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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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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아시아 최대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닐라에서 12세 소녀에게 질문을 받았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버림받고 나쁜 일들을 겪는다. 약물 중독이나 성매매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신은 왜 이런 일을 내버려두는가." 이에 교황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들이 약물에 빠져들 때, 강제노동에 시달릴 때 우리가 울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출처: 2015년 1월 18일 자 한겨레 신문)

 

죄 없는 사람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려달라다고 외칠 때, 아버지가 아들을 제물로 신께 제사를 지내고자 할 때, 신이 창조한 본성대로 호기심을 발현한 사람들이 소금 기둥으로 변해 버릴 때, 신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아 죄 없는 자가 고통당할 때, 애초에 신이 만든 존재인 인간이 그 존재 자체로 인해 시험당하고 고통받을 때 필리핀의 12세 소녀처럼 묻는 자가 여기 있다. 그는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 카인이다.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아브라함이 물었다. 불에 타버린 소돔과 다른 도시들에도 틀림없이 죄 없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여호와가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내게 하신 약속을 지켰겠지요.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카인이 물었다. 아이들은 틀림없이 죄가 없었을 텐데요. 맙소사, 아브라함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신음 같았다. 그래요, 노인장의 하나님일지는 모르나 그 사람들의 하나님은 아닌 거지요. (11쪽)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쉽게 죽지도 못하는 운명에 처한 카인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시공간을 초월하며 구약의 시대를 떠돈다. 아들 이삭을 하나님을 위한 제물로 바치기 위해 아이에게 막 칼을 들이대고 있는 아브라함을 만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며 어수선해진 바벨탑을 방문하기도 하며,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호기심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된 소돔의 여인을 만나기도 한다. 또한 카인은 강한 믿음을 가진 욥이 오히려 그 믿음 때문에 시험에 들어 열 명의 자식과 재산을 잃고, 그 자신 조차도 병들어 걸인처럼 거리를 떠도는 현장을 보기도 하며, 인간의 악행에 노한 하나님이 세상을 쓸어버릴 때 노아의 방주에 승선하기도 하는 등,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하는 식으로 떠도는 것이다. 그러면서 카인은 어느 시간, 어느 현장에 있든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해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한결같다. "여호와가 일하는 방식은 신비하다."

 

가톨릭 신자인 나 역시도 진심으로 궁금하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며 '신의 이름으로'라고 외칠 때, 창조주의 시험을 피할 수 없는 피조물인 인간들 중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하며, 자기를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외치는 것에 대해,  불의가 진리인양 이 땅에 번지는 것에 대해 신은 어째서 참고만 있는 것인지.

뿐만 아니라 신이 만든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불의에도 불구하고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라고 답하는 종교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는 인간들이 의아스럽다. 그것은 신을 경외해서라기 보다는 신의 저주가 발등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 자신의 생각을 감추는 것에 지나지 않은가 말이다. 만물을 창조하고 세상을 있게 하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획하신 '신'이라면 적어도 강제된 경외를 기뻐하시지는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사라마구는 태어나면서 부터 이미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받아, 동생 아벨을 질투할 수 밖에 없었던, 그리하여 동생을 살해하는 죄를 저지른 불쌍한 인간 카인을 통해 부당하게만 보이는 구약성서의 사건들을 들어 하나님에게 딴지를 건다. "주여 어찌하여 그리 행하시나이까???"

 

왜 하필 카인이었을까. 하나님이 편애하셔서 그의 제사만 기뻐하셨다는 아벨이 아닌, 오히려 저주를 받은 카인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이미 동생을 죽인 살인자이며,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은 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본시부터 사랑을 받는 자는 사랑의 주체에 대해 의심 할 여지조차 갖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저주받은 카인도 결국에는 돌아온 탕아로 하나님께 받아들여 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두려움 속에 의심의 마음을 감추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벨이기 보다는 카인에 가까우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믿기에. 뿐만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애초의 가르침을 거역하지 않기에.

<카인>은 2009년에 발표되었으며, 주제 사라마구는 그 다음해인 2010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읽은 사라마구의 작품은 <카인>이 처음이며, 따라서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포르투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사라마구가 <죄악의 땅>, <수도원의 비망록>, <예수복음>에 이어 <카인>을 쓰기까지 그는 그 누구보다 신의 존재를 믿고 경외했음이 분명하며, 그러므로 그가 <카인>을 통해 품은 그 모든 불경스러운 상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역시 돌아온 탕자로 받아들이시지 않았을까 추측을 한다. '믿는 자는 강하고, 의심하는 자는 약하다' 라고 한 종교 지도자는 말했지만, '의심하지 않으면 믿음도 없다'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벨이기 보다는 카인에 가까운 우리들은 세상의 부당함에 대해 조물주이신 하나님에게 묻기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들이 약물에 빠져들 때, 강제노동에 시달릴 때 우리가 울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말하며 서로를 기만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인간다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되었든 알라가 되었든 인간을 창조한 신이 원하는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인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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