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9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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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다면, 로체스터에게 아내가 있다는 걸 알고 난 후에도 달아나지 않았을 꺼야. 아내의 존재와 관계없이 정부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을 꺼야. 어차피 로체스터의 부인은 정상적으로 아내 노릇을 할 수 없는 상태였잖아. 또 제인은 로체스터를 향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72쪽)' 라고 눈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언제나 항상 늘 고백할 만큼 그에게 빠져 있었잖아. 그처럼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어떻게든 함께 있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정식 부인이 될 수 없다고 해서 그 사랑을 포기해야 해? 사랑이 꼭 정식 혼인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건 타인중심적인 생각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기쁨보다 남들이 보는 내 위치가 중요했던 것 아니냐 그말이야.  

 

물론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제인과 중혼하려 한 로체스터의 행위는 분명 잘못이야. 범죄와도 같은 거지. 그 사실을 안 제인이 배신감에 좌절할 수 있지. 또 자신을 속인 로체스터에 대해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분노할 수도 있지. 아니, 분노하는 게 오히려 정상이지. 그러나 제인은 아내가 있다는 걸 알고난 후에도 로체스터에 대한 사랑이 변한 건 아니라고 하잖아. 헐..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을 기만한 로체스터를 벌하기 위해 그로부터 불현듯 사라지는 것을 택했다고, 그래서 로체스터가 고통받길 바란다고 했다면, 그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야. 사랑한다면서 그 사랑을 속이려 한 로체스터의 태도는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해도(사실 불가피한 일도 아니였지!), 그의 인간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거든. 로체스터는 제인의 생각과 달리, 돈과 가문에 기대어 사는 그저그런 한량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던거지. 그렇지만 제인은 로체스터의 기만을 알고난 후에도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132쪽)고 고백해. 로체스터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지경이니, 그정도의 잘못쯤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노라 여겨주겠다는 태도였어. 이에 로체스터는 아내가 있는 손필드를 떠나 유럽으로 가서 살자고 해. 그러나 제인은 정부만은 되지 않겠다며 로체스터로 부터 달아나. 제인 에어의 이런 다부진 결행을 자존감과 독립심으로 연결하는 일반적인 해석이 나는 정말 마음에 안들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거야. 이건 좀 이상적인 여성성에 대한 지나친 로망 아냐?

 

제인 에어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친부모를 여의고 외숙모의 손에서 사촌들과는 표나게 차이나는 대우를 받으며 생후 10년을 보냈어. 외삼촌도 없는 집에서 제인은 외숙모에게 어린 아이가 견디기엔 가혹한 대접을 받았던 거야. 사촌들과 하녀들도 부모가 없는 어린 제인을 가엾게 여기기보다 자신들의 삶에 끼어든 불청객쯤으로 여겼어. 열 살이 된 제인은 사촌들과 불화하고 자신을 표나게 구박하는 외숙모에게 대들다가 자선학교로 보내져. 제인은 자아가 강한 아이였어. 쫓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선학교로 떠나면서 자신을 이렇게 대접하는 외숙모를 평생 찾지 않겠으며, 거짓말쟁이이고 못된 아이는 자신이 아니라 사촌들이라는 독설을 퍼부어. 이제 겨우 열 살 된 애가 말이야. 제대로된 사랑이나 보살핌을 경험하지 못한 제인에게 남은 건 독기였던 거지. 말하자면 기댈 곳 없는 어린 아이가 자신을 버리는 어른을 향해 최후의 발악을 했던거지.

 

한편 자선학교에서 제인은 예의 그렇듯 굶주림과 추위에 떨었어. 학교를 운영하는 목사가 이중인격자이며, 수전노였던 거지. 그러나 다행히 좋은 선생님과 친구를 만나 세상이 자신을 꼭 차별만 하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긴했어. 또한 더 높고 큰 사랑은 '신'에게서만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도 했지. 그렇지만 어쨌든 제인은 성장기 내내 사랑과 보호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거야. 그럼에도불구하고 제인 에어에게는 불굴의 자존심이 있었지. 자신은 독립적이며, 절대로 지지않겠다는 오기같은 것이 있었던 거야. 나는 그 오기가 참 부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섬뜩할 때도 있었어. 어린아이가 야무지다 못해 독기를 품는 모습은 사실 좀 안예쁘거든. 그건 왜 그런걸까? 나의 내면을 좀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해.

 

어쨌든 보통의 사랑받지 못한 존재는 이후의 전생애 동안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며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 심리학의 정석이지. 그러나 제인은 그렇지 않았어. 사랑 앞에서도 자신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언제나 당당했던 거야.

제인은 가정교사로 들어간 부잣집에서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주인남자에게 빠지게 돼. 세상 경험이 없는 열여덟 살의 아가씨가 모든 것에 능숙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일거야. 로체스터는 제인이 모르는 세상을 두루 경험한 탄탄하고 여유있는 남자였던 거야. 제인은 그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바치길 원해. 그런데 이 영악한 제인은 경험도 없으면서 남자를 희롱할 줄 알아. 그녀는 그냥 대번에 자신을 주어버리지 않고 밀당을 하네. 세상을 두루 떠돌며 온갖 경험을 다 한 로체스터는 세상물정 모르면서 까부는 이 순둥이 아가씨에게 색다른 매력을 느끼지. 드디어 제인은 로체스터의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게 되는거야. 그런데 육체적인 만족보다 정신적인 희열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 제인은 보석으로 칠갑을 해주겠다는 로체스터의 제안 같은 건 단칼에 물리칠 줄 알아. 그런것쯤은 자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지. 나는 제인의 이런 점이 참 이상했어.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이 상대방이 보여주는 사랑의 증거들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거 말야.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제인 에어가 돈으로 부터 초연했던 것, 정부는 되지 않겠다고 로체스터로 부터 달아났던 것, 그후에 장님이 되고 다리를 절게 된 로체스터를 완전하게 사랑하며, 평생을 희생하고 살기로 결심하는 점 등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않아. 그건 작가인 샬롯 브론테가 세상의 시선으로 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야. 목사의 딸로 태어나 훗날 목사의 아내가 된 샬롯답다는 생각까지 들어. <제인 에어>는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씌인 소설이라지만, 내 눈엔 전혀 혁명적으로 보이지 않아. <제인 에어>가 150년도 더 된 소설이라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되지. 물론 그렇긴하지만, 여성주의적 시각이였다기 보다는 그시대의 사회상에서 정해진 틀을 벗어나지 않은 소설이었다고 생각해. 이를테면, 인간은 물질에 초연해야 하고, 외모를 비롯한 보여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 다는 점을 강조한 거지. 물론 그 희생은 여자에게만 강요된다는 점도 중요해. 그 증거로는 로체스터는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자기 아내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한 인간으로써 존중하지도 않았지. 뿐만아니라, 독립적이지만 순종적이기도 한 제인은 손을 비롯한 체구가 작다는 점이야. 로체스터는 이점을 책 전체에서 몇 번이나 강조해서 되뇌곤 하는데, 이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그의 아내나, 욕심 사납고 속물적인 이유에서 로체스터와 결혼하려 했던 잉그램은 체구가 크게 묘사되면서 희생적인 제인과 대조되잖아. 이건 분명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았던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해.

샬럿은 그 시대가 허락하는 도덕적 테두리 안에서 억압된 자신의 욕망과 밀당하며, 제인 에어라는 인물을 창조해 낸거지. 제인 에어는 문학사에서 자아가 강하고 독립적인 여인 중 한명으로 내내 추대돼. 물론 나는 인정하지 않지만.

 

건전한 영국 교육은 그녀의 프랑스적인 결점을 많이 교정해 주었다. 그래 그녀가 학교를 졸업했을 때엔 붙임성 있고 얌전한, 양순하고 상냥하고 절조 있는 나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423쪽).

 

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해내고 마는 선량하고 성실한 제인이 얼굴도 모르는 외삼촌이 남기고 간 재산을 상속받아 부자가 된다는 설정이야. 제인 에어를 읽는 소녀들과 처녀들은 이렇게 생각해야는 거지? 아 세상을 사는데 외모나 돈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언제나 선량한 마음으로 자신과 신을 믿으며 나아갈 때 지복이 주워지는 거야! 라고.

그렇지만 나는 이따위 설교집 딸에게 절대 추천하지 않을꺼야. 물론 딸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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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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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없다. 무신경하게 툭툭 뱉어내는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 속에 작가가 숨겨놓았을 의미를 생각하느라 피곤하기까지 하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일명 부조리극으로 사건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거의 없다. 뚜렷한 스토리도 결말도 없다. 그러니 말과 말 사이에서 어떤 메세지를 찾으려는 내 의도 자체가 불필요한 행동이다. 그럼에도,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쏟아내는 무의미한 말들을 유심히 듣고, 광대같은 몸짓을 잘 관찰하려 애쓴다. 혹시라도 내가 놓치는 것이 있을까싶어 미간에 주름을 모으고 뚫어질 듯 책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때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대사에서 큰 의미를 발견한 양 밑줄을 긋기도 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아니라면 포조나 럭키에게서라도.

 

결국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도 아닌 사람들이 아무 뜻도 없는 말들을 주고받고, 무엇인지, 누구인지도 모를 그 무엇을 기다린다는 정말  알 수 없는 희극이라는 것 외에는. 그렇지만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극으로 본다면 꽤 웃을 것 같다. 웃겨서 웃기도 하고, 어이없어서 웃기도 하고, 당황해서 웃기도 하다가 끝내는 씁쓸한 느낌이 들 것 같다. 이런걸 웃프다고 하던가.

 

고도는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라면 나 역시도 초반에는 종교적인 구원에 방점을 두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기다리는 것은 지리멸렬한 삶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 분명한 메시아로 보였으니까.

 

에스트라공 : 하지만 우린 약속을 받았으니까.

블라디미르 : 참을 수가 있지.

에스트라공 : 지키기만 하면 된다.

블라디미르 : 걱정할 거 없지.

에스트라공 :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블라디미르 :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

좋은 일도, 그렇다고 특별히 나쁠 것도 없는 하루를 보내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오지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할 일없이 떠들다 지루해 한다. 지루해하다 못해 목을 맬까하기도 하지만, 그것조차도 쉽지않다. 죽을래도 죽을만큼의 강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들은 그조차도 선택하지 못할 만큼 지쳐있거나 무심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의 고도는 '죽음'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죽음이야말로 무료한 생의 진정한 구원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블라디미르 : 고도 씨가 보낸 거지?

소년 : 네.

블라디미르 : 오늘 밤에는 못 오겠다는 얘기겠지?

소년 : 네.

블라디미르 : 하지만 내일은 온다는 거고?

소년 : 네.

고도가 의미하는 것이 구원일지, 영원한 잠일지는 극 내에서 분명히 밝혀지질 않고, 언제 오는 것일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그렇듯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역시 지금은 오지 않지만 언제고 불현듯 오고말 '고도'를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작가가 의도한 것이 이처럼 '아무 의미 없음'에 대한 것이라면, 그것을 발견해 낸 내가 기특하기도 하련만 그러나 나는 모두가 몰려가는 줄에는 서고싶지 않다. 대단한 작품을 발견한 듯 열광하고 싶지도 않다. 끝까지 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오로지 '재미없다'는 것 뿐. <고도를 기다리며>도, 내 삶도.

 

- 인상깊었던 장면 : 개를 연상시키는 포조의 노예 럭키가 장장 세페이지에 걸쳐 지껄이는 앞뒤 맥락이 없는 문장과 단어들을 보면서 김중식 시인의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의 한구절이 생각났다. 

'우리는 대화할 때 상대의 말을 지나치면서, 그러나 고개는 끄덕이면서 자기 이야기만 열심히 구상한다

대화란 서로가 귀를 틀어막은 채 서로의 등뒤에 있는 벽에 대고 고함치는 행위임(김중식,행복하게살기 위하여 中)'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끝도 없는 말들을 쏟아내고(작가 또는 지은이를 비롯하여 모든 창작자, 혹은 그저 단순히 취미로 글쓰기를 즐기는 이까지), 그것들을 읽는 독자인 나는 제대로 살고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 의미없는 문장을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인다. 쓰고 읽는 그 모든 중요하지 않은 행위들이 '고도'를 기다리는 중의 무료함을 달래려는 시도가 아닐런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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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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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 노우, 판타지라니

소설이건 영화건 판타지 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반지의 제왕>도 <해리포터>도 보지않았다. 전체적인 맥락은 그렇다쳐도, 도대체 말이 되지않는 장면들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상이나, 일어날 법 하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이 영 거북스러운 것인데,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표현한들 한마디로 나는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다. 용이 날고, 도깨비가 튀어나오며, 반지만 끼면 모습이 사라진다거나 빗자루를 타고 날 수 있다는 얘기는 꼬마들의 그림책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더구나 작가나 혹은 등장인물들끼리만 이해하는 모종의 진실을  만들어두고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합네 하는 그런 이야기는 어쩐지 낯뜨겁다. 나는 판타지도 영웅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뇌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파묻힌 거인>을 받아들고 몹시 당황했다. 처음부터 이건 '대놓고 판타지'라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즈오 이시구로가 아닌가. 나는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매력

복제인간들의 사랑을 그린 <나를 보내지 마>를 읽고 장기이식을 목적으로 탄생한 클론들의 존재를 용인할 수 있는 사람이 어쩌면 바로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밤잠을 설쳤던 나는, 그후로 <남아있는 나날>과 <창백한 언던 풍경>을 지나, 단편집 <녹턴>까지 모조리 찾아 읽을 정도로 가즈오 이시구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의 소설들은 한결같이 놀라운 흡인력으로 마지막까지도 책을 놓을 수 없게 했으며, 다 읽고 난 후에도 그 잔상이 오래도록 남아 나를 긴장시켰다. 나는 그 속에서 어김없이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순식간에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인력과 공감하게 하는 힘, 그것이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의 매력이다. 그러나 <파묻힌 거인>만은 '포기다' 싶었다. 아무리 이시구로라도 나에게 판타지는 무리이므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을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서사보다는 등장인물의 삶과 내면적 심리 풍경이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책장을 덮는 순간 삶의 진실에 맞닿아 있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478쪽).' 라고 한 옮긴이의 말은 내가 느낀 <파묻힌 거인>에 대한 감상과 너무도 꼭 같다. 4부의 막바지에 이르며 다다르는 진실에 책장을 넘기는 손은 바빠졌지만, 마음은 좀더 오래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제서야 나는 이야기의 형식이 아닌 작가의 메세지에 빨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라면

공상과학이든 판타지든 지금까지 읽은 이시구로의 책들은 작가가 전하려는 메세지가 분명하게 읽힌다. 작가인 이시구로와 독자인 나의 주파수가 맞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시구로가 소설을 통해 추구하는 진실의 형태가 모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상상불가한 판타지적 요소들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전의 책들에서 느꼈던 놀라운 흡인력을 <파묻힌 거인>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구조를 이해하고, 작가의 메세지를 확인하는 순간 이 소설은 나에게 있어 더이상 일어날 법 하지 않은 판타지가 아니었다.

<나를 보내지마>의 주인공들이 장기이식을 위해 복제된 사람들이며, 그들은 주고 또 주다가 더 줄게 없어진 그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이해한 후, 그들의 장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이거나, '나'와 관련된 가족들이었어도 복제인간들의 존재에 대해 부정할 수 있었을까 하는 고민을 했던 그때와 똑같은 심정으로 떨리는 밤을 보낸 것이다. '나'라면 봉인된 기억을 되살려 내 개인적 삶을 추억할 것인가, 오히려 기억과 함께 진실을 밀폐하는데 가담해 당분간의 평화를 유보할 것인가.

 

기억이라는 거인

<파묻힌 거인>의 사람들은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소소한 추억뿐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나 인생을 바꿀 정도로 엄청났던 사건까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또한 과거를 잃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 아닌 집단적인 현상이다. 사람들은 전쟁을 비롯한 지나온 역사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억이 없다. 망각 덕분에 서로다른 종족간에 증오도 복수도 잊은채 평화로운 것이다. 이쯤되면 망각은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권장되어질 만한 선행으로 보인다. 인간 세상에 전쟁이 없을 수 있다면, 원망과 증오가 사라진다면, 그까짓 개인적 추억쯤 얼마든지 잊어도 좋을 일 아닌가. 또 개인적인 추억이라고해서 반드시 좋은 기억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살면서 잊고 싶은 과거 한둘은 누구나에게 있는거니까. 그러니 망각은 분명 좋은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정말 잊어도 좋은 것일까. 과거에 전쟁이 있었고, 전쟁 중에 지키기로 한 종족간의 약속은 무시되었다. 평화를 만든다는 대의아래 부녀자와 아이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그 사실은 잊혀졌다. 전쟁과 살육에 대한 기억은 증오와 복수로 이어지기 마련이니까. <파묻힌 거인>을 읽으며 나는 기억을 잊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자꾸만 기울어졌다. 기억을 끊어내지 않으면 증오는 사라지지 않을테고 복수 역시도 되물림될 터, 그러니 인간사에서 피의 역사를 끊어 내기 위한 것이라면 과거에 당한 억울한 사정은 그만 잊는 것이 맞지않겠는가.

 

그렇지만 정말 잊어도 좋은 것일까. 기억하지 않는다면 힘을 쥔 자들은 개인의 생각과 과거를 지배하고 역사를 왜곡하려 들 터인데? 증오를 끊어내고 복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과거의 기억을 잊지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힘을 쥔 자들의 행태를 똑똑히 기억해 다시 되풀이 되는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기억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시구로는 이번에도 이전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묻고있다. 너라면 기억하지 않겠느냐고. 너라면 망각이라는 편의에 안주해, 평화를 가장한 몽롱한 시간 속을 헤매겠느냐고. '당분간의 평화'를 지키기위해 과거의 기억을 파묻으려는 자들에게 너 자신도 모르게 휩쓸리며 즉흥적 욕망에만 몰입하고 있지 않느냐고. 

'과거를 지배하려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라고 조지 오오웰은 <1984>에서 말했다. 아아, 무섭다. 과거를 지배하려는 권력자라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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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패밀리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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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과 食口

글자만 놓고 본다면 가족과 식구는 엄연히 다르다. 가족은 혼인으로 시작하여 혈연, 나아가서는 입양으로 인해 묶인 사람들을 일컫지만, 식구는 말그대로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직장, 한단체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해피 패밀리>에 등장하는 유치원생 지현이 아빠인 민형에게 식구에 대해 물었을 때, '같이 살며,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건조하지만 명쾌한 답을 내놓았더라면 함께 살고 있는 외할머니를 식구라고 하면서도, 함께 살고있지 않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그리고 고모들을 식구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에 식구와 친척을 구별하는 일은 너무 어려운 것이고, 세상에는 잘 알지 못하겠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아빠의 설명을 납득하지 못한 지현이, 엄마와 외할머니에게 자기 식구에 대한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형이 짧고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면, 유치원생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 못할 '따지고 보면 세상사람들 모두가 한식구이며, 더 나아가 생명이란 생명은 모두 하나에서 출발한 한식구'라는 외할머니의 대답에 자기가 좋아하는 꽁치 구이를 먹어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는 고민은 하지 않았을텐데. 지현은 분명 "우리 식구는 몇 사람인거야?(177쪽)" 라고 물었으니까.

 

유치원 아이의 질문이라고는 하나, 가족과 식구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기는 어렵다. 가족과 식구는 정말 같은 것일까? 가족을 혈연이나 서류로, 식구를 한지붕 아래서 실제 밥을 같이 먹는 관계로 규정한다면, 결혼하고 새로운 가정을 구성할 때는 어디까지를 식구로 보아야 하는 걸까? 친정과 시댁의 구성원들 모두를 식구라 여겨야 하는 것이 맞다는 건 알겠지만, 실지 그들 모두 각자각자가 한가족이라고 여기고 행동할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직계 부모와 형제를 빼면 잘 알지 못하는 사촌들이 그득한데도 그들도 모두 식구라해야는 걸까? 따로따로 가정을 갖고나면  부모와 형제조차도 이름만 식구인건 아닌가?

 

며느리의 자리

가족이라는 이름은 참 버겁다. 자라면서 살가운 정을 느껴보지 못해서인지 결혼 후로는 친정도 내 식구 같지 않고,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만나면 서로 살뜰한 정을 나누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언제나 낯설다. 엄밀히 말하면 시댁식구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은 남편이라는 고리를 빼면 생판 남인 것이니까. 민형의 아내 현주는 시부모들로 부터 '복덩어리'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며느리 노릇을 훌륭히 해 내며, 두명의 시누이들과도 때로는 친자매로 보여질만큼 무척 사이가 좋다. 그런 현주는 시댁 식구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독백한다.

 

내 위선은 지혜로운 위선이다. 가족들 사이에 평화를 만들어내는 위선. 가족들 사이에 사랑을 만들어내는 위선. 비록 그 평화가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듯 위태위태한 것이고, 그 사랑이 보기에만 아름다운 치장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82쪽).

 

현주의 위선이 지혜이든 가증이든 어쨌든 가족간의 평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사실이다. 또 위선이라고는 하지만 현주가 딱히 시댁 식구들이나 남편에게 어떤 불만이 있거나 겉다르고 속다르게 행동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더라도 입안의 혀처럼 굴며 시어머니의 비유를 맞추는 현주를 보노라면 며느리라는 자리가 무슨 벼슬도 아닌데 우리의 며느리들은 어째서 이토록 끊임없이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건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서만 주어지는 평화라면 그 평화는 언제나 늘 위태로울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말이다. 한민형은 아내가 만들어내는 위선적인 평화에 대해 튼튼한 낙관주의라고 이름하며, '그것이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노력할 수 있는 능력과 기질은 타고난 것일터'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한민형의 생각은 자기 편하자는 생각일뿐, 타고난 기질이 아니더라도 가족의 평화가 곧 나의 평화라는 동일시를 끊임없이 세뇌 당해온 결과로 서현주라는 인물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싶어 씁쓸하다.

 

착취를 정당화하는 이름, 가족

한민형으로 부터 시작되어 각자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해피 패밀리>의 차례를 보며, 한민주와 한영미가 같은 해에 출생했길래 쌍동이 자매려니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틀렸다. 한민주는 친 딸이고, 한영미는 입양한 딸이다. 그녀들의 엄마인 민경화는 민주와 영미를 드러내놓고 차별했는데, 그 모습에서 딸과 며느리를 대하는 일반적인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드러내놓고 차별하진 않지만 언제나 점잖게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방관하고는 나중에서야 아내의 잘못을 꼬집으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한진규의 모습에서 우리네 시아버지들의 모습 또한 보았다. 딱히 고약한 시부모가 아니더라도 며느리를 대하는 마음이 딸을 생각하는 마음과 같을수는 없다. 그렇다고해서 그것을 잘못이라고 못박을 수도 없다. 그러나 감정을 속이고 위선의 탈이라도 써야하는 서로 간의 과도한 책임에 대해서라면 그것만은 정말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그야말로 누군가의 희생을 끊임없이 필요로하는 일이니까.

지나친 사랑, 과도한 책임, 그로인한 과장된 평화는 친자식 친부모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바라는 어떤 것들은 순수한 사랑이기보다는 부모 자신의 욕심이거나 이기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는 물론 부부간의 사랑에도 유효한 이야기다. 이를테면 남편이 법조인이 됐다면 자신이 남편을 더 사랑했을 것(70쪽)이라는 민경화의 솔직한 독백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들의 모습은 몹시 속물적이고 천박하지만, 어느 누구인들 양심의 가책없이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책 속의추함이 현실의 추함을 따라잡는 법은 거의 없다. 책 속의 비참함이 현실의 비참함을 넘어서는 법도 거의 없다(9쪽)'. 라고 한 작가의 말처럼 근친상간 쯤이야 이제는 문학에서 진부한 소재로 치부되곤 한다. 따라서 <해피 패밀리>의 결말은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 놀랐다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떻게 이런일이...'라는 극단이나 막장이 아니라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행하는 위선과 착취에 대한 것이였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환치되는 착취야말로 너무 뻔한 수법이 아니겠냐는 말도 더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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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다락방의 책장에서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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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고 싶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읽어주는 글을 쓰고 싶다. 어쨌든 글을 쓰고 오픈해두는 의미는 '내 글 좀 읽어달라'는 얘기니까. 그래서 종종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읽는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글쓰기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 전문가가 되고싶다거나 작가를 꿈꾸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너무 엉망으로 아무런 체계도 없이 두서없는 글을 써서는 안되겠기에 나보다 먼저, 더 많이, 더 잘 쓰는 사람들의 글쓰기 방식을 참고하고 싶은 것이다. 혹, 그들은 내가 모르는 어떤 비책이라도 알고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최근에 읽은 책으로 기생충 박사가 쓴 <서민적 글쓰기>가 있다. 그는 박사라는데, 그것도 남들이 별로 알고싶어하지 않는 분야의 전문 박사라는데, 의외로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긴다(인문학을 중요시 하지않는 우리나라에서 한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업으로하는 이른바 전문가들은 왠지 일반적인 책읽기나 글쓰기를 비롯해 다방면에 잡다한 관심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다르게 <서민적 글쓰기>의 지은이 서민은 본업 외에 컬럼니스트를 겸할 정도로 글을 잘쓴다. 책에서 그는, 서평은 자기 느낌을 자유롭게 쓰는 것이고 정해진 틀은  없다며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의 한부분을 인용했다.

 

"나는 책에 대한 글을 쓸 때 줄거리를 요약하지도 않고 형식을 갖추지도 않는다. 작가가 의도한 것과 무관하게 사소한 부분에 꽂히기도 하고, 나의 경험과 비교하기도 한다. 내가 쓴 글은 순전히 나의 감상이고...."

바로 이 문장을 읽으며 이유경의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가 "급" 읽고 싶어졌다. 나는 누가 뭐래도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을 글로 쓰고 싶은 거니까. 내 느낌을 잘 정리해서, 그걸 읽는 사람들이 내가 느낀 것과 같은 것을 느꼈으면 좋겠으니까. 그래서 이왕이면 그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으니까.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책을 읽는 이들이 많을수록 사람과 삶에 대한 생각은 깊어지고, 딱 그만큼 세상은 더 부드러워질테니까.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3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연간 독서량은 9.2권으로 OECD 회원국 중 꼴찌 수준(2015.10.18. 한국일보)이라고 한다. 한 달 독서량이 한국 성인의 연간 독서량을 웃도는 나는 제법 책 좀 읽었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를 주욱 훑어보고는 좀 의아했다. 그녀도 나도 소설을 주로 읽는데, 의외로 내가 읽지않은 책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떤 책들은  제목도 작가도 낯설어 당황스럽기까지 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책이 더 반가웠다. 그녀가 읽어주는 책들을 읽고, 아직 읽지 않은 새로운 책들을 읽을 수 있을테니.

SF, 스릴러, 추리물, 청소년 문학, 고전 문학, 현대 문학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하는 그녀의 책읽기 스타일은 소설이란 소설, 하다못해 그림책까지 섭렵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책을 읽어도 글쓰기 스타일은 늘 한결 같았는데, 서민은 <서민적 글쓰기>에서 이유경의 글쓰기 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유경은 책의 사소한 부분을 가지고 리뷰를 쓰는 걸로 유명하다(<서민적 글쓰기>, 232쪽)."

 

지은이 이유경과 내가 같이 읽은 많지않은 책들 중,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있다. 이 책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미국인으로 살아가던 파키스탄 청년이 9.11 사건을 목격하고 자신은 미국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파키스탄이 전쟁의 위기에 놓이면서 자신의 위치에 갈등하던 청년은 파키스탄으로 돌아가 근본주의자가 된다. 서구의 시선에서 바라본 자신의 조국을 비롯한 이른바 제3세계는 왜곡되고 뒤틀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그것은 '미국이 세계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대해 늘 분개하고 있었다'는 찬게즈의 고백이 바로 나의 그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 역시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근본주의자가 될 수 없고, 찬게즈는 그 길을 택했다. 근본주의자가 된 찬게즈는 정체불명의 미국인에게 자신이 근본주의자가 된 그간의 내력을 들려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내용인데, 그의 고백을 듣는 익명의 미국인은 아마도 정보원이거나 킬러인듯 주머니가 권총으로 생각되는 물체로 불룩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도 위태위태한 장면들이 안타까웠고, 힘의 논리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상상하는것이 가슴이 아팠으며, 그리하여 찬게즈 같은 사람들이 근본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는 내력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만큼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랐다. 그랬기때문에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이 책에서 발견하곤 무척 기뻤는데, 미국이 세계에서 행동하는 방식 운운하며 전투적인 감상을 늘어놓았던 나와 다르게 그녀가 쓴 글의 제목은 "나의 공간을 지켜주세요".

이유경은 찬게즈가 사랑한 미국인 여자에 집중했고, 그녀는 찬게즈에게 "당신은 사람들에게 공간을 줘요."라고 말했다던가. 나는 도대체 기억도 나지 않는 대목이니, 이유경의 감상글이 얼마나 새롭게 읽히던지. 그녀는 테러니, 제3세계니, 불편한 진실이니를 쓴 이 아슬아슬한 책을 읽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예의바름, 아름다움 뭐 그런것에 대해 쓴 것이다. 이 감상글을 읽고 나는 다소 놀랐다. 하나의 책을 읽고 나누는 감상은 그 책을 읽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지 않은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가장 그녀다운 그리고 가장 나다운 일이라는 것에 대해.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에는 이유경처럼 글 잘 쓰는 비책 나온다. 잘난 척하지 않고 아는 척도 하지 말며, 읽는 사람이 헛갈리지 않게 쉽게 써야 하고, 무엇보다 쓴다는 행위를 어여삐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녀만의 글쓰기 비결이며, 매력이기도 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녀의 개인적인 감상글에 매혹되어 몇 권의 책을 주문할 수 밖에 없었음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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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1-05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의딸님은 글을 잘 씁니다. 진짜예요. 저는 책에 대한 감상을 적당한 분량(너무 짧지도 않고, 너무 길지도 않은)으로 풀어내는 서평이야말로 잘 쓴다고 생각해요. 비의딸님의 글이 제가 선호하는 서평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어요. ^^

비의딸 2015-11-06 10:10   좋아요 0 | URL
오홋... 부끄부끄하면서.. 기분이 좋으면서.. 기운도 나면서.. 다시 부끄부끄하고.. ^^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계속해 볼 용기도 생기네요.

chsnyoo 2015-12-14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 이유경이 후반부에서 김유경으로 바뀌었어요. 수정이 필요하네요.

비의딸 2015-12-15 10:46   좋아요 0 | URL
헉..이런 중대한 실수를... 꼼꼼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heartvibrator 2016-09-0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회사에서 일은 안하고, 하루종일 비의딸님 글 읽었네요.
이 리뷰에 쓰는게 좋은 거 같아서 남겨요~ ㅋ

글이 잘 읽혀요~ 너무 좋네요^^
이렇게 담백하면서,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문장들이 넘 부럽네요.ㅋ
배우고 갑니다.

자주 놀러올게요!

비의딸 2016-09-19 11:20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서재에 글을 남긴지도 제법 된 것 같은데 이렇게 계속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에 새삼 놀랍기도 하고, 또 함부로 글을 남겨서는 안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오래 쉬고 출근했더니 머리가 멍... 그냥 또 잠이나 잤으면 싶으네요.
하늘이 참 예뻐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