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프리퀀시 트리플 9
신종원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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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마그눔 오푸스‘, ‘아나톨리아의 눈‘, ‘고스트 프리퀀시‘
세 가지 짧은 글을 엮은 얇은 책이다.
이야기를 간추리는 건 사실 무의미할 것 같다.
내용 자체도 물론 흥미로웠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건 이 글의 형식이었다.

꿈과 환각과 정신세계를 뛰어넘는 모호한 시공간 개념이라던가 낱낱이 흩어진 이야기에 구각뿔의 주사위를 굴려 번호를 매긴다거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녹음하여 글로 들려주는 발상같은 것들,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 꼭 해체되었다 재조립된 것 같은 글들이 너무 신선했다.
그리고 또 하나 문득 문학에도 시대가 변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여실히 깨닫고 말았다.

키오스크나 스마트 뱅킹 혹은 MZ세대니 뭐니 그런 사회적인 관점에서만 세대차이를 느끼면서 젊은 작가가 그저 나이가 적고 무게감이 덜한 작품을 쓸 뿐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만이 아닌 거다.
코딩이며 주식을 초등학교 졸업 전부터 익힌다는 세대와 우리가 같지 않듯 책에서만 모든 지식을 캐어내던 세대와 컴퓨터를 제 몸처럼 끼고 살아온 세대는 이미 나뉘었다는 걸, #000000의 어둠과 .wav 형식의 기억 등의 표현을 통해서야 뒤늦게 깨치고 만다.
그러니까 이런 글을 쓸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작가와 독자는 어느 세대 이후 출생자여야겠구나 하는 깨달음.

비록 전공이 문학이 아니어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글속에 기어코 녹이는 꿋꿋함과 비정형적인 문장들을 뭉친 뒤 고르게 펼쳐내는 그들만의 표현력과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그려내는 일상 혹은 비일상의 장면들, 그것들이 읽는 내내 얼마나 찬란하게 반짝였는지.
최근 떠오르는 작가들의 책들에서 내가 발견해낸 즐거움들이 이런 맥락이었던가 싶어 재밌었다.
그리하여 고전은 고전대로 문장 하나, 단락 하나가 콕 박혀 내내 마음을 뒤흔들 테고 요즈음 이야기는 또 그것대로 이렇게 새로운 감명을 남겨 결국은 모두 내 시야를 넓히고 내 생각을 정제시키고 내 삶을 다양하게 꾸며줄 테지.
뭐 그런 깨달음으로 금세 페이지가 끝나고 마는 짧은 책이었다.
아무튼 꽤 괜찮았다.


📎
꿈에 해가 나왔다. 아주 밝고, 뜨겁게 잘 익은 해였다.
모두가 해를 탐냈다. 한데 아무도 해를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아비가 해를 가지기로 했다.
아비는 꿈에서 개였다. 하얀 개. 아무래도 경술년에 태어나 그런 건지.
아비는 해를 물고 달아났다. 천하야 어두워지든지 말든지. 괘념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네가 찾아왔다. 그래, 네가 바로 해였다.
아비가 해를 물고 달아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만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나는 꿈에서 황금 잉어를 훔쳤어요.
이제 주인이 다시 자기 것을 돌려달라고 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태몽은 산모가 꾸는 게 아니라 으뜸으로 배짱 있는 식구가 꾸는 것이다.
이제 그만 돌려주어라.
너 이미 세상에서 최고 값진 보물을 가지고 있지 않으냐?

📎
나중에 쇼팽은 심낭염으로 인한 심장눌림증 속에 흉통을 호소하며 죽어요. 자그마치 스물한 개에 이르는 녹턴을 작곡하는 사이, 너무나도 많은 밤을 눈 뜬 채로 들이마시기 때문이지요.

📎
시간의 뒤섞임을 나타내는 전정신경계 신호. 다행스럽게도 그때 내 몸은 박지일이 바깥에서 태웠던 슬림 사이즈 던힐 제품 때문에 7밀리시버트쯤 피폭되어 있었다. 담배 내부에도 미량의 포름알데히드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것은 오히려 나의 현실을 방부 처리하는 방식으로 시제 오염을 막아 주었다.

결국 우리 앞에 남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이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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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데이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0
서수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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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환장‘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많이 떠오른 단어가 그거였다.
컬쳐쇼크, 이름하여 대환장파티로 시작되던 글이 햇살에 깨어지고 유화처럼 뭉개지더니 종래엔 파도에 부서진 모래알같은 잔상만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짧은 소개글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주인공, 유진과 데이브는 한국과 호주 간의 문화 차이로 인해 끊임없이 다툰다.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다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된 과정은 너무나 간단했다.
다만 모든 답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던 애정도 조금씩 해지고, 서로 마주보며 웃는 것만으로 채워지던 행복이 바닥나고 보니 남은 건 현실이고 형편이고 자존심이고 이기심이더라.

한계에 굴복하며 미술의 길에 발만 걸치고 있는 유진이 호주에 가서 마찬가지로 정처없이 헤매는 중인 데이브를 만나 사랑을 한 게 전혀 평범하진 않은데 파헤쳐보면 또 지극히 평범하고 보편적이다.
싸우는 장면에서도 유진이 하는 말 보다 데이브가 이해갈 때도 있고, 반면 어떨 땐 데이브의 말이 해괴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결국은 문화 차이가 42퍼센트 정도 섞인 개인차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본인의 가족 앞에서 하지않아도 될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데이브를 발로 차주고 싶은 마음 역시 분명히 알 것 같고, 뷰가 좋은 옥탑방을 고집해 함께 누운 자리에서 서른셋에 이러고 있는 남자를 수발해야하는 데서 느끼는 그 심정 또한 익숙하다.
호주 사는 데이브에게서 자꾸만 내 과거의 조각이 만져진다.

그러는 한편 본인의 재능을 향한 의심과 은근슬쩍 가해지는 인종 차별들이 유진의 현실을 자꾸 고통스럽게 만드는데, 거기에 호주 사람들은 본인들이 학살한 원주민 이야기를 얹고 한국인 엄마는 한국의 규칙을 강요한다.
호주에 있으면 한국인이 되는데 한국에 있으면 호주인의 말을 따라하게 된다.
결국 어느 곳에도 섞이지 못하고 바라던 것들도 이루지 못한 채 남김 없이 털어내져서 내동댕이쳐진 듯한 기분.
군중 속의 고독과 홀로 뒤쳐지는 절망, 섞이지 못하는 소외감 등등.
사실 배경만 바뀌었을 뿐 누구나 어디서나 한번씩 느껴본 적 있지 않을까.

원주민 이야기와 인천 상륙 작전을 언급하는 모습 저변에 너무나도 당연히 선민사상 비스무리한 게 깔려있어 불쾌감을 자아내는데, 점차 쌓여가던 감정이 미술관에서 등에 문신을 한 채 앉아있는 팀으로 인해 터지고 만다.
이 비슷한 걸 느낀 게 영화 ‘기생충‘이었던 걸 생각하면 두 간극에서 만들어진 차이가 얼마나 쉽게 비슷한 모습으로 대체될 수 있는지 놀랍다.
굳이 좌우를 나누어 내가 어느 위치인지를 확인하고 나면 찾아오는 소소한 동질감과 그로 인해 미묘하게 대표성을 띠게 되는 소속감 비스무리한 것이 결국엔 불편함으로 향해지는 과정.
기껏 새로운 것을 맞으려 애써도 결국은 내 자리와 내 위치를 확인받고 마는 현실.
결코 쉽게 넘어갈 수도, 넘어갈 리도 없는 벽과 같은 선.
어디에나 끼우면 꼭 맞아 떨어지는 테트리스의 막대기 블럭처럼 선명한 간격만큼 그어진 선이 단지 어느 한 곳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조금 더 길었으면 어떨까 싶다가도 적절하게 보여줄 걸 다 담았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어서 읽고나면 딱 적당하게 만족스럽다.
본인 피셜 유진보다 더한 앵그리 코리안 작가가 호주인 남편에게 감사를 전하는 후기까지 더할 나위없는 마침표였다.

뒤돌아 앉아 있는 팀을 보고,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그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괴롭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게 어떻게 괴롭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괴로운데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라면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싸우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혀서 몸의 무엇도 빼앗기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의 침묵을 대답으로 삼아 그에게서 돌아서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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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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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일하다 말고 잠깐 쉴 틈에 인터넷 창을 켜면 쇼핑말고는 생각보다 할 게 없어서 네이버 메인에 있는 영화나 책 카테고리를 휙 훑고는 하는데 언젠가 이 책이 그 어딘가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중 굳이 도서관을 들르지 않고도 지하철역에서 책을 대출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을 이제야 누려보기로 하고 기쁜 마음으로 빨간색 표지와 함께 집으로 왔다.

엄마를 떠나보낸 딸이 훗날 그 모든 시간들을 추억하는 이야기, 그냥 그렇게 짧게 함축될 글인데 뭐가 더 특별할까 싶었는데 엄마의 상실은 그 자체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와닿을 수 있음을 간과했다.
누구에게나 엄마는 있으므로.

저만큼의 특별한 일상도 없었고 그만큼의 관심도 받지 못한 삼남매 중 둘째의 유년 시절에는 사실 엄마가 많이 끼어있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엄마라는 존재는 애틋함을 자꾸 불러 일으켜서 연민을 비싼 돈으로 감춘 선물로 포장해 주기도 하고 나는 받지 못한 관심을 담뿍 건네놓고는 채워지지 못한 애정결핍을 숨기곤 한다.
언젠가의 내게 이런 애정이 절실했단 걸 홀로 또 느끼면서.
그럼 또 어디선가 읽은 짧은 글이 생각나는 거다.
딸은 엄마를 영원히 짝사랑한다는.

내가 데려가지 않으면 못 볼 공연들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만나면, 또 내가 사주지 않으면 나온 줄도 모르고 지나칠 신간을 주면 티는 안 내도 사진찍어 프로필에 올리곤 하는 걸 보면, 늘 조금은 모노톤이었을 무덤덤한 엄마의 세상이 나로 인해 조금씩 확장되는 게 기쁘면서도 한편 달갑지만은 않다.
그 감정을 가진 게 나 뿐만이 아니라는 게 유일한 위안인데 그런 마음을 대번에 파고들어 정곡을 찌르는 게 이 책이었다.

역자 후기에선 이 책을 영화 ‘미나리‘의 엄마와 딸 버전으로 소개했는데 내 생각엔 이 책은 영화 ‘애자‘의 미국판 같다.
맞지 않아 늘 삐걱이는 모녀가 서로 이해하며 화해하는 과정 속에 엄마의 죽음이 깔려있단 것과, 그로 인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겪어보지 못한 상실을 현실로 체험하게 만드는 게 똑 닮아서 눈물을 찔끔 자아낸다.
물론 허구와 현실은 다르지만.

아무튼 읽고 나선 언젠가 뜬금 없이 엄마가 죽은 꿈을 꾸며 펑펑 울며 깨어났던 어린 날의 나와, 엄마에게 암일 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전해들으며 CT 판독을 기다리던 불과 한두 해 전의 내가 떠올랐다.
항상 죽음이 멀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방법은 아직 알지 못해서 나는 엄마와 죽음을 같이 두고 싶지 않다.
일상의 부재까진 받아들였지만 그 계단참 너머 들려오던 목소리를 여전히 떠올리는 나는 5년이 지나도 할머니를 보내지 못한 것 같은데 하물며 엄마를 어떻게 떠나 보낼 수 있을까.
남의 슬픈 이야기에 자꾸만 나의 무력함을 들이밀어 나에게 여전히 엄마가 있음을 위안 삼는 게 얼마나 못되고 못난 짓인지 아는데 이 책이 나에게 남긴 걸 이따위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인 걸 어찌하랴.
이 책이 모두에게 가닿는 이유 또한 다르지 않을 거라 뻔뻔하게 주장할 뿐.
이 책은 누군가에겐 놀이공원 속 회전목마 마차를, 누군가에겐 입학식 또는 졸업식에서 받은 꽃다발을, 또 누군가에겐 모자이크 쿠키를 떠올리게 할 테다.
미셸에겐 H마트와 한국이 내겐 경주와도 같다.
그렇게 이 책은 추억과 그리움으로 모두의 책이 되는 건지도.

다만 이기적인 딸은 앞으로도 엄마의 곁에서 무심히 지켜볼 밖에.
함께 있는 시간이 길다고 후회가 적진 않을 거 같다 느끼지만 적어도 내가 하는 노력이 조금은 엄마의 한숨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거라 합리화하며 머무를 밖에.
사랑받는 게 익숙지 않은 만큼 사랑을 주는 건 더 서툴러도 엄마에게 주는 건 아깝지 않으니까, 거기에 조금 더 돌려달라 투정을 섞으며 할 줄 아는 방법으로 결국 해왔던 대로 살겠지.
그렇게 조금만 더 살아야지. 그치.

그러나 엄마의 예술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동치는 사랑이었고, 노래 한 곡 책 한 권만큼이나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일,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사랑 없이는 노래도 책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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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시선 469
최백규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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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몰라서 시는 줄곧 내게 예쁜 말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신간을 뒤지며 소설 사이 얇게 끼어있는 시집을 외면하다 보면 부채감 같은 게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원색의 표지들이나 제목들이 그런 나를 타박하는 듯 금방 들러붙어 애써 떨궈내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그마저 익숙해져 으레 아무런 감흥없이 휙 스크롤을 내리곤 했다.

왜였을까.
다 읽고나서 왜 내가 이 책을 골랐던가를 떠올리려 소개 페이지를 다시 들어가보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러니까 바스락거리는 압화같은 게 걸려있을, 저 표지색의 안온함을 닮은 안락한 거실같은 걸 기대하며 책을 담았던 것 같은데 다시 보니 그 어디에도 그러한 따스함과 설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의 내 감정이 어디에서 유발되었는지를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나는 소란한 가운데 가볍게 책을 펼쳤다가 얼마 못 가 놀라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적막 속에서 다시 책장을 연 게 어젯밤 늦은 시간이었다.

김사과의 <천국에서>를 보며 꼭 다큐멘터리 같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 말은 생소한 것은 꼭 무언가 비슷한 면을 찾아야 휘발되지 않는 내 뇌의 빈곤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는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정리하자면 그 책이 다큐멘터리라면 이 시집은 실화 탐사 르포 같다.

왜 저 간결한 문장들에 나는 마음이 저려오는지, 저 쉬운 단어들이 왜 한숨만을 자아내는지, 나는 이 시들로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다만 나는 우울해지지 않았다.
우울에 지지 않으니까 더는.
동정하지 않고 온전한 슬픔을 그려내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결국 어떻게 시를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시집은 내게 그걸 알려주지 않았다.
이 시가 내게 준 건 그득한 절망 속 한 줄기 빛 같은 여름과, 깜깜한 세상 속 연약하고 아련한 사랑이 풍기는 아름다움과, 생과 사 그 사이의 시간을 채우는 기억의 소중함과,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따위의 물음 등이었는데 그래서 새와 비와 여름이, 그리고 위로 같은, 결국 전해주고 싶은 것과 전해지는 것들이 막무가내로 섞여 머릿 속에 가득해 천천히 심장까지 내려와버렸다.
시를 읽을 줄 몰라 읽은 시가 시 같지 않다.

이런 게 시라니.
이런 짧은 글로 내 시간을 뒤흔들다니.
나는 역시 시는 취향에 맞지 않다.
이렇게 속절없이 휘둘리는 일은 사양이다.
이 시가 소설이라면 나는 그 어린 소년에게 행복을 쥐어주고 해피엔딩도 만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까닭 없는 아픔 속에도 절망하지 않도록 희망을 전하는 신호들을 페이지마다 넣어 꼭 위로해줬을 텐데.
결말 없는 끝맺음이 공허하게 떠도는 게 어색하다.
그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

비를 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
미래를
사랑이라 믿는다

_‘숲‘ 중에서

-사랑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때쯤 결심한 것 같다,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시를 쓰자
아름답게 살자 남은 인생을 모두
이 천국에게 주자

_‘애프터글로우‘ 중에서

누구나 살아 있는 동안 심장 끝에서 은하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안다 늙은 항성보다 천천히 무너져가는 지구라면 사각의 무덤 속에는 더러운 시가 있을까

(중략)

이것을 혁명이자 당신들의 멸망이라 적어놓겠다 몇백억 년을 돌아서 우주가 녹아내릴 때 최초의 중력으로 짖을 수 있도록, 모두의 종교와 역사를 대표하도록

두 발이 서야 할 대지가 떠오르면 세계 너머의 하늘이 가라앉고 나는 그 영원에서 기다릴 것이다

돌아가고 싶은 세상이 있었다

_‘지구 6번째 신 대멸종‘ 중에서

우리가 그 여름에 버리고 온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아플까

_‘폐막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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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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