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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4.7
10년 전 영어 학원 동료들과 함께 갔던 구라마 진화제에서 하세가와가 실종되었다.
이후 각자의 삶을 살던 5명은 오하시의 제안으로 10년 만에 구라마 진화제에 다시 오게 된다.
하세가와처럼 보이는 여성을 쫓다가 발견한 야나기 화랑에서 오하시는 기시다 미치오의 동판화 시리즈인 야행을 접하게 된다.
숙소로 돌아와 모두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자 하나 둘 기시다의 그림 야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기시다 미치오의 ‘야행’이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각자의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여행 한 번 없이 각 도시의 그림을 그려낸 화가 기시다는 10년 전 야행 시리즈를 구상했고 해가 뜨면 잠에 들어 해가 지면 깨는 생활을 지속하며 2년 반 만에 48개의 작품을 완성하고 7년 전 의문의 죽음을 맞이 했다.
공통적으로 밤 속에 얼굴 없는 여성이 그려져있는 야행과 반대로 한 번 뿐인 아침을 그려냈다는 서광 시리즈가 존재한다고 알려졌지만 누구도 그 그림을 본 적 없다.
5년 전 오노미치에 가출한 아내를 찾으러 갔다가 야행-오노미치를 보았던 나카이는 아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여자를 마주하고 기묘한 일을 겪은 채 아내와 함께 돌아온다.
다케다는 4년 전 직장 동료 마스다와 그의 여자친구 미야, 미야의 동생 루리와 함께 여행을 갔다 야행-오쿠히다를 보고 그려진 여자가 미야를 닮았다 생각한다.
우연히 자신들의 차에 타게 된 미시마라는 여성에게 네 명 중 두 명에게 죽을 운명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며칠 뒤 숙소에서 두 명이 사라진다.
3년 전 후지무라는 남편과 후배 고지마와 함께 아오모리로 향하는 침대 열차를 타고 야행을 하게 되고 일전에 보았던 야행-쓰지마 그림과 똑같은 집을 발견한다.
고지마는 그 집에서 사라졌고 남편과 둘만 남게 된 후지무라에게 불에 탄 집과 오래 전 자신의 친구였던 가나 짱이 고지마와 함께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기시다 미치오와 친분이 있던 다나베는 2년 전 우연히 탄 열차에서 한 스님과 여고생을 만난다.
야행-덴류쿄 그림을 가지고 있던 스님은 알고 보니 기시다의 집에서 알게 되었던 사에키였고 사이가 좋지 않던 둘에게 여고생은 기시다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나베는 기시다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들어 둔 암실에서 자신은 벗어나지 못했고 여고생은 기시다의 그림 속 귀신임을 깨닫는다.
각자의 이야기가 끝나고 모두가 함께 구라마 진화제를 보러 나가게 되고 오하시는 불쑥 혼자 남겨진다.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다들 어디에 있는지 묻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오하시라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같이 10년 전 실종사건 이후 구라마 진화제를 보러 모인 적이 없다 말한다.
가까이 있던 나카이가 오하시를 불러 둘은 만나게 되고 나카이는 오하시에게 10년 전 실종된 것이 다름 아닌 오하시였다며 지금껏 뭘했느냐 묻는다.
오하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말하며 방금 전까지 모두가 함께 있었다 주장하고, 믿지 않는 나카이에게 그가 들려 준 오노미치 이야기를 꺼내며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기시다의 그림을 보러 야나기 화랑으로 가자 한다.
야나기 화랑에 걸려 있는 그림은 이전 자신이 보았던 야행-구라마가 아닌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서광’이었다.
7년 전 죽었다는 기시다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어 야나기에게 부탁해 기시다를 만나러 간 오하시와 나카이는 뜻밖에 기시다의 부인이 된 하세가와를 만나게 되고 오하시의 이야기를 기시다 부부에게 털어놓는다.
모든 이야기를 끝낸 오하시는 서광-구라마 그림이 변하면서 자신이 그 공간에서 벗어남을 홀로 눈치채게 되고 단 하루 뿐인 아침이라는 서광과 야행의 비밀을 알게 된다.
<꿀벌과 천둥>과 함께 참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서관에 들어와 기뻤는데 계속해서 빌려가버리는 바람에 몇 달째 구경도 하지 못했었다.
책을 사는 게 빠르겠다 싶어 포기하려던 때에 겨우 만나서 정말 좋았다.
비록 누군가가 험하게 보는 바람에 책장을 울게 만들고 자국을 남겨서 화가 났지만 내용만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간 모리미 도미히코의 기담 중 단연 정점을 찍은 책인 것 같다.
<추상오단장>이 생각나기도 하는 각자의 이야기들이 야행이라는 그림으로 묶여 점차 비밀을 토해내고 마침내 이름만 나오던 서광이 등장하며 모든 것이 밝혀지는 이야기.
완전한 맺음은 아니지만 성급하지 않도록 마무리를 짓는 게 오히려 단단히 이야기를 틀어 막아준다.
밤의 어둠 속에서 야행하고 있는 이들에게 아침의 존재를 상기시키면서도 아침이 올리 없다는 듯 더 깊은 밤으로 이끌어간다.
밤은 너무도 깜깜해서 무엇이 다가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고 밤 아래서만 수놓아지는 불빛들이 낮과는 전혀 다른 기이한 황홀경을 선사해 어디로든 데려간다.
어둠의 장막 속에서 조금씩 적응해가며 실컷 떠돌아다니도록 두고선 사실은 두 세계는 종이의 양면처럼 같지만 전혀 다르고 뒤집히지 않는 이상 결코 만날 수 없음을 알린다.
그리하여 밤은 곧 세계이고 세계는 언제나 밤이라는 말을 남긴다.
생각보다 길지 않은 이야기라 아쉬웠지만 딱 적당한 곳에서 마무리되어 깔끔하게 느껴진다.
이제까지의 모리미 도미히코의 작품 중 대중적인 작품이라면 <펭귄 하이웨이>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꼽았을 텐데 미스터리 분야에서만은 이 책이 가장 대중적이다.
기담이라는 면에서 갈릴 수는 있겠지만 특유의 문체 같은 걸림돌이 전혀 없어 작가의 이름을 떠나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이야기다.
책을 읽는 도중 빛을 따라가던 이가 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밤 속으로 영영 떠나버린 사람이 사무치는 밤이었고 그 모든 걸 담게 된 책이 <야행>이었다.
어두운 밤 속에서 아름다운 빛만 따라가며 부디 모든 걸 잊고 행복하길 감히 바라본다.
세계는 언제나 밤이니까 그 밤길에 편히 머무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