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도시에 갑자기 눈이 머는 전염병이 번진다. 전염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고 빠르다. 그러나 눈이 머는 원인은 알 수 없고, 처음으로 눈이 먼 사람이 어떤 경로로 눈이 멀게 된 것이지도 알 수 없다. 최초로 눈이 먼 사람과 한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이것이 전염병 임을 인지한 정부는 눈이 먼 사람들과 함께 그들과 접촉한 보균자들을 격리시키기에 이른다. 강한 전염성으로 인해 수용소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도와줄 어떤 인력도 없으며, 수용시설인 폐건물은 눈이 멀지 않고서야 도저히 살아 갈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다치거나 병이 들어도 약을 구할 수 없으며,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씻을 수도, 용변을 처리할 수도 없다. 하루 세번 정문에 두고가는 식사 또한 밖의 상황에 따라 점차로 불규칙해졌고, 그나마도 수용되는 인원이 많아짐으로써 공평하게 분배되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끼리 수용된 그곳에서는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다. '한밤중에 예절을 지키는 것이, 누군가 돼지들이라고 말한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137쪽)

이러한 상태를 두 눈으로 보고, 느끼고, 괴로워하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눈이 멀지 않은 유일한 사람으로, 이후 도시 전체가 눈이 보이지 않게되는 상황에서 그녀는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비참한 광경들을 목격하며 차라리 자신의 눈도 멀어버렸으면 하고 바라지만, 비관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때로는 할 수 없는 일도 감내하며 눈 먼 사람들과 함께 살기위해 발버둥친다.

 

도시 전체가 눈이 머는 대재앙은 인간의 악행을 더이상 참지못해 물의 심판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고자 했던 노아의 방주 시대에 있었던 창조주의 대심판 같기도 하고, 세계질서를 새로이 확립하고 싶어하는 어떤 권력기관의 대살상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제3세계의 내전을 조장하는 외부의 힘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그렇지않고서야 갑자기 눈이 머는 이런 황당한 전염병이 순식간에 번질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최초로 눈이 먼 남자가 어떤 경로로 눈이 멀게 되었는지 궁금했고, 주인공격인 의사의 아내는 어째서 눈이 멀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러한 궁금증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기로 똘똘뭉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면서 부터 였는데, 주제 사라마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비극이 생긴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이미 구제불능의 잔인한 종이라는 것 아니였을까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강도만 다를 뿐 눈뜬 자들의 세계에도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다만 보고싶지 않은 것을 보지않을 재주 또한 타고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을 지휘한 전범으로 이스라엘 정보부에 붙잡힌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1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다. 당시 이 재판 관정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그가 저지른 악행에 비해 지나치게 평범한 인상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평범한 인상의 아이히만이 저지른 가장 큰 악행은 '명령에 따른 것' 즉, 스스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물론 아이히만의 경우는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것으로 약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 즉 일어나는 불의를 보고도 보지않은 척 눈을 가리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는 것이 '인간다움'을 부르짖는 인간들이 평소 늘 하는 행동으로, 이것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렌트가 말한 악의 주체들은 히틀러나 아이히만 뿐만 아니라 유대인 학살을 보고도 못 본척  눈을 가렸던 당시의 모든 독일인, 유럽인들로 확대될 수 있겠다. 사실은 이들이 더 큰 악 일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제 사라마구는 헐리우드판 재난극을 상상한 것이 아니라, 버젓이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 즉, 무관심이라는 '악'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461쪽)

 

눈먼 자들의 수용소에 수용자가 늘어나자, 그들 중에서 착취를 일삼는 깡패들이 생겨났다. 깡패들은 외부로 부터 배급되는 식량을 탈취하고, 수용자들로부터 돈을 요구한다. 그들은 수용자들의 돈을 전부 빼앗고나자 이번에는 여자들을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병실의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여자들은 이를 뿌리치지 못한다. 거부할 경우 그 병실에는 음식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는데 차라리 굶어 죽을 것을 다짐하거나, 악당들과 맞서지 않는 남자들의 무능함에 진저리가 났다. 죽는 것보다야 낫지않겠느냐는 생각이 정말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정조 관념같은 그런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을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해 주는 것은 '수치를 아는 것'이지 않은가. 이를 모른척하는 같은 병실의 남자들은 생존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몸서리가 쳐진다. 그들이 바로 '악인'이다. 소설에는 이러한 악인의 모습이 숱하게 등장하고, 그를 읽는 '나'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소설을 읽는동안 반복해서 느낀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보지않는다면 나 또한 '악인'인 것이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불의를 목격하고도 눈 감아왔는지, 그 용기없음에 대해 자책할 수밖에.

 

그러나 주제 사라마구가 구제불능인 인간의 이기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었다면 마지막까지 눈이 멀지 않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작가는 그녀를 통해 희생과 헌신 또한 인간이 가진 본질 중 하나이고,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며,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nulp 2016-02-23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엇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맘에 들었습니다. 모두가 눈먼 사회, 그리고 한 명의 눈뜬 이.

비의딸 2016-02-24 15:33   좋아요 1 | URL
저는 그 한명이 왜 눈이 멀지 않는 것인지 계속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그 한 명이 없었다면 소설이 씌일 이유가 없었겠더라구요.
<카인>을 읽고 사라마구를 알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지 않았던게 억울할 정도더군요, 현재는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고 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상상력은 정말 놀라워요.
 
[카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5년 1월, 아시아 최대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닐라에서 12세 소녀에게 질문을 받았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버림받고 나쁜 일들을 겪는다. 약물 중독이나 성매매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신은 왜 이런 일을 내버려두는가." 이에 교황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들이 약물에 빠져들 때, 강제노동에 시달릴 때 우리가 울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출처: 2015년 1월 18일 자 한겨레 신문)

 

죄 없는 사람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려달라다고 외칠 때, 아버지가 아들을 제물로 신께 제사를 지내고자 할 때, 신이 창조한 본성대로 호기심을 발현한 사람들이 소금 기둥으로 변해 버릴 때, 신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아 죄 없는 자가 고통당할 때, 애초에 신이 만든 존재인 인간이 그 존재 자체로 인해 시험당하고 고통받을 때 필리핀의 12세 소녀처럼 묻는 자가 여기 있다. 그는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 카인이다.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아브라함이 물었다. 불에 타버린 소돔과 다른 도시들에도 틀림없이 죄 없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여호와가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내게 하신 약속을 지켰겠지요.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카인이 물었다. 아이들은 틀림없이 죄가 없었을 텐데요. 맙소사, 아브라함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신음 같았다. 그래요, 노인장의 하나님일지는 모르나 그 사람들의 하나님은 아닌 거지요. (11쪽)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쉽게 죽지도 못하는 운명에 처한 카인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시공간을 초월하며 구약의 시대를 떠돈다. 아들 이삭을 하나님을 위한 제물로 바치기 위해 아이에게 막 칼을 들이대고 있는 아브라함을 만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며 어수선해진 바벨탑을 방문하기도 하며,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호기심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된 소돔의 여인을 만나기도 한다. 또한 카인은 강한 믿음을 가진 욥이 오히려 그 믿음 때문에 시험에 들어 열 명의 자식과 재산을 잃고, 그 자신 조차도 병들어 걸인처럼 거리를 떠도는 현장을 보기도 하며, 인간의 악행에 노한 하나님이 세상을 쓸어버릴 때 노아의 방주에 승선하기도 하는 등,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하는 식으로 떠도는 것이다. 그러면서 카인은 어느 시간, 어느 현장에 있든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해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한결같다. "여호와가 일하는 방식은 신비하다."

 

가톨릭 신자인 나 역시도 진심으로 궁금하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며 '신의 이름으로'라고 외칠 때, 창조주의 시험을 피할 수 없는 피조물인 인간들 중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하며, 자기를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외치는 것에 대해,  불의가 진리인양 이 땅에 번지는 것에 대해 신은 어째서 참고만 있는 것인지.

뿐만 아니라 신이 만든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불의에도 불구하고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라고 답하는 종교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는 인간들이 의아스럽다. 그것은 신을 경외해서라기 보다는 신의 저주가 발등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 자신의 생각을 감추는 것에 지나지 않은가 말이다. 만물을 창조하고 세상을 있게 하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획하신 '신'이라면 적어도 강제된 경외를 기뻐하시지는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사라마구는 태어나면서 부터 이미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받아, 동생 아벨을 질투할 수 밖에 없었던, 그리하여 동생을 살해하는 죄를 저지른 불쌍한 인간 카인을 통해 부당하게만 보이는 구약성서의 사건들을 들어 하나님에게 딴지를 건다. "주여 어찌하여 그리 행하시나이까???"

 

왜 하필 카인이었을까. 하나님이 편애하셔서 그의 제사만 기뻐하셨다는 아벨이 아닌, 오히려 저주를 받은 카인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이미 동생을 죽인 살인자이며,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은 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본시부터 사랑을 받는 자는 사랑의 주체에 대해 의심 할 여지조차 갖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저주받은 카인도 결국에는 돌아온 탕아로 하나님께 받아들여 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두려움 속에 의심의 마음을 감추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벨이기 보다는 카인에 가까우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믿기에. 뿐만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애초의 가르침을 거역하지 않기에.

<카인>은 2009년에 발표되었으며, 주제 사라마구는 그 다음해인 2010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읽은 사라마구의 작품은 <카인>이 처음이며, 따라서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포르투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사라마구가 <죄악의 땅>, <수도원의 비망록>, <예수복음>에 이어 <카인>을 쓰기까지 그는 그 누구보다 신의 존재를 믿고 경외했음이 분명하며, 그러므로 그가 <카인>을 통해 품은 그 모든 불경스러운 상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역시 돌아온 탕자로 받아들이시지 않았을까 추측을 한다. '믿는 자는 강하고, 의심하는 자는 약하다' 라고 한 종교 지도자는 말했지만, '의심하지 않으면 믿음도 없다'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벨이기 보다는 카인에 가까운 우리들은 세상의 부당함에 대해 조물주이신 하나님에게 묻기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들이 약물에 빠져들 때, 강제노동에 시달릴 때 우리가 울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말하며 서로를 기만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인간다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되었든 알라가 되었든 인간을 창조한 신이 원하는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인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오, 순수 본문만 700쪽을 넘는 이 대장정의 소설을 읽어내는 것(읽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읽어내야만 했다)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 이유가 단순히 길고도 긴 장, 장편의 소설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보다 더한 장의 장, 장편의 소설에도 쉽게 매혹되는 나는 가히 소설 체질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그런즉 내 말은 이 책이 힘들었던 것은 단지 내가 긴 소설을 참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다른 소설들과는 다른 낯선 점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이야기를 끌고가는데 왜 필요한지 모르겠는 장면들의 연속 같은 것들 말이다. 가정사를 토대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방식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를 기록하는 수많은 소설들이 택하는 흔한 방식이겠으나, 오츠는 달랐다. 오츠 역시 많은 에피소드들을 통해 1967년의 디트로이트 폭동이 일어나기까지 불안했던 사회상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였을테지만, 그 방식이 너무 지루했다. 한마디로 이야기에 재미가 없었던 것(지극히 내 개인적으로). 그냥 단순히 작가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걸까? 아니면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길게 늘여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이 조이스 캐럴 오츠의 스타일인가? 새삼 김영하가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통해 썼던 한 문장이 떠오른다. '압축할 줄 모르는 자는 뻔뻔하다.'

 

비평가들에 의해 플래너리 오코너나 존 업다이크 외에도 나보코프와 보르헤스 등과도 비견되고, 매년 노벨문학상에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는 조이스 캐럴 오츠를 소설 체질이라고 자부하는 나는 <그들>로 처음 만났다. 그녀는 1964년 등단 이후로 50편이 넘는 장편과 1000편이 넘는 단편을 썼으며 시, 산문, 비평, 희곡 등 문학의 모든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는 세상사를 예민하고도 날카롭게 빨아들일 수 있는 촉수와 더불어 그를 표현해는데 지치지않는 열정을 가진 자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그녀를 존경한다. 그녀의 예민한 감성과 열정을 존중하는데 있어 작품을 좋아하건 그렇지않건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건 내가 갖지 못한 종류의 삶에 대한 사랑, 혹은 정열일 테니까.

 

나도 처음부터 이 모양 이 꼴은 아니었다. 저 두 사람이 날 이 지경으로 만든 거지. 저 두 사람 때문에 길가에 누워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꼴이 되다니. 나도 옛날부터 항상 이랬던 건 아니야. (중략) 나도 처음부터 이런 꼴은 아니었어. 저 할망구가 사라지면 나도 다시 일을 시작할 거야. 에설이랑 같이. 너희들한테서 벗어날 거야. 잘난 척하면서 식량만 축내는 것들 같으니. 젠장! 지긋지긋해 죽겠어. 나도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좀 알고 싶어. 이리저리 휘둘리기 싫단 말이야. (중략)

나도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 근사하게 차려입고 거리를 걸으며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중략)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여기에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고. 진짜야. 지금 내 꼴도 싫어. 이런 머리 모양이라니. 게다가 몸도 너무 뚱뚱하잖아. 이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야. 난 다른 모습이야. 화장실이 또 말썽이지. 바닥에 물이 고였어. 내가 왜 그런 일에 신경을 써야 돼? 난 시내의 모든 화장실을 청소하거나 20년 전에 콱 죽어버렸어야 마땅한 할망구를 보살피려고 태어나지 않았어. 저 뚱보 자식이 내 몸에 올라타게 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야! 그래, 난 전에도 지금도 취하지 않았어. 너도 알지? 난 지금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얼굴을 마주하고. 내 기분을 말하는 거라고. 너희는 너희가 특별한 줄 알지? 세상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특별한 줄 알아. 하지만 너희도 나보다 특별할 것 없어.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할 일도 아주 많고, 구경할 곳도 많아. 세상은 이게 전부가 아냐! 이런 게 아냐! 내 인생은 이런 게 아냐!(158쪽~159쪽)

50, 60년대 전형적인 미국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빈민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로레타와 그녀의 아들과 딸인 줄스와 모린이 겪은 그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 이제 겨우 십대에 들어선 아들 줄스에게 하소연하는 로레타의 독백에 가장 많은 공감을 했다. 나 역시도 때때로 그러한 원망, 한탄, 핑계, 저주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해 어떤 은근한 희망을 거는 말들을 남발하곤 한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한 방법임을 은연 중에 알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오늘을 관조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젊음의 몫은 아니다.

사랑, 계급, 인종, 도시 문제를 그린 탁월한 작품이라는 평을 들으며, 알 수 없는 삶을 살아내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책을 읽고있는 독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그들>을 읽으며, 그 안에서 내가 그들과 같은 하나 라는 것을 느낀 것은 바로 저 장면에서 였다.

관람하듯 하는 독서는 재미가 없다. 이야기에 젖어들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내 잘못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에너지가 밖으로 향해 끊임없는 소통과 교류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사람과, 에너지가 밖으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해 끊임없이 자신을 스스로의 안에 가두는 사람. 후자인 나는 블로그에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리며 '나 좀 봐달라'는 메세지를 전하긴하지만, 의지도 끈기도 없어 외부의 반응보다는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에 멈춰서곤 한다. 누군가 좋아하든 말든, 그저 나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나 싫으면 언제고 미련없이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거의 언제나 항상 나를 지배한다.

 

2016년 새해를 맞은 후로는 책장이 잘 넘어가질 않는다. 어찌어찌 한 권을 읽어내도 전처럼 쉽게 감상이 적혀지질 않는다. 머릿속은 늘 항상이라해도 좋을만큼 꺼뭇꺼뭇하고 때론 희끄무레해 어떤 책을 읽든 요사이는 남는 것이 없다. 뭐든 일정한 주기가 있는 법이여서 지금은 그저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고, 내 안의 느낌들도 잘 흐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위안 아닌 위안을 삼으며 다짐 한다. 2월엔 책 좀 읽어얄텐데...

 

 

오에 겐자부로-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나에게 있어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은 좋고 싫고가 확실하다. 이를테면, 1994년 노벨수상작인 <개인적 체험>은 좋았지만, 만년작인 <익사>는 좋지 않았다는 식으로.

공감의 문제인데, <익사>의 경우 오에의 언어에 익숙해지지 못하면 아무런 재미도 느낄 수 없다는 것. 그렇기때문에 오에의 작품을 선택하는데에 두려움이 있다. 60년 가까이 작품을 써온 오에가 만년에 고른 그의 대표작들이라고 하니, 오에는 어렵다는 섣부른 생각을 말하기 전에 이정도는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다.

 

 

 

 

 

 

축제/이청준/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된 이청준 전집의 27권.

그래요, 저는 아직 소설 <축제>를 읽지도 영화 <축제>를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읽어보려구요. 팔순 노모의 장례를 치른 이야기를 토대로 한 소설. 내 나이 서른에 돌아가신 아빠를 추억하며 읽어보고 싶어요. 이제는 죽음의 의식을 축제로 여길수도 있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면 너무 건방진 소리인가요.

 

 

 

 

 

 

 

 

천국의 문-2016년 제4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그냥...

읽고싶은 건 읽고싶은거니까.

 

 

 

 

 

 

2월엔 책 좀 읽어얄텐데.

읽고싶은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물이 흐르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시 책에게로 그렇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04년, 스웨덴에서 호주로 가는 배에 요리사로 승선했던 한나는 배에서 만나 결혼한 항해사 남편이 두 달만에 열병으로 죽자, 때마침 정박한 동아프리카의 항구도시로 도망친다. 배에서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배를 떠난 한나는 항구의 싸구려 호텔에 들었는데, 그곳은 호텔로 가장한 매음굴이었다. 거기서 아이를 유산하고 몸을 추스르는 과정에서 흑인 창녀들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한 한나는 매음굴의 사장인 포루투칼 남자의 청혼을 받고, 아무런 애정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에 응한다. 남편과 아이를 잃고,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도 막막한 열 여덟의 한나에게 부유한 남자의 청혼은 새로운 삶을 위한 돌파구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 아티밀리오는 결혼식 후 몇 주가 지나도록 한나와 관계를 갖지 못해 전전긍긍 한다. 아티말리오는 발기부전이었던 것인데, 실패하는 날들이 몇 주에 걸쳐 계속되자 남편이 눈에 띄게 절망한다고 한나는 느꼈다. 이에 한나는 매음굴에서 자신을 간호했던 창부 펠리시아에게 이 일을 의논한다. 펠리시아는 주술사의 도움을 받아 발기부전에 효과가 있는 약초를 이용해보라고 제안한다. 한나는 보름달이 뜬 저녁, 펠리시아가 건네준 가루를 남편이 먹을 망고에 몰래 바른다. 결혼 후 관계를 시도했던 그 모든 날보다 더 강하고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날도 역시 관계에 실패하자 한나는 남편의 발기부전을 극복하려면 더 강한 약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한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보니 그는 죽어 있었다. 그녀 옆에 누워 있었지만 얼굴에 핏기가 없고 몸도 이미 식어 있었다. …… 그는 잠들 때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한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두 번째로 미망인이 된 것이다. …… 아티밀리오는 완전한 침묵 속에 죽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룬드마르크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에 또 다시, 마지막으로, 실패했다는 수치심에 죽은 것 같았다. (199쪽)

 

남편이 죽었다. 딴에는 남편을 도와 부부로서의 정을 쌓고 싶은 시도였지만, 남편이 운영하는 매음굴의 창부가 준 약물을 먹고 남편이 죽었다. 그런데 한나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 남편은 수시로 흑인들의 말을 믿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흑인들이 할 줄 아는 것은 거짓말 뿐이라며 언제나 그들을 비방했다. 잠시나마 그녀를 간호했던 백인 간호사 아나 돌로레스도 흑인들은 열등한 존재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백인은 신이 부여한 권리로 흑인들에게 명령하고 벌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이나 아나 돌로레스의 주의가 아니었더라도 백인과 흑인 간에 진실이나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나는 보았다. 백인들은 편견과 탐욕으로 흑인들을 지배했고, 자신들의 땅에서 노예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흑인들은 침묵 뒤로 증오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한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백인이나 흑인 모두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안과 불신 속에 살고 있음을 그녀는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수치심에 죽은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아티말리오의 죽음이 흑인 창부와 주술사의 음모에 의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창부가 준 약을 먹고 남편이 죽었는데, 그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한나가 나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가난과 추위를 빼면 기억할 것이라곤 음산한 초록의 깊은 강기슭 뿐인 고향을 열 일곱에 떠난 한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아프리카 땅에 뚝 떨어졌다. 아프리카며 식민지, 흑인, 노예 등에 대한 사전지식은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땅, 낯선 사람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신과 같은 피부색의 사람들이 하는 말을 주의깊게 듣지 않을 수 있는 한나의 주체성이, 혹은 어떤 편견도 갖지 않는 자유로운 생각이 나는 너무나 놀라웠다. 나였다면, 펠리시아를 의심하지 않고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의문은 백인 남편을 살해한 이사벨에게도 이어진다. 약삭빠른 처신으로 식민지에서 거부가 된 피멘타는 흑인 여자 이사벨과의 사이에 혼혈의 아이 둘을 두었다. 피멘타는 이사벨과 마치 결혼이라도 한 것처럼 한 집에 살며 혼혈의 아이들을 자신의 보석이라 칭하고 가정교사까지 두어 보살폈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백인 사회에서 우려나 노골적인 경멸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백인 아내와 백인 아이들의 존재를 안 이사벨은 광분하는 백인 아내 테레사를 제치고 남편 피멘타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다. 나는 이 장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과 아이들 외의 가정을 꾸민 남편에 대한 증오라면 백인 아내 쪽이 더 열렬하지 않았겠는가. 이사벨은 피멘타에게 흑인 애인으로서는 드문 특혜를 받으며 생활했다. 그로인해 피멘타는 백인 사회에서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이 품을 수 있는 증오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프리카에 오기 전 자신의 나라에서 꾸린 가정이 증오의 원인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밖에도 한나가 흑인 남자인 모세스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라던가, 아나 돌로레스가 침팬지 카를루스를 살해하는 장면 등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등장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배재한 간결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나는 무리의 습관과 사회의 질서에 쉽게 동조하는 류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나는 자신에게 보여지는 대로 보고, 자신이 믿는대로 믿었다. 남편이 또는 아나 돌로레스가 흑인들에 대해 아무리 악담을 해도 그녀는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한나의 눈에는 흑인도 백인과 꼭 같은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우월감은 남의 것을 착취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가장 가난한 지역 출신인 한나는 스웨덴에서는 하녀였던 자신이 다만 피부색이 하얗다는 이유로 흑인들을 노예로 부릴 권리가 없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의 불행한 역사를 소설로 담은 <불안한 낙원>을 보며 엉뚱하게도 나는 인간은 무리를 지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를 생각했다. 백인으로, 또는 흑인으로. 남성으로 또는 여성으로 구분하지 않고 독립적인 개체 하나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까.

매음굴에서 돈을 내지 못한 손님으로 부터 아티말리오가 화대 대신 빼앗은 침팬지 카를루스는 인간처럼 옷을 입고 웨이터 노릇을 하다가도 불현듯 사라져 숲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카를루스는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항상 인간세계로 돌아왔다. 그런 카를루스를 보며 한나는 생각한다.

침팬지가 더이상 침팬지이기를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 인간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더 이상 지금의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180쪽)

 

백인 남자를 죽인 이사벨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지하 감방에 갇혀 짐승처럼 죽어간다. 한나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이사벨을 구명하고자 하는데, 이는 백인 사회에 대한 절대적인 저항이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흑인들에 대해 착취를 일삼는 백인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사벨을 통해 자신이 납득지 못하는 공동체에 순종할 수 없는 스스로를 보았으며, 인간이 짓는 억지스러운 무리 대신 그녀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낯선 땅에서 백인으로도 흑인으로도 구속되지 않고 이질적인 존재로 침팬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외로움을 달래는 한나는 자신이 속할 공동체를 갈망하지만, 결국 홀로 남기로 결정한다. 주워진 틀 안에서 정해진대로 생각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인 한나는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다시 카를루스 생각이 났다. 그는 침팬지이기를 원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었다. 외로운 침팬지는 흰 웨이터 외투 속의 공허로 변해버렸다. 그녀는 무엇으로 변하고 있었을까?(185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거서 2016-01-1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 친구로 등록된 회원이 별점을 매긴 책에 대한 리뷰를 반기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책 내용을 요약해놓은 것 같아서 굳이 책을 따로 읽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

비의딸 2016-01-14 10:05   좋아요 1 | URL
윽... 스포가 왕창인 리뷰군요. 책을 따로 읽지 않아도 될 정도라니,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쓴 리뷰만으론 이 책을 이해하기 많이 부족하답니다.
무엇보다 저는 서구열강이 아프리카를 착취하는데에 집중하지 않고, 개인의 정체성에 포인트를 두고 읽었거든요. 오차서 님이 만약 <불안한 낙원>을 읽으신다면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모든 소설은 이야기를 파악하는데서 아니라, 나한테 어떻게 해석되어지는가에서 재미를 느끼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ㅠ.ㅠ 리뷰만으로는 어느 책을 전부 이해하긴 힘들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