말 같은 삶이 주인공을 유혹하듯 끌어당긴다.
교수는 아니었지만 선생이었던 여자, 의사는 아니었지만 구원자였던 여자, 남자는 아니었지만 남편이었던 여자.
모순 같은 사실이 자꾸만 이유미라는 존재를 저 멀리 밀어내 달아나게 만든다.
실로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한 이방인’ 같은 존재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결코 가까워지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다.
하얀 돛의 난파선 만이 그녀를 쫓을 유일한 도구지만 누구도 그 배를 탈 수 없다.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것 같은 이야기다.
모든 걸 알겠다 생각했던 시점에 네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며 유유히 걸어나가는 진실이 만들어내는 기만은 역시 작가의 몫이다.
아픔마저 용인 가능한 행복처럼 느껴지게 만들던 글이 사실은 삶의 목적이 아닌 도구였으며 나의 무능력을 입증하는 단 하나의 증거라는 걸 알았다고 말하면서도 그것마저 써내려가는 것이다.
이야기의 내용을 떠나 하나의 소설로서 와닿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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