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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5.0
모리미 도미히코, 그의 이름으로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 바로 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이다.
일본 내에서도 야마모토슈고로상 수상에 나오키상 후보작, 일본서점대상 2위 등 수상 목록이 말해주는 작품이니 작가의 대표작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사실 이 오묘한 제목을 접한 순간부터 너무 읽고 싶어서 참느라고 애썼다.
그의 작품 이야기를 할 때는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등장시키는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너무 이 책의 얘기만 하는 듯 하지만 그만큼 강렬한 이야기인 걸)의 히구치, 하누키 씨의 얘기도 나오고 배경은 뭐 늘 같은 교토이니 이번만은 연관이 안 될 수가 없다.
두 작품 다 작가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최대한으로 드러나는데 그 찬란한 즐거움이 <다다미->쪽은 쨍한 원색 같다면 이 작품은 파스텔톤이라는 말.
그러니까 두 작품은 남자와 여자 같은, 유사하지만 양면적인 소설들이다.
요컨대 <다다미->가 엉뚱발랄, `우당탕탕` 같은 느낌이라면, <밤은 짧아->는 `사르르`거리고 `몽글몽글`하며 `퐁퐁`대는.
이미지로 치면 산들바람이나 ˝오색구름˝이 떠오르는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구성이나 내용이 강렬하기에 마니아틱하다고 여겨지는 <다다미->와는 달리 이 책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그의 작품 중에선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조금 더 사람들이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독특함으로 정평이 나있는 그의 글은 어떻게든 취향을 타는 편이기에 이 이야기 또한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것을 이해한다.)
네 개의 부제로 이루어져있는 것 또한 어떤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책의 경우 각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대로 물 흐르듯이 넘어가는 확실한 순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5권째, 내가 접한 모리미 도미히코는 환상적인 걸 가장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읽고 나면 다른 게 아닌 그 이야기들이 준 몽롱함이 남는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역시 그 몽롱함 속으로 나를 마구 안내하는데 특히 이 작품은 그 몽롱함에 `취함`을 다루고 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에서는 그 봄 술에 취해 본토초 밤길을 거닐었던 시간, `심해어들`에서는 여름날 책에 취해 헌책시장의 신을 만난 시간, `편리주의자 가라사대`에서는 가을 축제에 취해 빤쓰총반장과 코끼리 엉덩이의 사과비를 바라 본 시간, `나쁜 감기 사랑 감기`에서는 겨울 감기에 취한 채 사랑을 겪은 시간을 말하고 있다.
그 꿈결같은 1년을, 나와 그녀는 각자의 이야기로 채워간다.
(그녀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인지 그간의 검은 머리 여자들 중에선 그녀가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마지막 퍼즐이 맞춰져 하나가 된 이야기는 그저 환상적이다.
네 이야기 중 첫 번째 이야기가 가장 작품의 색을 잘 드러내고 있기에 두 번째 이야기의 초반은 다른 단편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야기 끝까지 그 색을 전혀 잃지 않고 판타지로 무장한 채 그 다채로움을 확연히 드러낸다.
<펭귄 하이웨이>가 세상의 끝을 다룬, 소년의 꿈같은 이야기라면 이 작품은 여대생의 소녀적인 감성과 술, 축제로 대변되는 대학생활의 유흥, 그리고 감기처럼 들뜨게 하는 사랑에 빠진 마음을 섞어 은은한 빛으로 꿈처럼 영롱하게 그려낸다.
보통 단편이면 물론이고, 장편 중에도 이렇게 부제별로 각각의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하나씩 밀려나는 것들이 존재한다.
한 이야기는 유독 생생히 떠오르는 반면, 다른 하나는 시간이 흘러 다시 보면 언제 읽었냐는 듯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다다미->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이 작가의 이야기에 그런 뒤쳐지는 아이는 없다.
각자의 이야기가 하나의 부제 속에 몽땅 담긴다.
각 이야기들을 요약해 관통하는 부제를 붙이는 기술과, 이야기마다 그 환상을 잊지 않고 뿌려주며 각자 다른 세계에서 뛰놀게 만드는 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정말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작가다.
이 책의 네 가지 이야기는 술, 책, 축제라는 딱 하나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엄청나게 매력적인 소재들을 다루고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공감가는 건 감기와 사랑을 엮은 마지막 겨울의 이야기이다.
감기에 걸려 열에 들뜨는 건 고통스럽지만 왠지 모르게 그 달뜬 열기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마치 사랑같이.
그 열로 인해 횡설수설 땀에 젖어 꿈속을 헤매게 되지만 달콤하리만큼 나쁘지 않다.
그리고 피로곰처럼 붙어있던,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기의 신을 떼어내는 순간의 상쾌함 또한 감기의 매력이다.
죽을 만큼 아프게 하지는 않고 딱 열꽃이 필 만큼만, 조금 귀찮기도 한데 밀려오는 감상들에 젖어 이리저리 휩쓸리고 마는, 아픈데 아픈 거 같지 않은.
가짜 전기부랑도 참 황홀한 소재이다.
진짜도 아닌 가짜라니.
거기다 마시면 혀 끝에 꽃이 피어나며 죽어도 좋을 만큼 뱃속부터 행복함이 감돌다 마침내 인생을 밑바닥부터 따스하게 만드는 술이라.
책이랑 대학 축제는 더할 나위 없고.
참 좋은 책이다.
그 환상적인 꿈 속에 나까지 흠뻑 취하게 만들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