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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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무얼 기대했는지는 이미 잊었지만 기대하던 책이었다.
짧게 감상만 쓰면 그 느낌만 남을 뿐 책의 알맹이는 다 날아가버렸구나 뒤늦게 깨닫고선 길게, 최대한의 글을 남기자 생각했었다.
단순히 무슨 책들을 얼마큼 읽었는지에 더해 더 이상 좋았다, 나빴다로만 책을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 이야기가 없는 책이다.
은연 중에 학교 앞의 추억 속 문구점 같은 느낌을 바랬는 지도 모른다.
웹툰 <미스 문방구 매니저>같은 유쾌함까진 아니어도 <타마짱의 심부름 서비스> 정도의 소소하면서도 정감가는 이야기를 원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가마쿠라의 츠바키 문구점에서 선대인 할머니에 이어 대필업을 하는 포포의 이야기.
대필을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의 사연과 편지 내용이 에피소드처럼 풀려나오고 그 사이에 포포와 할머니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여름부터 시작해 이어지는 사계 동안 전체적으로 아주 조용하고 잔잔한 일상들이 책을 채운다.
가업을 물려받게 하려고 어린 포포에게 강압적인 교육을 시킨 할머니에게 점차 반감을 품게 된 포포는 결국 엇나가면서 집을 나가 외국을 떠돌게 된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 다시 돌아온 츠바키 문구점에서 할머니의 자취를 쫓으며 포포는 홀로 마음을 정리한다.
대필업이라는 소재 자체도 그리 와닿지 않고 인물들의 감정 역시 밋밋한 이야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다.
대필로 지어낸 편지의 내용들도 썩 잘 쓴 것 같지 않고, 갑자기 모두 친구가 되어버리는 사람들과 뜬금없는 러브라인은 완전한 자기들만의 세계로 이야기를 끌고 가 버린다.
마지막에 덧붙여진 포포의 손편지들과 중간중간 대필을 위해 편지지와 펜, 우표 등을 고르는 장면들이 그나마 제일 마음에 든다.
나는 이 책에서 그들에게 전혀 동화되지 못하면서 끼어들 틈만 호시탐탐 노리다 끝끝내 홀로 남겨지고야 말았다.
때론 잊히는 게 나은 책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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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기억된 남자
크리스티나 매케나 지음, 여상훈 옮김 / 들녘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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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4.4
때때로 내가 하는 선택들에 대해 자문할 때가 있다.
나는 왜 그런 일을 겪었고 어떻게 지금까지 왔는지 이유를 묻는 날이 있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내 잘못된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를 이렇게 만든 것들이 사실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면 어떨까.
내가 나에 대해 아는 것들이 전부 잘못된 기억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올해 마흔한 살이 된 제이미 매클룬은 10개월 전 세상을 떠난 믹 아저씨를 그리워하며 늘 그렇듯 농장을 돌본다.
그의 정수리에는 이미 오래 전 탈모가 진행되어 한 줌의 갈색머리만이 놓여있고 오른쪽 눈에서 턱까지 그여진 흉터는 그의 인상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앨리스 아주머니, 그리고 믹 아저씨마저 사라지고 방치된 집안은 온통 잿투성이로 뒤덮여 폐허가 되었고, 그저 죽지 않기 위해 먹는 음식과 신경 안정제만이 제이미가 집 안에서 유일하게 손대는 것이다.
자신을 악몽 같은 수녀원에서 입양해 준 두 분이 떠나고 허전함과 공허함을 달래려 그는 알코올에 의존했고 브루스터 박사를 찾아 가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던 친구 패디와 로즈 부부는 제이미에게 신문 구인을 통해 여자를 만나보라는 제안을 한다.
제이미는 신문을 찾고 브루스터가 권유한 다이어트까지 하기로 결심하며 새로운 삶을 기대하기 시작한다.

교사인 리디아 디바인은 목사이던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인 엘리자베스와 함께 살고 있다.
강압적으로 모든 일에 규제를 하던 보수적인 아빠 때문에 남자친구는 상상조차 못했고, 품위와 교양 같은 말들로 가득 찬 일상에서 드디어 빠져나온 리디아는 아침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엄마와 티격대며 지내고 있다.
마흔이 되어 조금씩 일탈을 꿈꾸는 그녀에게 청첩장이 날아오고, 더 이상 엄마와 결혼식을 가지 않겠다 말하는 리디아에게 친구 대프니는 신문에 짝을 찾는 광고를 실어보라 조언한다.
그렇게 엄마 몰래 광고를 실은 리디아는 세 통의 편지를 받아 그 중 괜찮아 보이는 상대에게 답장을 보내고 회신을 통해 만날 약속까지 잡게 된다.
대프니와 약속 장소에 나간 리디아는 61살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이는 상대의 외모에 깜짝 놀라 자신이 리디아가 아닌 척 부인하며 여자 화장실 창문을 통해 탈출해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농부라고 소개한 편지에 답장을 보낸다.

제이미는 답장을 받고 또 다시 로즈에게 달려 가 대필을 부탁해 그녀가 써준 대로 편지지에 옮긴다.
책은 하나도 읽지 않지만 패디가 갖고 있는 카우보이 소설 제목을 빌려 쓰고, 요리에 관한 질문에 로즈의 번 레시피를 넘겨 받으며 자신이 잘하는 요리라고 써서 보낸다.
그리고 숱이 없는 머리를 가리기 위한 가발을 주문하며 브루스터가 권유했던 휴가를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자신이 가진 가장 깔끔한 옷인 믹 아저씨의 정장을 구겨 입고 우스꽝스러운 뾰족 구두를 신은 제이미는 테일러스타운의 해변가 게스트하우스로 무작정 찾아 간다.
리디아의 이모인 글래디스는 누가 봐도 허름한 농부 차림새의 제이미를 쫓으려 하고, 마침 엄마와 함께 이모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은 리디아는 그를 보며 연민을 느낀다.
브루스터의 추천으로 왔다는 말에 제이미를 안으로 들인 글래디스는 몇 배의 요금을 부르고 제이미는 믹 아저씨가 남긴 예금에서 암컷 양 한 마리 값의 숙박비를 치르며 겨우 게스트하우스에 묵는다.
밤이 되어 리디아는 이모의 조언대로 조금 짧은 치마와 화려한 블라우스를 걸치고 해변가를 구경하다 우연히 점을 보게 되고, 점술가에게 한 남성이 운명에 보인다는 소리를 듣는다.
연회장에서 창피를 당하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밤의 해변을 거닐던 제이미와 마주친 리디아는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 둘은 그렇게 스쳐간다.
짧은 휴가를 마친 일상에서 리디아와 제이미는 만나기로 하고 약속을 잡는다.

로맨스처럼 가장한 둘의 만남을 표면 상 내보이지만 이 글이 쓰여진 이유는 바로 제이미가 있던 수녀원의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86번으로 지칭되는, 제이미로 보여지는 그 아이의 처참한 일과가 계속해서 그의 미래와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너는 쇼핑백에 담겨 버려졌고 너와 같이 있던 누이는 죽었다며 그건 모두 네가 나쁜 아이이기 때문이고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제이미, 86번은 수녀들에게 늘 들으며 자랐다.
석판을 손에서 놓치거나 이불에 실수를 하는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없이 가해지는 폭력에 아이들은 친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익숙해져있다.
어류의 간에서 나오는 지방유라는 간유를 매일 먹고 잦은 실수들로 인해 매일 혼나며 밤에는 성폭력까지 가해지는 일상, 페얼리 가문의 농장일을 도우러 수녀원을 떠났어도 고통은 아이에게서 떨어지는 법이 없고 결국 도망친 그에게 깨진 그릇으로 얼굴의 흉터를 남긴다.
다시 돌아온 수녀원에서 농부라는 한 부부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들기까지 꼬박 10년을 86번 제이미는 자신을 버린 엄마와 멀리 떠난 누이를 그리워 하며 견뎌냈다.

어째 이어질 듯하면서 이어지지 않고 잘 될 것 같으면서 느낌이 묘하더라니 결말을 막장 드라마로 만들지 않기 위한 노림수였다.
차마 상상도 못했던 결말은 리디아와 제이미의 만남 이후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빠르게 모든 것을 정리한다.
각자에게 필요했던 게 무엇인지 서로가 몰랐음에도 그걸 정확히 채워주는 결말인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다시 삶에 적응하면서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는 제이미의 마지막 모습이 아련하다.
인정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아픔이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말하는 제이미가 너무도 안쓰러워서 그대로 끝나버리는 게 싫어졌다.
행복한 순간 하나 쥐지 못하고 겨우 빛 하나 드디어 마주하게 된 때에 그만하면 됐다고 끝나버리는 이야기, 철저하게 이용당한 삶이 되어버린 듯해 더 마음이 쓰인다.
내내 해피엔딩이 아니면 어쩌나 마음 졸였다.

the misremembered man, 잘못 기억된 남자.
제목과 표지만으론 그리 흥미가 생기지 않았는데 뒷장의 소개글이 인상 깊었다.
이 이야기는 밝혀지지 않은 깊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거짓말이다 라는 말과 함께 ‘사십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여전히 비닐 봉투에 담겨 돌계단에 버려진 아이다’ 라는 문장이 눈에 밟혔다.
다 읽고 난 지금도 모든 게 마주치는 마지막 페이지와 함께 저 문장이 아린다.
어릴 적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던 날, 혹은 대학생 때 <도가니>를 읽던 순간의 감정이 아마 지금의 먹먹함과 닮아 있지 않았을까.
결코 가볍게 읽어선 안 될, 감당하지 못할 만큼 쓰디 쓴 이야기.

살며, 노래하고, 춤추고, 연주하고 싶었다. 빛나는,
소중한,
신이 주신,
사랑이 이끄는,
릴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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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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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작년 여름 서점에서 읽다 만 책이었는데 그 뒤로 손이 안 갔다.
워낙 단편을 싫어하기도 하고 그즈음 서점에 놓인 베스트셀러들은 거의 다 비슷비슷하게만 느껴져서 하나로 뭉뚱그려 저 멀리 치워버렸었다.
이제 와 다시 집어든 이유는 변덕스러운 성격과 빌릴 책이 없던 것, 그리고 김애란이기 때문이었다.

‘입동’,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까지 총 7개의 짧은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이다.
첫 이야기 ‘입동’이 다시 읽어도 참 좋았다.
아이를 잃고 난 후 집의 도배를 새로 하는 이야기, 단순히 보면 입춘이 되어야 할 제목이 입동이라니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전에 ‘노찬성과 에반’까지 읽었던 것 같은데 쭉 이어서 모든 이야기를 읽고 나니 그때보다 더 정리가 안 되는 기분이다.
‘풍경의 쓸모’,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두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약한 인상을 남겼다.
단편은 꼭 이야기들끼리 경쟁을 붙여놓은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 이야기들이 한 데 묶인 이유를 모르는 나는 자연스럽게 별로였던 이야기를 꼽고, 그렇게 비교하고 나면 왜 좋았는지 혹은 왜 나빴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게 된다.
그러니까 단편은 나와 안 맞는다는 걸 또 다시 읽으면서 느끼고 만다.

무언가를 잃는 이야기들, 상실이 키워드일까 싶었다.
그런데 단순히 잃는다고 보기엔 거기서 끝나는 이야기는 ‘노찬성과 에반’, ‘가리는 손’ 정도이고 나머지는 약간이나마 그 뒷 이야기가 덧붙여 있다.
상실이 주된 소재인 건 분명해보이지만 그것만은 아니기에 이야기가 묶인 이유와 제목의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다.
정말 단순히 바깥은 여름인데 안은 그렇지 않다는 걸까.

제목 표지는 좋았는데 단편집이라고 써져 있지 않은 것도 읽다 만 이유 중 하나였다.
하나의 이야기인 줄 알고 기대에 차 읽었는데 단편인 걸 안 후의 허무함이 컸다.
김애란 작가의 책은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 두 번째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책이 주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영화도 챙겨봤었다.
그리고 아마도 학생 때 독후감 이후로 처음 쓴 감상문이 그 책의 것이었다.
무엇 하나 다루기 쉬운 게 없는 이야기인데도 너무 쉽게 흘러간다고 썼었다.
그에는 못 미치지만 ‘침묵의 미래’에서 비슷한 무언가를 찾은 것도 같다.
혹 기대하지 않더라도 언제고 찾아 읽을 수 있는 작가였으면 좋겠다.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이다. 나는 커다란 눈이자 입,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 안개처럼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각각의 입자로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 나는 어떤 불빛이 가물대며 버티다 훅 꺼지는 순간 발하는 힘이다. 동물의 사체나 음식이 부패할 때 생기는 자발적 열이다.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어디 살까.


나는 구름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분방해 시시각각 어디로든 이동한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것과 쉽게 결합한다. 다른 영과 만나 몸을 섞는다. 몸을 불려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그늘로 단어에 수의를 입힌다. 나는 시원이자 결말, 미지이자 지,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노래다. 나는 이렇게밖에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부족의 몇몇 문법을 빌려 말한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뚜렷한 얼굴이나 몸통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


나는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났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를 그 낱말을 좋아했다. 나는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단수이자 복수,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노래다.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내 몸은 점점 붇고 이름 또한 길어져, 긴 시간이 흐른 뒤 누구도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무엇이 됐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이 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동력, 쓸모 있는 죽음, 단지 그뿐인 채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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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03-03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해요. 추천 마법사를 훑을 때도 표지에 소설집이라고 적혀있으면 일단은 건너 뜁니다. 친한 지인은 단편은 이야기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자신이 상상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는 맞아 정말 그러네 싶었는데 워낙 우울한 단편이 많다보니 앞부분과 뒷부분을 내 상상에 맡기면 정말 가슴 아파서 못 보겠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ㅠㅠ

2018-03-03 01:56   좋아요 1 | URL
그쵸.. 단편은 특성 상 우울하기도 하고 감정을 짧고 깊게 건드리는 내용이 많은 것 같긴 해요. 개인적으론 장편 또한 죽음 같은 결말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서 유독 단편이 그렇다는 생각은 못해본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확실히 단편이 더 상상의 여지를 많이 주긴 하는군요! 생각의 전환이네요!
 
여덟 개의 산
파올로 코녜티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4.4
주인공 피에트로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외삼촌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피에트로와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유랑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 휴일이면 산을 찾아 떠나는 아버지로 인해 가족들은 밀라노에 집을 둔 채로 유령 마을 같은 그라나에 정착한다.
친척들과 연을 끊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인해 부모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자란 어린 피에트로는 그라나에서 또래인 브루노와 마주치게 된다.
자신보다 몇 달 형인 브루노가 궁금하면서도 친해질 필요가 없다 생각했던 피에트로였지만 고립된 곳에 단 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둘은 가까워진다.
모든 사람들과 적이 되는 아버지의 성격을 달래는 역할을 하는 어머니는 불쌍한 아이들을 그냥 보지 못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브루노에게 공부를 가르치게 되고, 브루노는 점차 가족처럼 스며든다.
아버지, 브루노와 함께 셋이 산을 올라 더 부자 지간처럼 느껴지는 브루노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하고, 브루노를 다시 데려 가려 브루노의 아버지가 아버지를 폭행하는 장면 같은 것들을 보면서 피에트로는 자라났고 마침내 아버지와 산에 오르는 일을 거부하며 소년 시절을 스스로 끝낸다.

그라나와 밀라노를 오가며 학창 시절을 보낸 피에트로는 그라나를 떠나 도시로 가고, 아버지를 따라 벽돌공의 일을 하던 브루노는 그라나의 삼촌의 방목장에 계속 머물면서 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긴다.
한참만에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다시 돌아온 그라나에서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채로 피에트로와 브루노는 다시 만난다.
아버지가 아무도 모르게 자신에게 남긴 유산을 소개하는 브루노를 보며 피에트로는 자신이 잊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조금씩 떠올리고 혼자만의 화해를 시작한다.

읽으면서 ‘여덟 개의 산’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줄곧 궁금했었다.
아버지와의 갈등이랄까 의견 차이는 사실 소년 시절 아버지를 묘사하는 부분이나 산에 오르고 싶지 않은 마음 같은 걸로 간접적으로만 표현될 뿐 그렇게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감정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마침내 마음 속으로만 품고 있던 반항을 끄집어 내어 표현한 이후 다음 장, 아버지의 첫 등장은 죽음이었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진행되는 다음 이야기부터 기억 속에서만 나타나는 아버지는 때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늘 똑같은 이미지였는데 브루노가 바로 그 부분을 깨트려주는 역할을 한다.
권위적이고 완고한 아버지가 아닌 산에서 언제나 뒤를 돌아보며 나를 걱정하던 아버지의 모습 또한 존재했음을 브루노는 아버지가 직접 설계한 집을 만들면서 피에트로에게 일깨워준다.
후반부의 이야기는 라라의 존재로 인해 조금 미묘하게 틀어지지만 어쨌든 브루노와의 우정을 주제로 하면서 아버지와 외삼촌 피에로의 모습과 둘을 겹쳐 보이게 만든다.

검은 선, 빨간 선, 초록 선, 아버지와 아들, 그 사이를 비집고 존재하는 아들 같은 친구, 셋의 관계가 산에서 크레바스를 건너는 장면을 통해 가장 잘 보여진 것 같다.
결국 그 크레바스를 통해 피에트로가 느낀 감정과 그 날 자신이 지켜보았던 아버지와 브루노의 모습이 이 책의 주제라고 느껴진다.
벽돌공과 학생으로 만난 브루노와 피에트로 사이의 거리와 아무도 모르게 서로 눈을 마주치며 턱을 끄덕이고 손가락을 드는 장면 또한 지나고 보면 기억에 남는다.
얇은 책이라 금방 읽기도 했지만 그만큼 큰 사건이나 메시지 같은 것 없이 고요하게만 흘러가는 책이다.
사실 라라가 등장하면서 결말까지의 전개는 굳이 필요한가 싶을 만큼 잘 맞지 않아 보인다.
후반부에서 이야기는 브루노에게 가까이 가 그를 아버지로 만들었다가 실패를 쥐어주면서 다시 슥 멀어진다.
피에트로가 네팔에서 히말라야를 등반하고 여러 경험을 할 동안 듬직하고 꼿꼿하게 서있던 브루노는 그라나에서 한 발도 떼지 않은 채로 점점 무너져내린다.
다시 가까이 다가갔을 때 브루노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둘의 친밀도를 통해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다.
그리고 황급히 떠난 피에트로가 큰 폭설 이후 자신들의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더 이상 브루노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의 주인공이 피에트로가 아닌 브루노라면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브루노의 마음은 피에트로보다 더 두꺼운 페이지를 만들어낼 만큼 많이 복잡했을 것 같다.

정말 단순한 이야기다.
아버지, 피에트로, 브루노를 중심으로 그라나와 아버지의 유산이자 둘의 아지트인 바르마가 배경의 전부인데 <여덟 개의 산>이라는 제목의 정체는 뜬금없이 네팔에서 등장한다.
세상에 가장 높은 산이라는 메루산과 메루산을 둘러싸고 있는 여덟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의 모습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말이 갑자기 등장하고 그것이 제목이 된 이유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공개된다.
그러니까 마지막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제목이 된다.
별다른 내용이 없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곱씹을수록 묘하게 슬퍼지는 책이다.
전혀 가깝게 묘사되지 않지만 단 하나 뿐인 친구, 두 명의 아버지, 몰입해서 감정 이입이 될 만큼도 아니고 모르겠는 부분도 있는데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갔던 이야기가 생각할수록 더 쓸쓸하게만 느껴진다.
떠올려 보니, 그렇게 연결해서 보니 읽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이야기가 남긴 걸 그래도 겨우 주운 것 같다.

아버지를 따라 산을 타던 것을 그만둔 지 한참이 지나서야, 어떤 인생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산이 존재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나와 그의 인생에서 정중앙에 있는 산, 우리의 인생이 시작된 처음으로는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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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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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허름한 동네에서 홀로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는 명정은 어느 날 외국어가 쓰인 정체불명의 택배 하나를 받는다.
송장에 적힌 이름이 8개월 전 비행기 사고로 행방불명된 외아들의 것임을 알게 된 명정은 복잡한 마음으로 상자를 열고, 그 속에 시체처럼 웅크리고 있는 로봇을 보게 된다.
무료 드라이클리닝을 조건으로 이웃인 세주를 불러 회사에 전화해 본 결과, 로봇의 출처는 아들이 직원으로 있었던 바이오 산업 관련 회사이며 직원 혜택으로 신청 시 돈을 내고 제품 샘플을 가질 수 있게 해줬는데 아마 그게 도착한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곧 회사는 문 닫게 될 지 모르니 샘플의 보증은 해줄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세주에게 평생 무료 드라이클리닝을 제공하며 한국어로 된 두툼한 제품 설명서까지 갖게 된 명정은 열일곱쯤 되어보이는 소년형 로봇이 꼭 아들과 겹쳐보여 오래 전 둘째가 생긴다면 형과 돌림자를 넣어 짓고자 했었던 잊혀진 이름을 로봇에게 주고 만다.
그렇게 은결은 명정과 함께 세탁소에서 지내게 된다.

시호와 준교 같은 초등학생들의 스타가 된 은결은 그들이 하는 말에도 회로를 가동하며 단어의 변화형에 대해 고민해야 할 만큼 미숙하고, 명정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물론 조용한 일상에 끼어든 말하는 기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sns와 방송의 집중도 잠시, 점차 사그라드는 관심에 익숙해지고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은결은 명정을 따라 세탁소 일을 도우며 그의 일상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알고 표정과 말이 뜻하는 바를 관찰하며 은결은 세탁소라는 좁은 공간 속에서 자라난다.
시호와 준교가 교복을 입고 사춘기를 맞으며 커 가는 순간에도 은결은 변하지 않지만 성장해간다.
세탁소의 손님들을 통해 사람과 삶과 죽음, 그 속의 무수한 인과와 관계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바라볼 뿐인 은결에게 명정은 언제 어디든 원할 때는 가도 좋으니 전원이 꺼지기 전 돌아오라고 말한다.
늙고 병들어 죽는 과정 속에서 홀로 변하지 않는 은결은 주변의 변화를 모두 인식하며 그것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스스로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하게 된 은결은 변함 없는 일상 속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하며 무너짐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은결은 로봇의 그것을 벗어난 충동과 한 스푼의 세제로 드디어 변해지고 만다.

찬찬히 곱씹고 싶은 책이다.
삶을 나직하게 그려내는 대사들은 쿵하고 와닿지는 않아도 계속해서 잔잔하게 울린다.
불가능한 설정이라는 걸 아는데도 시호의 원피스 주머니 속 씨앗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휴머니즘 드라마가 따로 있나 이런 게 휴머니즘이고 드라마지 하는 감상이 흘러나온다.
몽글몽글, 빨래 냄새 같은 기분 좋은 포근함이 배여있는 이야기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도 마음에 든다.
따뜻한 동화 같아, 좋다.


혈연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잘라내는 도구는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무슨 수로 인간은 그 다양한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말 한 마디를 골라 건넬까. 눈앞의 사람이 아픈지 슬픈지 분하거나 억울한지 또 달리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마이크로 단위의 시간 동안 확정하고 가장 그럴듯한 조치를 취할까. 어쩌면 사람이 그때 그 순간에 가장 적절하게 반응한다는 것도 확률의 문제일 뿐, 실은 그들이 내놓는 모든 결론과 행위 또한 매 순간 몇 제타바이트에 이르는 오해를 동반하는 게 아닐까.

데어버리도록 뜨겁고 질척거리며 비릿한 데다,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도 어느 결에 손 쉽게 부서져버리는 그 무엇.

“괜찮아. 형태가 있는 건 더러워지게 마련이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지우고 또 지웁니다. 어차피 다시 졸릴 테니 잠자리에 들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처럼요.”

“무엇보다도 나는 꿈을 꿀 줄 아는 사람과 인생을 함께하고 싶어.”
은결은 사람이 말하는 꿈에 크게 두 가지 다른 뜻이 있음을 안다. 그녀의 입에서 터지는 겹자음의 경음은 푸른 멍이 든 자리에 붙인 반창고 같다.
“잠들어 꿈을 꾸고 거기서 깨어날 줄 아는 사람, 꿈을 그리거나 그렸던 적 있는 사람과 살아갈 거야. 깨어난 뒤 남아있는 것이 악몽뿐이라도 상관없고, 깨어져 형태를 잃은 꿈의 파편을 쓸어담으면서 살아갈 뿐이라도 괜찮아. 거기에 뭉개고 뒹굴지만 않는다면, 손대지 않으면 적어도 베이지는 않을 테니까.”

이제 와 하나 마나 한 생각이지만 처음부터 이름을 붙여선 안 되는 거였다. 그 이름은 언제까지고 펼칠 일이 없는 종이 속에 접어두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름을 붙여준 것을 떠나보내는 방법에 아직도 익숙지 않다.

이해 불가능한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구전을 통해 허황되게 부풀려지는 것들. 존재의 진실성 여부가 그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수긍과 인정에 달려있는 것들. 잊어버린 채 방기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노크해 오거나 부지불식간에 덜미를 잡아채는 것들. 실체를 확인하고 분석하기 위해 과감히 렌즈를 들이대면 사라지는 것들. 그래서 때로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되곤 하는 것들.
그러므로 존재하기를 그만둘 게 아니라면, 차라리 이해하기를 멈춰야 옳은 것들. 은결은 그 가운데 하나의 모습으로 그의 곁에 머물러왔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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