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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4.6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읽기로 하니 뭘 읽을 지가 고민이었다.
지난 1년은 나라는 인간이 힘들 때 가장 쉽게 놓는 게 책이라는 걸 여실히 깨달아버린 시간었다.
무려 365일이 지나 배부른 돼지가 되고 나서야 난 그걸 깨닫고 창피해졌다.
그래서 다시 읽는 책에 뭔가 거창하게 의미를 두고 싶은데 읽지도 않은 책에 무슨 수로 가면을 씌우겠나.
그래서 늘 어여쁜,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꺼내든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려 한다.
44명의 신부들의 짧은 감상을 남긴 ‘웨딩드레스 44‘, 도쿄에서 소울메이트인 친구에게 전화를 건 ‘효진‘, 밴드에서 키보드를 치는 역사학도의 논문 주제가 될 뻔했던 ‘알다시피, 은열‘, 운명의 남편을 찾아준다는 비밀의 책이 담긴 ‘옥상에서 만나요‘, 갑작스레 죽어버린 언니로부터 시작된 돌연사맵 ‘보늬‘, 서울시때문에 한날 아침에 오늘에 멈춰버린 ‘영원히 77사이즈‘, 이스마일의 한국 생활기 ‘해피 쿠키 이어‘, 이혼하게 된 여자와 친구들의 이야기 ‘이혼세일‘, 두 국가의 전쟁 그 사이에 낀 ‘이마와 모래‘.
소설집은 9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수없이 말했지만 아직도 난 단편집이 싫다.
그러므로 내가 읽는 단편집은 너무 유명해서 도저히 지나칠 수 없거나 너무 좋아하는 작가라서 읽지 않고는 못 배기거나 둘 중의 하나다.
정세랑은 이미 많이 유명해졌지만 물론 내겐 후자에 속한다.
‘피프티 피플‘이 제법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보건교사 안은영‘은 넷플릭스를 통해 드라마화될 예정이다.
키운 것도 아니면서 웃기게도 성장 과정을 보며 흐뭇해하고 있다.
이 책 역시도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작가로서 유명세를 떨치는 것도 그렇지만 그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나날이 다듬어지는 이야기들이 만족감을 준다.
그래, 첫인상이 틀리지 않았어 하며.
단편이다 보니 남는 문장이나 크게 각인된 장면은 없지만 그냥 굵직한 이미지들이 잔상처럼 맴돈다.
절망을 먹고 옥상에 머무르게 된 남편이나 유토피아처럼 달게만 그려지는 은열의 섬이나 이재가 달려와 건네준 누름돌 같은 게 슬며시 미소짓게 만든다.
뭔가 전체적으론 비슷한 느낌이긴 한데 각각의 색은 전혀 다르다.
이 책을 포함해 정세랑의 작품들은 대부분 연한 채도를 띠고 있는데 놓고 보면 그게 또 어찌나 다채로운지.
‘이만큼 가까이‘부터 여전히 참 군더더기없이 따사롭다.
잊고 지내다보면 문득 그리워지는 그런 아늑함이 있다.
그저 책을 읽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뿐인데 어느 틈에 위로를 손에 쥐고 있다.
언제 어디서 내민지도 모르게 아무 상관도 없는 위로가 슬며시 고개를 치든 우울과 분노를 살금살금 깎아주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신간을 기다리게 만드는 작가다.
마지막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스스로 선택했지만 나조차 알 수 없다는 게 말이 안되긴 하지만 정말 나도 그때가 마지막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 보니 마지막 글을 올린 게 작년 5월 13일이었다.
그로부터 열흘 뒤부터 어제까지 적응될 만하면 날로 높아지는 난이도에 허덕이며 1년하고 보름 정도를 지나왔다.
올해 들어서는 그 흔한 계획도 없었다.
너무 힘든데 또 그게 적응이 된 듯도 하고, 안정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묘하게 가까워진 듯도 한 그런 나날들.
그 속에서 나는 겨우 새로운 이야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1년의 단절로 인해 어휘는 바닥을 치고, 연관은 없겠지만 매일 하는 말들의 발음도 자꾸 엉키게 되고.
그것도 그렇지만 그냥 다시 무언가가 읽고 싶었다.
보여지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캐내야만 하는 재미.
도서관은 멀어졌고, 검증되지 않은 책을 무턱대고 사기엔 방이 좁고, 전자책에 눈을 돌려도 봤지만 망할 안구건조 때문에 이북리더기를 사야하나 싶고.
아직 어떻게 책을 읽을 지 정하진 못한 채로 자석처럼 이끌리는 서점에서 한 두 권씩,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사면서 인터넷으로 또 한 두 권씩 모은 책만도 거의 열 권은 되겠다.
그조차도 방치한 지가 벌써 두 달이라 일단은 그것부터 읽기로 했다.
운동을 시작하면 도서관까지 걸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 지도 모르지.
혹은 앉을 자리를 포기하고 지하철 환승역을 한 개 땡겨서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될 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좋겠다.
역시 난 내 일이라도 알 수가 없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